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결투 (1949) 스포 있음
쿠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젊은 도시로 미후네를 주연으로 해서 만든 휴머니즘 영화다. 조용한 대결이라는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무슨 등장인물들끼리 결투를 한다는 뜻이 아니다.
휴머니스트 젊은 의사 도시로 미후네가 전후 일본 악의적인 사회, 비인간적인 혹은 부조리한 관습,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이기심같은 것과 대결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조용한 대결이다. 도시로 미후네는 정치적 혹은
사회적으로 이런 대결을 벌이지 않는다. 개인적인 철학과 이타적인 행동으로 조용히 이런 악과 대결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도시로 미후네가 만날 환자가 평생 몇명이나 되겠는가? 평생 그가 개인적으로
대결해나갈 악이라는 것이 크면 얼마나 크겠는가? 바다 속의 물 한방울같을 것이다.
휴머니즘이라는 것이 개인적인 수준에 머문다면 그것이 얼마나 효과적일 지에 대해, 나는 회의적인 편이다.
쿠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일본 군국주의와 전쟁 그리고 패전으로 이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추상적인 휴머니즘 부족으로 진단하는 듯하다. 젊은 의사 도시로 미후네는 의무장교로 전쟁터에 나갔다가
수술 중 손을 베인다. 그리고 매독에 걸리게 된다.
그는 약혼한 처녀가 있었는데, 자기가 더러운 병 매독에 걸렸다는 사실을 차마 알리지 못하고 파혼한다.
울고 불고 매달리는 처녀를 뿌리치며, 도시로 미후네는 가슴이 찢어진다. 역시 의사인 아버지 또한 아들을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고,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들도 멸시의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도시로 미후네는 이 모든 압력을 이겨내며 강한 의지력으로 계속 의술을 펼친다.
도시로 미후네의 병이 자기 잘못이 아니라는 사실이 주변인에게 마침내 알려진다.
병원 사람들은 도시로 미후네가 그동안 오해를 받으면서도 이를 변명하지 않고,
부정직하고 방종하게 살던 인간쓰레기들을 치유하기 위해 노력해 온 사실에 감동한다.
병원 사람들은 도시로 미후네를 중심으로 뭉쳐서 참된 의술을 펴며 휴머니즘을 전파하는 곳이 된다.
쿠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이 영화는 지나치게 교훈적이다. 도시로 미후네는 생생한 어떤 캐릭터라기보다,
쿠로자와 아키라 감독이 내세우는 휴머니즘의 상징같은 존재다.
도시로 미후네는 전쟁터에서 수술을 하다가 남의 매독을 옮는다. 흠 하나 없던 순결한 삶에 매독이라는
더러운 오점을 얻는다. 이것은 일본이 일으킨 전쟁 때문에 가해자라는 오명을 쓴 많은 일본인들을 상징하는 것 같다.
도시로 미후네에게 매독을 옮긴 일본군인은 방종하고 타락한 사람이다. 어쩌면 군국주의에 물들었던
제국주의자들을 상징하는 것일까? 그런데 이 제국주의자들은 나라를 절단내고도 반성할 줄 모른다.
도시로 미후네에게 매독을 옮긴 일본군인은,
매독을 여기저기 퍼뜨리고 다니면서, 아내를 속여 임신까지 시킨다. 아기는 기형아가 되어 나자 마자 죽고만다.
쿠로자와 아키라가 일본 군국주의 세력에 대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욕일 것이다.
이런 전후 상황에 대해 세종류 사람들이 있다. 도시로 미후네처럼 휴머니즘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악한 사회를
개선하려는 사람, 도시로 미후네 병원 간호사처럼 냉소적이고 비관적으로 사회를 바라보고 자기 이익을 위해서만
움직이려는 사람, 그리고 매독에 걸린 일본군인처럼 남을 속이고 오도하며 자기는 물론 자기 가족까지
매독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사람. 도시로 미후네의 휴머니즘은 이들을 감동시켜 휴머니즘 전파에 나아가게 한다.
사실 이런 쿠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단순한 현실 인식이 내게 와닿지 않는다.
매독에 걸린 사실을 터놓고 알리지 못하고 혼자 끙끙대며 개인적인 휴머니즘으로 이를 돌파하려 하는 도시로 미후네의 행동방식도 와닿지 않고.
도시로 미후네만을 바라보며 오랜세월 그의 집을 지켜왔던 그의 약혼녀는,
최소한 왜 자기가 파혼당해야 하는지 알 권리가 있지 않았을까? 도시로 미후네의의 순결성이 흠결 당했다는 그 이유 때문에,
영문도 모르고 파혼당해 집에서 쫓겨나야 했던 약혼녀 입장에서는, 도시로 미후네의 휴머니즘이라는 것이
그의 이기주의의 또다른 이름이었을 수도 있다.
사실 그의 비슷한 명작 붉은 수염도 그렇고, 체제 순응적 (혹은 체제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것과 휴머니즘이
잘 결합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좀 더 정치지향적이고 부조리한 사회체계를 노려보는 싸움닭같은 감독들이
등장하면서, 쿠로자와 아키라 감독이 설 자리는 점점 사라지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확실히 약혼녀 입장에선 말도 안 되는 처사긴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