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talist (2025)걸작. 스포일러 있음.
21세기에 나타난 고전스펙타클 드라마다. 1950~1960년대 만들어졌던 스펙타클 바이오그라피 예술 영화를 연상시킨다. 가령, 시스티나성당 천장화를 그렸던 미켈란젤로의 일화를 그린 The agony and ectasy (1964) (시스티나성당 천장화 그리는 것을 엄청난 돈을 들여 재현하였다) 혹은 고호의 일생을 다룬 Lust for life (1956) (고호의 모든 작품들을 모아서 영화에서 보여주는 전무후무한 짓을 하였다) 등. 이 작품들의 특징은, 엄청난 돈을 들여 역사적 사실의 거대한 재현, 스타 기용, 약간은 위인전스러운 이야기, 주인공의 예술에 대한 심도 있는 설명, 예술에 대한 찬사 등이다. 아카데미는 역사상 이런 대작들에 엄청난 애정을 가져왔다.
이 영화는 이런 작품들의 딱 동생이다. 후손도 아니고 아들도 아니고 동생에 해당한다. 그만큼 유사성이 크다.
브루탈리즘이 뭔가 했더니, 잔인한 사람 뭐 이런 뜻이 아니라 건축의 한 양식이었다. 완성되지 않은 듯 양감을 강조하고 시멘트 콘크리트로 보통 짓는 건축스타일이다. 제목부터가 벌써 "나는 건축의 한 양식인 브루털리스트에 대해 다룬 예술대하영화야"하고 선언한다. 피카소에 대한 영화를 만들면서 제목을 "입체파"라고 붙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렇게 이렇게 보아줘 하고 제목에서부터 벌써 지정이 되어 있는 셈이다.
형식적으로도 overture 그리고 intermission으로 이루어진 형식이 과거 대하 스펙터클 바이오그라피와 유사하다. 의도적인 것임이 분명하다.
라즐로 토스라는 건축가가 이런 양식의 거장이다. 바우하우스에서 공부했던 그는, 여러 대형건축물들을 디자인하고 성공시켜서 국제적 명성을 얻은 거장이다. 그는 나찌에 의해 탄압받을 요소를 골고루 갖고 있다. 유태인에다가
나찌가 그토록 싫어했던 새로운 미술운동 참여자다. 나찌는 이들을 게르만정신을 타락시키는 퇴폐적인 운동으로
선언하고 대대적인 파괴행위를 했다. 아마 라즐로의 작품들도 이 시기 대부분 파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천행으로 미국에 망명한다. 하지만, 그를 알아주는 사람은 미국에 한명도 없고 그는 거지가 된다. 글자 그대로 거지다.
라즐로 로스는 나찌라는 지옥에서 미국이라는 새로운 지옥으로 옮아온 셈이다.
영화 처음에, 라즐로가 어둠 속에서 괴로워하다가 바깥으로 환호하면서 나온다.
밖은 햇빛이 찬란하다. 파란 허공이 눈부시게 있다. 그런데, 자유의 여신상이 갑자기 허공에 나타난다. 그것도 거꾸로 뒤집혀 나타난다. 라즐로에게 비친 미국이다. 어둠 속에서 솟아나온 눈부신 빛, 불꽃을 들고 인류의 자유를 지키는 여신 - 하지만, 거꾸로 뒤집혀진 자유의 여신이다. 그런 여신이나마 없는 것보단 낫다. 하지만, 그런 유형의 자유는 자유와 동시에 고통도 준다. 그리고, 핸드헬드 카메라로 막 흔든다. 라즐로가 배에서 나와서 햇빛을 본 순간, 눈부셔서 어찔어찔한 장면을 재현도 하지만, 동시에 라즐로가 새로운 유형의 미국도시에서 적응히야 한다는 부담도 상징한다. 라즐로는 그동안 예술적 자유 그리고 나찌에 의한 억압 두 극단만 경험했다. 0 아니면 1이었다.
그런데, 미국은 자유와 동시에 다른 질곡 노예됨을 강요한다. 하나를 추구하자면 다른 것들이 따라온다. 더 복잡하다. 라즐로의 경우에는 이 복잡함이 더 심하다. 그는 예술가이니까. 사실 이 영화 전체의 주제가 이것이다. 예술가가 자기 비젼을 자유롭게 추구하기 위해서는 자본의 노예 자본가에게 종속되어야 한다. 하지만, 종속만 되어서는 예술적 자유라는 것이 불가능하다.
거대한 예술작품을 창작하기 위해서는 패트런인 대자본가 해리슨 반 뷰랜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 해리슨은 예술을 잘 이해하는 감상인이지만, 동시에 자본가이고 라즐로가 자기 비젼을 해리슨의 그것에 맞추기 기대한다. 라즐로는 해리슨 개인뿐만 아니라, 자본의 논리와 권력의 논리에도 적응해야 한다. 이것들을 늘 이겨먹겠다고 해선 안된다. 하지만, 여기 끌려다녀서도 안된다. 라즐로는 이 균형을 달성하는 데 성공했는가? 결국 자기 이름을 남긴 걸작 반 뷰랜 센터를 만드는 데 성공했으니, 라즐로도 이 균형을 달성하는 데 성공한 셈이다. -> 사실 이것이 이 영화의 전체 내용이다.
혹시, 이 작품이 예술을 표면적인 소재로 내세운 정치적인 것인가? 뭐, 자본주의의 민낯을 비난한 작품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 작품의 제목이 부르탈리스트라는 것을 보면 정치적인 것은 그냥 부수적인 주제다. 주제는 예술가 라즐로 토스다.
라즐로는 바우하우스에서 공부했다. 기존의 대칭적인 안정적인 예술에 대항해서 비대칭적이고 불안정적이고 생동감 있는 예술을 주창한 곳이다. 라즐로가 자본가 해리슨의 의뢰로 문화센터를 지을 때, 사람들은 대리석을 갖다 붙이려고 한다. 깨끗하고 화려하고 안정적이고 - 당시에는 이것이 상식이다. 라즐로는 그런 거 필요 없고 콘크리트로 그냥 만들라고 한다. 모두들 놀란다. 그거 그냥 추한 거 아니냐? 지금까지는 그 추한 것을 감추려고 이쁜 대리석같은 것을 표면에 붙였는데...... 이 영화의 재미 중 가장 큰 것이 이것이다. 그는 추한 콘크리트더미를 아름다움으로 보수적인 미국사회에 각인시킨다. 대리석으로 아름답게 균형적으로 만든 옛양식 건물들을 아름다움으로 당연히 받아들이며 살아온 미국인들에게 새로운 미학을 던진다. 그리고 변화시킨다. 물론 쉬운 과정이 아니다. 라즐로는 악전고투하며 이것을 관철해 나간다.
하지만, 라즐로는 그 과정에서 점점 더 해리슨의 노예가 된다. 해리슨이 나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라즐로의 새로운 예술에 대해 남들이 다 의구심을 가질 때, 그를 믿고 밀어준 사람이다. "나는 예술에 대해 잘 모른다"하면서 라즐로에게예술적 권한을 준 사람이다. 라즐로의 예술적 기행과 개성을 받아준 사람이다.
하지만, 돈을 주는 해리슨과 라즐로 사이에 주종관계 비슷한 것이 안 생길 수 없다. 해리슨은 큰 손실을 볼 가능성이 있자, 안면몰수하고 라즐로를 버린다. (하지만, 해리슨의 입장에서 보면, 라즐로더러 "내 노예 해라"라고 한 것도 아니고, 자기가 큰 손실을 입어도 재산을 기울여 라즐로를 밀어줘야 한다 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 이 영화에서 해리슨은 라즐로에게 종속된 조연이 아니다.)
이 노예관계는 새로운 미국사회에서는 자유의 핵심이다. 라즐로의 아내는 유럽에 갇혀 있다가 자본가들의 도움으로 미국에 온다. 오히려, 라즐로보다도 더 자본가의 도움을 받은 사람이 그녀다. 그녀는 라즐로더러 "자기가 자유롭다고 착각하지 마라. 그것이 가장 완벽한 노예상태이니까"라고 경고한다.
라즐로의 아내야말로 어리석은 사람이다. 라즐로가 자본가에게 노예 되기를 거부했다면, 예술적 자유 성취는 고사하고, 거지 상태로 삶을 마감했을 것이다.
옥스포드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으면서도 신문 칼럼에다가 립스틱에 관한 글이나 쓴다고 불평한다. 미국에서도, 미켈란젤로를 데려다가 시멘트공은 안 시킨다. 그녀는 딱 그만큼 가치를 평가받은 거다. 어쩌면 그녀는, 자본주의가 자신을 그정도로밖에 평가하지 않은 데 불만이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녀가 입버릇처럼 내세우는 자부심의 원천은 "나, 옥스포드에서 공부했다" 이거 하나다. 그것도 정치학이나 사회학이 아니라 영문학.
그녀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자본가를 적대시한다. 라즐로의 아내는
자유와 노예, 자유와 속박, 자아실현과 타인에의 종속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미국의 본질을 못 본 것이다.
늘 불평불만에 립스틱에 관한 글이나 쓰다가 죽은 라즐로의 아내와 문화센터 건축물을 남기고 자기 비젼을 후세에까지 사람들이 감상하고 공부하게 만든 라즐로 - 누가 더 자유로왔을까?
라즐로는 자본가 해리슨의 눈에 띄기 전까지는 그냥 거지였다. 라즐로가 자기 예술적 비젼을 추구할 생각을 품을 여유를 갖게 된 것조차 해리슨의 덕이다. 해리슨이 무슨 변덕에서 혹은 무지하면서도 라즐로를 스폰서링한 것이 아니다. 그는 라즐로를 스폰서하기 전에 자기 나름대로 관찰을 하고 시험을 하고 했다. 라즐로가 이것을 통과하자, 전폭적인 지원을 했다. 이 영화는, 해리슨의 이런 면모에 대해서도 상당한 시간을 쏟는다. 라즐로의 아내가 말한, "해리슨이 당신을 노예로 만들었어"는 사실을 전혀 포착하지 못한 소리다.
the agony and ectasy 그리고 lust for life 보다는 좀 더 복잡하지만, 그래도 큰 맥락에서 줄거리나 구성, 주제는 비슷하다.
마지막에 에필로그가 붙는데, 라즐로의 예술에 대한 직접적인 "변사의 해설"이다. 원래 the agony and ectasy같은 영화에서는 프롤로그로 맨앞에 나왔던 것인데 여기에서는 뒤로 뺐다. 라즐로의 예술세계에 대한 강의 비슷한 것인데, 그의 예술과 홀로코스트 경험, 그와 아내의 관계가 그의 예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주제에 대해 강의를 한다. 아마 영화 본편에 넣기에는 너무 영화가 복잡해져서 그런 것 같다. (영화 본편에 나온, 라즐로가 문화센터를 짓는 과정은, 영화에 묘사된 것보다 미학적으로 훨씬 더 복잡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상당히 눈에 익은 대하영화를 오랜만에 보았다. 애드리언 브로디, 가이 피어스의 연기야 말할 것도 없고,
커다란 문화센터 건축을 많은 돈 들여서 재현하는 것도 볼 만했다. 복잡한 주제를 흥미진진하게 그러면서도 다양한 각도에서 박진감 있게 보여준 걸작이다. 대하드라마 측면에서 보면 안정적이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불안정적이고 역설적이다. 주인공이나 패트런 간 관계는 역동적이고 역설에 차 있다. 라즐로의 예술은 안정과는 관계가 멀다. 이 영화는 둘 모두 아주 성공적으로 포착하였다.
예전같으면 아카데미 수상을 노리고 만든 대작이라고 했을 것이나, 지금은 너무 많은 다른 요소들이 수상에 큰 영향을 미치는 까닭에 그렇게까지는 말 못하겠다. 어쨌든 이 영화가 아카데미상을 휩쓸어도 난 놀라지 않을 것이다. (사실 나는 그렇게 기대한다. 가이 피어스 연기가 아주 훌륭했다. 애드리언 브로디의 연기도 훌륭했지만,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닌가?)
추천인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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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러닝타임이 김에도 여운이 길게 느꼈던 영화입니다.
머리속에 정리가 안될거 같아서 동진이형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정말 잘한 선택이라 생각이 들어요.
빌리에반 형님이 이렇게 좋은 리뷰글 적으시니
저도 분발해봐야겠는걸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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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정말 잘 읽었습니다. 읽을수록 복기가 단단해졌습니다.
한가지 궁금한게 있습니다. 열차사고로 인해서 밴 뷰런이 프로젝트를 취소하려하니까 라즐로도 온갖 난동을 부립니다. 턱걸이 놀이하던 노동자를 해고하려하고, 아내 앞에서 난동을 부리기도 하는 등 엄청나게 과민해지고 분노해집니다. 마치 밴 뷰런이 초반에 그랬던 것 처럼요. 저는 이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혹시 이에 대한 의견을 구할 수 있을까요?
예술이 자본에 우선하는 것은 아닙니다. 밴 뷰런도 문화센터 건축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라즐로가 처음 설계도를 가지고 갔을 때, 밴 뷰런은 깨우쳐주죠. 이 건물은 문화센터이고 이런이런 일을 해야 하는 건물이라고요. 쇼핑센터를 싸게 싸게 지은 경험이 있는 건축가를 붙여주어서, 라즐로의 건축을 견제 내지는 보완하려고 합니다. 밴 뷰런의 이런 인풋이 없었다면, 라즐로가 지은 건물이 과연 효과적인 문화센터였을까요? 밴 뷰런은 라즐로가 보지 못했던 본질을 바라보는 시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둘이 동등하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영화 마지막에 나오죠. 성장한 예술은 자본가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을 갖게 됩니다.)
제1부에서는 둘 간의 관계와 상호작용이 순조롭게 결과를 낳는 과정만 보여줍니다. 하지만, 2부에서는 둘 간에 갈등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죠.
라즐로의 신경질적인 반응은, 라즐로의 예술과 밴 뷰런의 자본주의적 합리적 시각이 갈등을 빚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하나, 라즐로의 신경질적인 반응은 라즐로의 하나의 깨달음에 있기도 합니다. 예술의 물적 기반은 자본에 있습니다. 심장이 계속 뛰어야 예술이 사는데, 라즐로 예술의 심장은 밴 뷰런이었죠.
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는데,
라즐로의 부인이 라즐로에게 말합니다. "기차사고가 났다고 당신이 지금까지 해 온 일을 한순간에 무위로 돌려버렸다. 당신은 이용만 당했다"고요. 라즐로는 당신이 맞아 하고 말하지 않습니다.
라즐로 부인의 말이야말로 일방적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돈을 들인 것은 밴 뷰런이었고, 거지상태인 라즐로를 불러다가 일을 주고 상류층과 연결시켜준 것도 밴 뷰런이었습니다. 라즐로 부인은 "이용만 당하다가 버림을 받았다"하는 식으로 말을 하는데, 이것은 말이 안되죠. 당장 미국으로 자신을 데려와준 것도 밴 뷰런이었는데요. 라즐로는 예술이란 자본의 논리와의 대화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라즐로는 예술가고, 부인은 립스틱에 대해 포럼글이나 쓰는 사람인 거죠.)
라즐로는 밴 뷰런이 프로젝트를 그만두자, 기업에 취업해서 기업의 부속품으로 일을 하게 됩니다. 밴 뷰런이 다시 한번 기회를 주자, 라즐로는 자기 예술을 추구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라즐로가 예술을 진행함에 따라, 밴 뷰런은 라즐로의 예술에 매혹되고 그를 선망하게 됩니다.
요즘은 정말 아카데미가 많이 바뀌어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