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어떻게 살 것인가? 스포일러 있음.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간의 자기 애니메이션에 대해,
80년대 일본버블시대 나왔다가 사라진 스타일이라고 했다.
수많은 애니메이터들을 고용해서 아찔할 정도의 수작업으로
엄청난 퀄리티의 애니메이션을 뽑아내는 작업을 말하는 것이리라.
1980년대 버블상황에서 모든것이 사치스럽고 대규모이고 화려했던
그 사회상황의 한 양상이 자기의 대작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이다.
그의 말이 옳은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는 과거의 대작들이 지금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이라 생각하는 듯하다.
그는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고용했던 애니메이터들을 해고함으로써
이 확신을 실현시켰다.
더 이상, 애니메이터들을 갈아넣어 엄청난 퀄리티의 이미지들을 뽑아내는
아찔한 수작업 예술은 없다.
지금 나온 애니메이션 "그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현재 일본의 상태에 대한 대답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선, 이 애니메이션은, 우리가 아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현란하고 화려한 이미지들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초벌로 쓱쓱 물감을 칠해놓았다고 해도 좋을 화면들이다.
우리가 보통 아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복잡한 그림들에서 50% 정도는 빼놓았다고 보면 된다.
빈 공간도 너무 많고, 사용된 색채도 제한적이다.
이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화려하고 상상력 및 통찰력 넘치는 이미지로 압도되고 감동될 일은 없다.
나는 이 애니메이션이 그의 과도기작품이 아닌가 생각했다.
과거의 대작 에니메이션으로부터, 오늘날 일본을 담은 새로운 스타일로 옮아가는 과도기에 있는
작품이 이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이 애니메이션의 (그림으로서의) 완성도는 의문이다.
그리고 이야기는 좀 더 복잡해지고 우울해지고 애매해졌다.
그간,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들은 그 주제면에서 선명했고 직선적이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나
천공의 성 나우시카나 다 그랬다. 그 애니메이션들에서, 주인공은 누구고 주제는 무엇인지 아주 명확했다.
자기확신에서 오는 감동의 세계. 직선적이고 투명한 세계관의 쾌감. 이런것들이 과거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의 특징이었다.
하지만 이 애니메이션은 다르다. 주제가 속에 깊이 숨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아니, 우리가 이것이 주제라고 꼭 집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그리고, 우울한 페시미즘이 그 속에 있다. 어머니를 병원화재사고로 잃은 주인공은, 우울하고 폭력적이 된다.
그간 미야자키 하야오가 주인공의 우울과 좌절을 그린 방식과는 정반대다. 건강함과 의지, 낙천주의가
이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에게는 없다.
무언가 입에 집어넣는 것밖에 모르는 잔인한 새들이 애니메이션 내내 나온다.
다른 애니메이션이었더라면, 이 새들은 악역이다.
하지만, 주인공이 죽어가는 새 한마리와 이야기하자, 새에 대한 인상은 확 바뀐다.
하늘을 향해 비상하여 훨훨 날아가던 새는 고작 어느 섬에 와서 더 못 간다.
그 섬은, 바다는 저주받아 물고기가 살지 않고, 다른 먹을 것이 없다.
늘 배고파 무언가 입에 넣을 것만 찾아 헤멘다. 먹을 것이라고는,
남들이 귀여워 못견디는 정령이다. 그런데, 정령을 잡아먹는다고 혐오의 대상이 되고,
미움을 받아 마법의 불로 지져져서 화상으로 죽어간다.
주인공은, 자기가 그토록 싫어하던 새를 위해 무덤을 판다.
이전에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에서는 나오지 않던 세계다. 그의 애니메이션은 우울해지고 복잡해졌다.
이것이 미야자키 하야오가 묻는 질문, "그대,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아마 그는, 이 질문에 대해 명확한 답이 없다고 말하고 싶은 듯하다.
주인공은, 말하는 해오라기를 따라, 증외조부가 세웠다는 이상한 성으로 들어간다.
주인공은 "그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생각해보기보다
그 질문을 살아갈 기회를 얻게 된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말하고 싶은 것도 이것 아니었을까?
그 질문에 명확한 답을 주는 것보다, 그 질문을 살아라 하고 말하고 싶은 것 아니었을까?
어머니가 화재로 돌아가신 후, 어머니를 구하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우울한 주인공은, 어머니가 자기에게 생전 남겼다는 메세지를 발견한다.
그 메세지는, "그대, 어떻게 살 것인가?'였다.
주인공이 들어간 세계는, 그간 그의 애니메이션들보다 더 복잡하다.
아예, 주인공이 들어간 성 자체가 모호하다.
영화 내내 애니메이션 등장인물들이 이 성에 대해 다른 이야기들을 한다.
괴짜에다가 천재였던 외증조부가 세운 성 (성을 완성하기도 전에 사고로 인부들이 죽고, 외증조부는 성안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저주받은 장소,
외계로부터 내려 온 건축물 등.
주인공은 그 성안에 들어와서,
성이 신비한 장소이며, 수많은 영적 생령, 인간화된 새들, 신비한 힘을 가진 인간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생태계임을 발견한다.
지금까지였다면, 미야자키 하야오는 아주 화려한 이미지로,
이 생태계를 엄청 대규모 스펙타클로 그려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애니메이션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리다가 만 초벌그림처럼, 그려져 있다.
환상적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기대하지 말라.
물고기 하나 보이지 않는 투명한 바다, 초록 페인트로 쓱쓱 칠한 것같은
구름 한 점 없는 신경질적인 하늘, 귀엽다기보다 그냥 만화적인 못 생긴 새들 등이 있다.
마치 톱니바퀴로 돌아가는 자동인형인 것처럼, "먹자" "먹자"하고 되뇌면서
칼을 들고 주인공을 잡아먹으려 하는 새들이 한 가득 있다. 호러영화의 악역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무섭다. 악몽 내지는 신경쇠약에 걸린 사람이 보는 세계같을 정도다.
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바위와 대화하는 성의 주인, 칼과 도마를 가지고 다니며
보이는 것은 다 해체하여 입안에 넣으려는 새들 (개개인의 개성이 없는, 하일 히틀러를 외치는 나찌당원들처럼 보인다),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성스러운 분만실, 자꾸 깨어나려고 하는 죽은 자들,
달빛을 받으면 부풀어오르며 하늘로 날아올라가는 생령들, 이 세계에서 물고기를 죽일 수 있는
힘을 가진 오직 한 사람, 복도에 수많은 문들이 있고 이 문을 열면 각각 다른 공간과 시간으로 이어져 있는 복도 -
이것들이 다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그 세계에서는, 아직 처녀인 어머니가 불꽃을 피워올리는 신비한 힘을 가진 사람이었다.
마지막에, 주인공은 어머니와 헤어져 각기 다른 문들로 들어가게 된다.
"이 문으로 나가면, 나중에 병원화재로 불 타 죽을 거예요"하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난 불이 무섭지 않아"하고 명랑하게 대답한다.
이 세계에서는 불과 한 몸이니까. 그 말을 들은 주인공은, 지금까지 어머니에 대해 갖고 있던
죄의식과 슬픔같은 것을 극복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 애니메이션 주인공들은,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속같은 모호하고 복잡한 상징들의 세계에 있다.
그가 만드는 애니메이션들이 앞으로도 이런 것일까? 생애의 마지막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려 한다.
사실 "바람이 분다" 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런 징조를 보이기는 했다.
나는, 이 애니메이션이 나온 것이 큰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의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들과는 다른 의미에서 걸작이고 장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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