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특선> 이스턴 프라미스(2007)
스포있어요.
<이스턴 프라미스>는 런던의 한 미용실에서 어느 마피아 간부가 암살자에게 목이 서걱 베여 죽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잠깐, 크리스마스 특선이라는 훈훈한 제목을 보고 들어오신 분들, 절대로 낚시 아닙니다. 일찌기 차원을 넘나드는 현자, 데드풀이 말했듯이 원래 좋은 러브스토리는 살인에서 시작하는 법입니다.
장소를 옮겨, 병원에서 어린 미혼모가 아기를 남기고 세상을 떠납니다. 조산원 안나(나오미 와츠)는 책임을 느껴 아기를 맡아 돌보면서 생모가 남긴 일기장을 뒤져 가족을 찾아주려고 합니다. 생소한 러시아어로 쓰여있는 일기를 번역하기 위해 병원 근처에 위치한 러시아 식당의 사람 좋아보이는 주인장에게 일기를 맡겼는데... 아뿔싸, 이 식당 주인 세묜(아민 뮐러 슈탈)은 사실 러시아 마피아의 대부이자 죽은 미혼모를 인신매매로 끌고온 후 강간해서 임신시킨 바로 그 장본인이었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감추기 위해 빼박 증거인 아기마저 죽이려는 저 사악한 마피아 보스를 상대로 한낱 순진한 조산원이 뭘 할 수 있을까요. 이제 그녀와 아기에게 필요한 건 오직 기적뿐입니다.
<이스턴 프라미스>는 예수 탄생설화에 대한 느슨하지만 분명한 알레고리입니다. 처녀수태를 한 마리아는 아기를 입양한 안나로 치환이 가능하고, 일이 어찌됐던 아기를 지키려고 하는 안나의 엄마와 삼촌은 동방박사, 그리고 아기를 죽이려하는 세묜은 헤롯왕으로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동방박사들에게 왕의 탄생을 알리고 마리아 일행에게 헤롯의 칼날을 피할 수 있도록 도와준 천사는 누굴까요. 예, 바로 비고 모텐슨이 연기한 니콜라이죠.
영화의 중반, 조직의 말단 꼬붕이던 니콜라이는 모종의 이유로 정식 마피아 입단 심사를 받습니다. 그가 두목들 앞에서 몸에 새긴 문신을 보여주며 자신의 과거를 밝히자, 그들은 니콜라이의 부모를 모욕하고 그의 과거를 부정하며 오로지 조직원으로서의 삶만을 받아들이게 만듭니다. 이 장면이 진정 소름끼치는 이유는 가족과 과거를 모두 부정당한 니콜라이가 앞으로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는 점 때문입니다.
아까 니콜라이가 예수 탄생설화의 천사역이라고 말씀드렸죠? 천사에게는 부모도 과거도 없습니다. 그저 신의 의지를 대행하는, 잘 벼려진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보통 나체로 다니죠. 이어지는 목욕탕 격투씬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니콜라이는 자신을 습격한 다른 조직의 암살자들을 맨손으로 때려 죽여버립니다.
사실 그의 정체는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소속으로, 런던내 자국 마피아의 동향을 감시하는 임무를 띄고 잠입한 스파이였습니다. 안나와 아기를 딱하게 여겼지만, 임무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던 그는 이 습격을 계기로 그야말로 숨겨왔던 날개를 펼칩니다. 세묜의 악행을 더는 두고볼 수가 없던 그는 본국과 연락해 바로 세묜을 실각시키고 키릴을 설득해 아기를 구해냅니다. 마치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모든 상황을 정리한 그는 평소처럼 무심한 척 안나에게 아이를 돌려주고, 별일 없었다는 듯한 태도로 뒤돌아섭니다. 그녀에게 품은 호감을 가슴 한편에 감춘 채로요.
<이스턴 프라미스>는 철옹성처럼 보이던 악에 맞서 한 생명을 살리려는, 어쩌면 인간으로서 당연한 측은지심을 가진 한 여인의 작은 선의가 만들어낸 나비효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영화는 서늘한 암흑가의 풍경을 묘사하면서 시작하지만 끝에는 한조각 양심을 지키는 것조차 버거워하던 인간들에 대한 구원으로 마무리합니다. 크리스티나라는 상징적인 이름을 가진 아기는 사악한 아버지 밑에서 뒤틀린 남성성을 강요당하던 키릴의 나약함으로 인해 살아남아, 과거 아이를 사산했던 비극을 겪었던 안나와 그 가족들에게 희망의 존재가 됩니다. 평생에 걸쳐 기괴하게 뒤틀린 몸뚱아리에 대한 핏빛 악몽을 그려온 데이빗 크로넨버그 작품치고는 정말 예상외의 해피엔딩이죠.
잔혹한 세상에서 선량한 주인공과 아기가 터럭 하나 다치지않고 무사생존한다는 이 기적같은 엔딩까지의 과정을 복기해보면, 그야말로 구석구석 신의 손길이 미쳤다고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예, 이것이 제가 이 영화를 크리스마스 특선으로 추천하는 이유입니다. 크리스마스에는 역시 기적극이 제 맛 아니겠습니까?
매년 이맘때면 연례행사처럼 찾아오는 케빈이나 맥클레인 형사와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것에 식상해지신 익무 분들이라면, 올해는 러시아에서 온 과묵한 스파이 니콜라이와 한번 만나보시길 감히 추천드립니다.
PS.
이제는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페르소나가 된 비고 모텐슨을 비롯해 나오미 와츠, 뱅상 카셀, 아민 뮐러 슈탈 모두 명불허전의 연기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작중 러시아 출신이거나 러시아 이민 2세를 실감나게 연기했는데, 막상 그들 중 누구도 러시아쪽 혈통이거나 러시아 국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게 포인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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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마피아가 가장 살벌하구나, 인식하게 만든 영화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