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문의 독수리
![1.jpg](http://img.extmovie.com/files/attach/images/173/547/748/008/e4bbb8ea1157215acc8c6d917a5ee95a.jpg)
[귀문의 독수리]는 대만 무협영화의 대부 곽남굉 선생이 1971년에 발표한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어르신들 세대에게는 꽤 중요한 작품이었던 모양입니다. 국내에 무협영화의 붐을 처음 일으켰던 호금전과 장철의 작품들은 무협영화 치고는, 사실적인 성향의 영화들이었잖아요. 거기 비해 금강불괴니 하는 본격적으로 황당무계한 무협 환타지의 세계를 알려준 영화가 [귀문의 독수리]였다고 하네요.
당시의 어른들이야 이런 황당무계한 이야기에 코웃음을 쳤겠지만, 당시의 어린애들(그러니까 지금의 어르신들 세대)은 이 영화를 통해서 신세계를 접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근데, 과거 한국 문화계의 고질적인 병폐가 이런 한 세대의 체험이 후세에 전달되지 않고 그대로 단절되어버린다는 거였죠. 전 이 영화를 80년대에 비디오로 봤었는데, 제가 본 비디오의 제목은 [마의 공수도]였습니다. 이게, 영어 제목인 [The Evil Karate]를 직역한 거였어요. 그니까 80년대에 비디오를 출시한 업자들은 이 영화가 한시대를 풍미했던 추억의 무협영화 [귀문의 독수리]라는 사실을 몰랐던 거죠.
염태극이라는 괴인이 이끄는 귀문관이라고 하는 깡패조직이 있습니다. 여기 멤버들도 하나같이 괴인 투성이고 나쁜짓이라면 가리지 않고 하죠.
염태극은 '태극공수도'라고 하는 절정무공을 탐내고 있었고, 낙천굉이라고 하는 사람이 태극공수도 비급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끝없이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낙천굉 뿐만 아니라, 어쩌다가 재수없이 낙천굉과 잠시라도 엮였던 사람들은 전부 귀문관 일당들한테 걸려 진짜 귀문관을 넘어가는 신세가 됩니다.
주인공인 구진진도 역시 어렸을때 괜히 선심을 베풀어서 낙천굉을 구해줬다가 덤탱이 쓰고 일가족이 몰살당합니다. (아마도 이 영화의 주제는 '길가다 죽어가는 사람을 보더라도 모른척하고 그냥 가자'인 것 같아요. 선행을 베푼 사람들은 모조리 죽어나가니...) 자기때문에 엄하게 죽은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도 낙천굉은 진진에게만 유달리 미안함을 느낍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별다른 감정이 없는 것 같아요.
진진의 온가족이 몰살당하는 중에 간신히 진진만 데리고 탈출한 낙천굉은 그 뒤로 장장 15년을 도망다닙니다.
이 영화의 특징은 악당이 엄청 강하다는 데 있습니다. 낙천굉도 설정상으로는 제법 이름이 알려진 대협이지만 귀문관의 괴인들 앞에서는 그저 무기력합니다. 영화의 대부분의 상영시간은 진진과 낙천굉이 도망다니다 붙잡힐 위기의 순간이 오면 지나가던 은거고수가 나타나 간신히 살아나고, 한동안 숨어살다 또 붙잡히게 될뻔하면 또다른 고수가 나타나 구해주고 하는 패턴이 반복됩니다.
거의 상영시간의 2/3 정도가 지날때까지 주인공은 계속해서 도망만 다니고 주인공과 얽힌 사람들이 계속 죽어나가는 암울한 전개가 계속됩니다. 그 와중에 진진은 성장해가고 태극공수도를 비롯해 이런저런 무공들을 익히게 되고 마지막 30분 정도 남겨놓은 무렵이 되어서야 주인공의 반격이 시작됩니다.
'태극공수도'라는 이름은 얼핏 들으면 엉뚱한 딴나라 무술같기도 한데, 영어 제목에 'karate'가 붙은 걸 보면 노리고 붙인 이름일 수도 있겠죠. 어쨌거나 끝 글자가 달라서 공수刀입니다. 이름 그대로 맨손을 휘두루면 칼처럼 뭐든 썰려나가버리는 가공할 무술입니다. 그런데 이런 무술을 설득력있게 진지하게 묘사하기는 어렵죠. 꼬맹이 시절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도 공수도의 묘사를 보고는 피식거렸으니까요. 무술 묘사 자체보다는 주인공이 공수도를 익혀서 엄청 강해졌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보면 될 것 같아요.
어쨌거나 킹왕짱 강한 무술입니다. 그동안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던 주인공측이 이제부터 귀문관 고수들을 사정없이 쓸어버립니다. 그동안 암울한 전개때문에 쌓였던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상쾌한 진행입니다^^
그렇다고 주인공이 일방적으로 악당을 두들겨패기만 하다 끝내면 서운하겠죠. 끝판왕인 염태극은 공수도조차 통하지 않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으니 바로 금강불괴의 몸을 가지고 있다는 거였어요.
[귀문의 독수리]는 무척 단순하고 뻔하(고 어설프)지만 효율적인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영화입니다.
주인공과 악당이 쫓고 도망간다는 설정으로 지루하지 않도록 계속해서 배경을 바꿔가며 싸움장면을 배치할 수 있고 중간중간 쉬어가는 포인트를 만들수도 있습니다.
귀문관의 고수들도 괴인 투성이인데 거기에 계속해서 강호의 기인들과 괴상한 무공들이 나와서 끊임없이 흥미를 유발하고 있습니다.
지금 보자면 다 그리 대단할 건 없는 것들이지만 70년대 초에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본 사람들-그중에서도 본격적인 무협의 세계에 아직 발을 담그기 전인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강렬한 인상을 남겼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드네요.
뭐 지금 보기에도 재미는 있습니다.(낡아빠진 요소들을 보고 낄낄대는 재미도 포함해서요^^)
장르팬이 아닌 사람에게는 B급 괴작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무협이라는 장르 내에서는 고전명작소리를 듣기에 부족함이 없는 영화라고 생각해요.
-크레딧에는 곽남굉은 제작자로, 감독은 강빙함이라는 사람이 한 걸로 되어있는데... 둘이 동일인이라고...
제가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1학년때 아버님과 단성사에서 본 영화군요. 정말 그당시엔 획기적인 SF급 무술영화로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아버님과 영화보고 물만두 먹은 기억에 잠시 옛날생각이 문득 듭니다.
갑자기 아버님 얼굴이 떠오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