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pit of dr.m (1959) 단편소설급의 정교한 구성을 가진 멕시코 호러영화. 스포일러 있음.
마구 무섭지는 않은 영화다. 하지만 영화가 아주 정교하고 흥미진진하다.
훌륭한 각본을 영화가 제대로 못 살린다. 리메이크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 영화였다.
마잘리라는 정신과의사는 친구 알다마와 약속을 한다. 먼저 죽는 사람이 살아남은 사람을 저승으로 데려가서
다시 살아있는 채로 이승에 데려다놓기로 말이다.
그런데, 알다마가 먼저 죽는다. 마잘리는 죽어가는 알다마에게 욱박지른다. 날 저승으로 데려갔다가, 살아있는 채로 이승에 되돌려놓으라고. 안 그러면 네 죽은 영혼은 영원히 저주받으리라 소리친다.
알다마는 죽어가면서도 편히 죽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호흡이 상당하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강렬한 장면이 나온다.
각본도 연출도 아주 좋다.
대사 몇마디로, 그들 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앞으로 무슨일이 벌어질 지 관객들에게 명확히 전달한다.
마잘리는 친구가 반드시 약속을 지키리라 믿는다.
알다마가 땅속에 묻히는 순간, 바잘리는 영매를 통해 알다마와 접촉을 시도한다.
알다마는 영매를 통해 나타나, 마잘리에게 약속을 지키겠다고 한다.
정확히 3달 뒤 밤11시에 마잘리를 저승에 데려갔다가 이승에 살아있는 채 돌려놓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려면 엄청난 댓가를 치러야 하는데, 약속을 파기하고 싶으면 그렇게 이야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
웬만하면 하지 마라 하는 충고다. 하지만, 마질리는 고집을 부린다.
마잘리는 무슨 일이 있겠냐 하는 생각이다. 산 채로 다시 이승으로 돌려다놓기로 하지 않았나?
그렇다. 마잘리는 파우스트박사의 변형이다. 이 영화는 우연이 아주 조금 방향을 틀면서, 그 조그만 우연이 겹치고 겹쳐 마잘리의 파멸로 이어지는 내용이다. 그 우연을 조종하는 것이 알다마이다.
어느 도시에서 여자댄서가 의대생을 만난다.
정신병환자가 음악을 들으면 조용해지다가, 음악이 멈추면 난폭해진다.
알다바는 이혼을 했는데, 그에게는 오랫동안 찾아보지 않은 딸이 있었다.
알다바는 딸에게 유산을 준다.
정신병환자가 발작을 하면서, 남자간호사 얼굴에 염산을 붓는다.
생각지도 못한 전혀 엉뚱한 곳에서, 마잘리의 종이 자르는 칼이 발견된다.
이 서로 다른 사건들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각각은 아주 조그만 우연들이다.
뭐, 일상에서 흔히 일어나는 별것 아닌 사건들이다.
하지만 이것들이 겹치고 겹쳐서 마잘리의 파멸을 가져온다.
이 영화는 우연들이 겹쳐 마잘리의 파멸을 가져오는 끔찍한 과정을 묘사한다.
자잘한 정교한 톱니바퀴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듯한 정교한 영화가 이 영화다.
이 우연들을 아주 조금씩 틀어서, 그 조금씩 틀어진 우연들이 마잘리의 죽음을 향해 나아가도록 만드는 것이
알다마의 유령이다, 가끔 나타나 한대 툭 치듯이 우연을 만든다. 그 우연 각각은 별것 아니다.
하지만 그 우연이 겹쳐나가면서, 사건은 우리가 상상도 못했던 방향으로 걷잡을 수 없이 진행한다.
인생이란 이런 것 같다. 내가 볼 수조차 없는 작은 사건들 - 그것들이 겹치고 겹쳐 엄청난 파멸을 가져오는데,
대비고 조심이고 뭐고 불가능하다. 삶 앞에 겸허해지자. 마잘리는 이 교훈을 몸소 보여주는 사람이다.
위의 모든 우연들이 겹쳐서, 마잘리를 살인범의 누명을 쓰도록 만든다.
마잘리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알다마가 자길 살려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살려서 이승에 돌려보내놓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알다마는 마잘리에게 구원을 보내지 않고, 그는 교수형을 당한다.
마잘리는 공포에 떨다가 고통에 시달리며 죽는다.
알다마는 약속을 지켰다.
마잘리는 곧 되살아난다.
하지만, 그의 육체가 아니라 어느 살인자의 육체 속에 들어가 되살아난다.
얼굴이 괴물처럼 변형된 추악한 용모의 소유자다. 그는 괴물의 몸으로 자기 병원에 돌아온다.
마잘리는 자기가 겪은 죽음 너머의 세계에 대해 친구에게 이야기해준다.
하지만 "내가 겪은 것은 말로 표현하기 불가능한 거야. 나는 또렷이 다 기억하고 있지. 시간이 지나면,
내가 어떻게 말로 이 경험을 표현할 지 생각해내게 될 거야. 조금만 기다려 봐."
이런 식이니, 보는 관객들만 답답해 죽는다. 삶 너머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관객들도 좀 들을 수 없을까?
마잘리가 너무 장광설을 멋지게 풀어내서, 보는 내가 알고 싶어 답답할 정도다.
마잘리는 고매한 의사인 자기 영혼만 있다면, 육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으리라 믿는다.
지금까지 교양있고 인격자에다가 존경받는 의사로 살아왔으니까.
하지만 막상 괴물의 몸이 되고 보니, 사람들이 자기를 경원시한다.
마잘리는 조금씩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진다.
그런데, 알다마는 또 개입한다.
마잘리에게 몸을 준 살인자의 과거 살인증거가 우연히 밝혀지게 한 것이다.
죽었다가 간신히 살아왔더니, 이번에는 새 몸이 살인죄로 교수형을 당하게 생겼다.
마잘리는 자기 탐욕의 댓가를 치른다.
마잘리는 불에 타서 끔찍하게 죽는다.
유감스럽게도, 각본이 걸작급인만큼 영화가 걸작이 아니다.
알다마가 불쑥불쑥 나타나서 조금씩 우연의 방향을 트는 장면은 소름끼친다.
하지만, 우리가 오늘날 호러영화에서 기대하는 끔찍한 공포는 없다.
오늘날의 자극적이고 잔인하고 공포스러운 호러영화의 기준에서 본다면,
이 영화를 호러영화라고 불러야 할 지도 애매하다.
대신 아주 훌륭하고 흥미진진한 드라마가 있다. 배우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일급배우들이다.
리메이크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게 된 영화다.
각본이 가진 훌륭한 포텐셜을 100% 살려서, 화끈한 공포를 주는 걸작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추천인 4
댓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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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대로 리메이크 나옴 좋겠어요
내기 한번 잘못 했다가 두번 죽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호러라기보단 스릴러에 가깝긴 하네요
알다마 "내가 언제 원래 몸에 돌려놓는다고 했냐?"
내기도 계약에 못지않게 세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교훈을(...)
환상특급 같은 앤솔로지 드라마의 한편으로 찍으면 좀더 그럴듯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