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晩秋)의 기억
이만희란 감독이 지금은 다소 잊혀진 듯하다.
하지만 황소 그림을 그린 화가 이중섭이 천재화가의 전형이 되었듯,
천재감독하면 이만희가 자동적으로 떠오르던 시절이 있었다.
이만희 영화를 보면, 그 이유를 알게 된다. 클루조감독의 디아볼릭을 한국식으로 번안한 마의 계단이라는
영화를 보면, 잘 모방했다 정도를 넘어서서 원작의 섬뜩한 분위기를 "창출해낸다." 오히려 디아볼릭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문정숙 주연의 귀로라는 영화를 보면, 나루세 미키오의 세련되고 섬세한 멜로드라마를
나루세 미키오 그 자신보다 더 섬세하게 연출해낸다.
아래 휴일이나 귀로에 나오는 세련되고 황량한 장면들을 보라. 1960년대 열악하던 우리나라 한국영화계에서
이런 화면을 뽑아내고 거기에다가 능숙한 스토리텔링, 군더더기도 모자란 부분도 없는 편집 -
영화에서 배어나오는 세련된 예술성 등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가 하면, 블록버스터 액션영화도 잘 만들었다.
물레방아같은 문예영화의 걸작도 만들었다.
검은 머리같은 느와르물도 만들었다.
당시 영화제작자들 사이에서는 이만희의 인기가 아주 높았다. 당연히 그럴 것이, 예산을 적게 주어도,
해외 영화를 모방해 만들라면 원작에 맞먹는 혹은 능가하는 작품을 만들어내니까 말이다.
나도 해외영화를 볼 기회가 적었을 때에는, 이만희감독이 여러 쟝르에서 걸작을 남긴 불세출의 천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후 디아볼릭도 보고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도 보면서,
이만희감독이 그 창의성을 다른 데서 가져왔음을 알고 맥이 빠졌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이만희감독에 대해, "예산이 제약되고 해외의 명작들을 볼 기회가 없었던 열악한 우리나라 영화계에서
의미가 있었던 천재"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무엇을 시키든 평균 이상은 했던" 감독이었다는 것이다.
이만희감독이 충분한 예산을 얻고 자기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게 했더라면 어떤 작품들을 만들었을까?
이것은 누구도 알 수 없는 질문이다. 그 자신 거장이었던 김수용감독이 헐리우드를 방문했을 때, 프렌치 커넥션의 자동차 추격씬이 촬영되고 있었던 중이었다. 헐리우드 관계자가 대단하지 않냐고 자랑하듯 묻자,
김수용감독은 '우리나라에는 이만희라는 감독이 있단 말이다. 이만희감독에게 이만한 지원을 해줘 봐라. 그는 이것보다 훨씬 더 좋은 영화를 뽑아낼 거다."하고 생각했다 한다. 김수용감독은 그 자신 거장이었고 아주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김수용감독이 이런 생각을 했다면 분명 그만한 근거가 있을 것이다. 그는 거장들 중에서도 거장이었다.
이만희감독을 따라다니는 배우들 코메디언들이 군단을 이루었다. 이만희는 존경을 받는 거장감독으로 한 시대를 군림했다. 그는 자신의 이런 성공이 오래 지속될 줄 알았다. 그래서, 자기가 버는 막대한 돈을 파티 등으로 다 흥청망청 써 버렸다. 결국 죽을 때에는 "너희한테 물려줄 것이 없구나"하고 자식들에게 탄식할 정도에 이르렀다. 이만희감독의 딸이 배우 이혜영이다.
이만희감독의 가장 걸작은 무엇인가? 대부분 사람들은 "만추"라고 대답했다. 김태용감독이 리메이크한 만추 바로 그 영화다. 내용도 여죄수와 어느 남자의 짧은 사랑이야기 그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영화는 필름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보지도 못하는 이 영화에 대해 "우리나라 영화사 가장 완벽한 작품"이라고 말했다.
이 영화가 사라진 것이 얼마나 안타까왔으면, 글로 이러이러한 장면이 있었다 하는 식으로
영화 전체를 구술로 복원한 책까지 나왔을까?
(신상옥감독이 북한을 탈출한 후, 김정일의 영화 컬렉션에서 만추를 보았다고 증언했다. 최은희도 만추를 보았다고 증언했다.)
이번에 발견된 이만희감독의 "휴일"이라는 영화는, 나오자 마자 걸작으로 등극했다.
만추도, 발견된다면, 한국영화사 완벽한 영화까지는 아니겠지만, 걸작으로 금방 등극할 것이다.
이만희감독이 죽을 무렵, 혼신을 다해 찍은 유작이 "삼포 가는 길"이다. 신성일에게 주인공 제의가 갔는데,
하필 그가 바쁜 바람에, 김진규가 주인공역할을 했다고 한다. 대배우 김진규가 주연역할을 했던 마지막 걸작영화다.
삼포 가는 길은 거장의 마지막 숨과 노스탤지어가 물씬 풍기는 작품이다. 하지만, 걸작이 되기에는
너무 감정이 넘치고 신파적인 감이 든다. 전성기를 이미 지나 온 감독의 백조의 노래다.
굉장한 천재로 존경 받으며, 거장들의 거장으로 인정 받았던 이만희감독이
지금 감독들과 비교하여 어떤 위치를 차지할 수 있을까? 지금도 거장들의 거장이라는 지위가 굳건할까?
일단 그의 영화는 강렬하다. 마의 계단같은 스릴러에서는 공포와 긴장 서스펜스가 강렬하다. 김진규의 열연에 힘입어,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의사의 성공에의 집념 그리고 그것이 범죄로 이어지는 과정을 아주 설득력 있게 묘사한다.
히치콕감독의 사이코에 나오는 나선계단을 우리 현실에서 아주 그럴 듯하게 이용해서 멋진 장면을 만들어낸다.
귀로나 휴일같은 멜로드라마에서는, 세련된 멜랑콜리와 러브스토리가 영화를 강력한 자장처럼 감싼다.
삼포 가는 길에서는, 도시화로 인해 고향을 잃은 떠돌이들의 비극을 아주 생생하게 그려낸다.
그의 영화는 늘 뜨겁다. 늘 사람들의 이야기를 아주 흥미진진하게, 공감을 이끌어내는 방식으로, 강력한 감정적 자장을 가지고 그려낸다. 나는 이것이 그의 진정한 재능이라고 생각한다.
그것도 근친상간이니 아동살해니 하는 자극적인 소재가 아니라, 여자친구가 임신해서 고뇌하는 백수 청년,
신분의 사닥다리를 올라가고 싶어하는 젊은 의사, 바람난 아내 등 평범한 소재를 가지고
이렇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이만희감독의 영화를 보면, "이거 잘 모방했네"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주인공의 내면과 세계에 빠져들면서, 이만희감독의 세련된 영화에 감탄하게 된다.
단순히 "시키면 잘 만들었던 감독"이라면, 이런 강렬한 영화적 힘이 존재할 리 없다.
그의 영화에 매력을 느끼지 않기란 힘들다.
추천인 9
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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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날 만추가 필름 소실이라니...처음 알았습니다. 너무 아쉽네요.
김정일 컬렉션.. 언젠간 공개될까요?
13일의 금요일 광팬이란 소문은 들었는데....
만추가 공개된다면 한국영화걸작리스트가 바뀌게 될거라 확신합니다!
👍
이만희 감독 영화중에서 마의 계단(1964)을 가장 좋아합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