An affair to remember (1955) 신파조 멜로물의 절정. 스포일러 있음.
이 영화는 세번 만들어졌는데, 두번째 영화인 이 영화가 가장 좋다.
이 영화를 안 본 사람도,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연인 이야기는 어디선가 들어봤을 것이다.
거대한 유람선을 타고 대서양을 건너가던 배 안에서 운명적으로 만난
두 사람이 겪는 애절한 사랑의 여정을 그린 것이다.
사실 이 영화는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변형이다.
삼촌의 신부가 될 아일랜드의 공주 이졸데를 데리러 온
기사 트리스탄이,
바다를 건너가는 거대한 선박 안에서 이졸데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고국에 돌아가서도 삼촌 몰래 밀회를 계속하다가 마침내 둘 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다는 전설이다.
이런 비극이 사랑에 빠진 두 사람에게는 오히려 환희가 된다는 사랑의 역설이 감동적인 걸작이다.
이 영화 An affair to remember 도 비슷한 줄거리와 주제를 갖고 있다.
대서양을 건너가는 호화유람선에 케리 그란트가 탄다. 재능 있는 화가였지만, 잘 생긴 외모 덕에
여자가 끊이지 않는 플레이보이였는데, 대부호의 딸과 약혼해서 혼자 배에 오른 것이다.
하지만, 플레이보이였던 것은, 그동안 자기 여자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데보라 카도 서로 모른 체 함께
배에 오르는데, 그녀는 약혼자가 잠시 떨어져 유람선을 탄 것이었다.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지는 장면이나,
둘이 푸른 바닷빛이 몰려드는 갑판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장면같은 것은 참 로맨틱하다.
케리 그란트는 약혼이니 플레이보이생활이니 화려한 상류층 생활이니 다 버린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자기 진심을 다 열어 보인다. 데보라 카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조용히 시작했지만,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른다.
대서양을 건너는 유람선 안의 공간이 참 로맨틱하고 화려하다.
갑판 위 바다의 풍경이나 달빛이 파랗게 쏟아지는 은은한 공간 속을 한없이 거니는 연인들의 모습이 참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백미는, 케리 그란트가 할머니가 사시는 이탈리아 섬에 내려서,
할머니가 사시는 성에 들어가는 장면이다.
지금까지도 아름답고 로맨틱한데, 꽃이 화사한 오래된 성으로 걸어가는 연인들의 모습은
정말 로맨틱해서 '아, 지금 흔히 보기 어려운 멜로드라마의 절정을 보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현명한 할머니는 데보라 카의 내면을 꿰뚫어보고 그녀를 좋아한다. 그리고, 손자를 그녀에게 부탁한다.
케리 그란트, 할머니, 데보라 카 세사람이 만들어내는 정감 어린 장면은 정말 감동적이다.
뉴욕에 도착하자, 케리 그란트와 데보라 카는 서로 결심을 한다. 각자 약혼자와 헤어지고 결혼하자는 것이다.
서로 정리를 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할 테니, 어느날 어느시에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에서 만나자는 약속과 함께.
케리 그란트는 약혼자와 파혼하고, 가난한 페인트공으로 일하면서 화가의 길을 간다. 그리고, 화가로서 위치를 확보한다. 그는 약속대로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으로 간다. 하지만, 데보라 카가 오지 않는다. 아뿔싸! 그녀는 저 아래에서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만 보며 서둘러 걸어오다가 자동차에 치였던 것이다. 그리고,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장애인이 된다.
케리 그란트는 데보라 카를 애타게 찾는다. 하지만, 연락할 방법이 없다.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데보라 카로부터 연락도 없다. 하지만, 그의 마음으로부터 데보라 카는 떠나지 않는다. 그는 때때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으로 가서 서있다가 온다.
데보라 카는 장애인이 되어 제대로 거동도 힘들다. 이런 몸으로 나타나봤자, 케리 그란트에게 짐만 될 뿐이다.
그의 전 약혼자가 변함없이 그녀를 돌봐준다. 하지만, 데보라 카는 감사해 하면서도 그와 선을 긋는다.
그녀도 케리 그란트에 대한 사랑을 놓지 않는다. 다만, 지금은 사라져주는 것이 그를 위한 것이라 생각할 뿐이다.
뉴욕의 풍경이 정말 아름답다. 뉴욕을 가장 아름답게 그린 영화들 중 하나다.
데보라 카는 길을 걷다가 어느 갤러리 쇼윈도우에서 케리 그란트가 그린 그림을 발견한다.
자기를 그린 그림이다. 그녀는 갤러리 안으로 들어가 그림을 팔아달라고 한다. 하지만, 그림값이 충분히 없다.
갤러리에서는 데보라 카가 하도 딱해서 케리 그란트에게 전화를 걸어 어떻게 할까 묻는다.
케리 그란트는 그것이 데보라 카인 줄도 모르고, 그림을 주라고 말한다.
이 두 연인의 평행선을 긋는 운명은 어떻게 될까?
원래 멜로드라마는 이런 전개가 정석이다. 정석대로 나가면서도 엄청 훌륭하게 만들면 감동을 주는 걸작이 될 수 있다. "어? 이거 클리셰인데?"하는 생각같은 것은 안 든다. 주연배우들의 연기가 너무 훌륭하고,
아름다운 풍광과 로맨틱한 장면들이 연이어 나오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케리 그란트와 데보라 카가 다시 만나는 장면은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다.
유튜브에 올라와 있으니, 이것만 보아도 감동을 준다.
케리 그란트는 데보라 카의 마음을 어떻게든 돌리려 하고,
데보라 카는 어떻게든 자기 장애를 숨기고 그를 돌려보내려 한다.
케리 그란트는 데보라 카를 보고 그녀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음을 눈치챈다.
그런데, 이상하다. 데보라 카는 자꾸 자기를 밀어낸다. 케리 그란트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자꾸 말을 억지로 이어나간다. 그러면서, 데보라 카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한다.
데보라 카는 그를 부드럽게 밀어낸다. 하지만, 눈빛이 그렇게 애절한데, 누구라도 그녀의 속마음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케리 그란트는 그것을 보고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하지만......
케리 그란트가 마침내 포기하고 문을 나서려다가 주절주절 말을 이어나가는데,
"당신 그 자세 그 표정을 내가 그림으로 그렸지. 갤러리에 걸었는데, 어느 여자가 사고 싶다고 했어.
그냥 주라고 했지. 그 그림에 돈을 받고 싶지 않았어.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그 여자가......"
그의 표정이 뭔가 떠오른다는 듯 바뀐다. "그러니까 그 여자는......" 중얼거리면서 그는 방문을 하나 하나 열며
다닌다. 그리고, 어느 방문을 열자 그 벽에 자기 그림이 걸려 있다. 그는 넋을 놓고 그림을 바라보다가 그만 눈을 감는다.
이 장면은 멜로드라마의 상징처럼 언급될 정도로 유명하다. 압도적인 감동을 준다.
뒤이어 데보라 카가 눈물 글썽거리는 눈으로 울음을 참으며 "Darling, don't look at me like that......"하는 연기는
굉장한 명연이다. 케리 그란트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왜, 진작 나한테 이야기하지 않았어?"하고 애타게 말하는
장면도.
볼 때마다 감동을 주는 명장면이다. 이것을 안 보고, 어디 가서 멜로드라마 좋아한다는 소리하면 안된다. 케리 그란트나 데보라 카나 둘 모두 대배우임을 이 장면 하나로 입증한다.
이미 만들어진 멜로드라마를 클리셰가 될 정도인 정석대로 만들었는데,
너무 잘 만들고 너무 잘 연기해내면 이렇게 걸작이 된다.
** 중간에 데보라 카가 기도하듯이 두 손을 모으고 있는 장면이 있는데, 케리 그란트가 나중에 그린 그림이 이 장면이다. 얼마나 기억에 남았으면 시간이 그렇게 흘렀는데도, 또렷이 기억하고 그 자세 그대로 그림을 그렸을까? 이 그림에 돈을 받고 싶지 않았다는 그의 고백은 진짜 거짓말이 아니다. **
진정한 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