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色夜叉 (1954) 이수일과 심순애. 괴작. 스포일러 있음.
걸작이라면 걸작, 범작이라면 범작, 졸작이라면 졸작이지 괴작은 뭐냐 하는 질문이 당연히 나올 수 있다.
이 영화는 걸작의 소지가 있다.
대규모 예산과 정교한 무대장치. 저택에 불을 질러가며 촬영한, 당시로서는 돈 많이 들인 촬영. 일급임이 분명한 연출과 연기. 더한 것도 덜한 것도 없는 꽉 짜인 구성. 영화가 아주 고급스럽다.
그런데, 왜 걸작이 아니라 괴작이냐 하면, 이 영화에 흘러넘치는 신파조 때문이다.
"아~~ 김중배의 다이아반지가 그렇게 좋았단 말이냐?"하는 신파조가 여기에서도 넘실거린다.
장한몽의 신파조가 우리나라 특유의 것인 줄 알았더니, 그 원작이라고 할 수 있는 금색야차에서도 신파조가
엄청나다. 닭살이 돋는다. 비싼 돈 들여서 고급스럽게 찍는다고 해서 신파조가 닭살이 안 돋는 것은 아니다.
대학생 간이치는 아버지 친구의 도움으로 공부를 한다. 아버지 친구의 딸 미야와 약혼까지 한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다. 그런데, 아버지 친구는 딸이 도미야마라는 은행가 아들과 결혼하는 것이 더 딸에게 좋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간이치와 미야의 약혼을 깨려고 한다.
뭐, 부모 마음은 다 그러니까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미야가 문제다.
간이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휴양지 아타미로 도미야마를 만나러 간다.
그리고, 도미야마에게서 엄청난 크기의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를 받는다. 받은 다음 끼고 다닌다.
다이아몬드 반지를 받았으면 간이치와는 깨진 것 아닌가? 그런데, 미야는 반지를 받았으면서도 입으로는
간이치를 사랑한다고 헤어질 수 없다고 한다. 헤어질 수 없다고 하면서도, 동시에, "도미야마와 결혼해서 도미야마로 하여금 간이치의 유학비용을 대주도록 만든다면, 간이치에게도 결국 도움이 되는 거야"같은 소리를 한다.
내가 도미야마와 결혼하는 것이 간이치에게도 결국 좋다는 식의 자기 합리화다. 이런 생각들이 어떻게 동시에 공존할 수 있는지 참 이해할 수 없다.
간이치는 미야가 아타미로 가서 도미야마를 만난다는 사실을 알고 아타미로 따라간다.
그리고 아타미의 해변으로 미야를 부른다.
그 다음 이어지는 장면이 "심순애, 내 바지가랑이를 놔라. 바지 가랑이가 찢어진다."다.
간이치는 단도직입적으로 나와 헤어질 거냐고 묻는다. 미야는 절대 아니라고 자기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간이치가 반신반의하게 생각하다가 보니까, 미야의 손가락에 눈알만한 크기의 다이아몬드 반지가 끼어져 있다.
간이치를 만나러 오면서도 그 반지를 끼고 온 것이다. 간이치는 (당연하게도) 그 반지를 낀 순간 나와는 깨진 것이라고 말한다. 나와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면 그 반지를 받아서는 안되었다고.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미야는, 이 반지에는 큰 의미가 없다고 신경쓰지 말라고 한다.
간이치는 화가 나서 이젠 끝이라고 말하고 떠나려고 한다. 미야는 엉엉 울면서 간이치의 바지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진다. 간이치는 미야를 뿌리치고 가려는데 미야가 바지가랑이를 붙잡고 안 놓아준다.
미야는 자기가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버림을 받는 중이라는 듯 울면서 애원한다.
그런데, 뭘 애원하는 거지? 도미야마와는 결혼하고 간이치와는 애인관계를 유지하자는 건가? (간이치도 똑같은 생각이다. 도대체 뭐 하자는 거냐고 미야에게 물으니까. 미야는 아무 말 않고 그냥 자기는 버림 받는 미련의 여인인양 울기만 한다. 정말 속 터진다.) 간이치는 미야를 내버려두고 떠나 버린다. 미야는 혼자 남겨져서 엉엉 운다.
이게 신파조로 엉터리 장면이라면 그냥 웃어버리고 말 텐데, 또 연출과 연기 자체는 고급스럽다. 일본 고전영화의 장중함과 무게를 갖고 있다. 그래서, 심정이 복잡해진다.
간이치는 이 사건 이후로 맛이 가서 고리대금업자의 직원으로 들어가 버린다. 대학생 신분에서 엄청난 추락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 되어 돈만 좇는다. 간이치에게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어느 초로의 고리대금업 여인이 간이치에게 반해서 쫓아다닌다. 여자라면 질린 간이치는 슬슬 피해다니지만, 여인이 쫓아다닌다. 자기 돈을 다 부어서라도 간이치 환심을 사려한다. 간이치는 여인 덕에 고리대금업 거물로 쉽게 자리잡는다. (이 여인도 불쌍하다. 자기 발로 간이치와 미야 사이에 끼어들었으니...... 나중에 쫄딱 망한다.)
미야는 도미야마와 결혼하고 곧 후회한다. 도미야마는 집에 게이샤들을 끌고 와서 아내 미야더러 게이샤 시중을 들게 한다. 갖은 모욕을 준다. 도미야마가 나쁜 것이 아니다.
"당신은 당신이 참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남편이 이렇게 학대하니까. 그런데, 진짜 불쌍한 것은 나야.
나랑은 그림자만 결혼하고, 마음은 계속 전애인에게 주고 있잖아? 지금도 몰래 일기를 적으면서 전애인만 그리워하는 글을 적고 있잖아?"
미야는 간이치에게 하던 대로, 도미야마에게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혼한 다음에 말이다. 도미야마도 속이 터져 죽을 지경이다.
미야는 참혹한 결혼생활 중에 간이치를 그리워한다. 가정을 깨고 간이치에게 가려고 한다.
간이치의 행방을 알려고 간이치의 학교선배를 찾아간다. 간이치의 학교선배는 복장이 터진다.
"결혼을 해놓고서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하려고 간이치를 찾습니까? 간이치에게 그렇게 해놓고서. 간이치가 지금 만나나 줄 것 같습니까?" 그의 말이 맞다.
하지만, 미야는 간이치 선배의 바지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진다. 그리고, 그냥 운다. 한번 보기나 하려고 그런단다.
어영부영 이러다가 보니, 영화는 벌써 후반부로 접어든다. 이 영화 미야 캐릭터는 내가 본 중 가장 복장 터지는 캐릭터다. 미야가 우는 장면만 보다가 영화 2/3를 다 보았다.
미야는 간이치를 찾아간다. 이번에는 간이치의 바지가랑이를 붙잡고 그냥 운다. 간이치의 복장이 터진다.
간이치 일생을 이렇게 망쳐놓고 이제 찾아와서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울다니......
냉혹하게 쫓아낸다. 미야는 간이치에게 쫓겨나서 연못에 와 투신자살을 시도한다.
간이치는 첨벙거리는 물소리를 듣고 놀라 쫓아와서 미야를 구해낸다. 그리고 둘은 뜨거운 포옹을 한다.
참 애매하다. 이거 해피엔딩인가 아닌가.
미야는 간이치와 화해한 다음에도 늘 하던 대로 할 것이다. 간이치 복장이 남은 평생 터지는 것은 100% 확실하다.
스트레스 잘 받는 사람들은 이 영화 보면 안된다.
그래도 영화는 아주 잘 만들어서 시간을 들인 것은 안 아깝다. 영화 자체는, 장중하고 잘 만든 일본고전영화다.
영화 자체로만 말하면, 1950년대 만들어진 일본고전영화들 가운데에서도 수위에 들어야 한다. 1950년대 일본영화들 중 특이하게도 칼라로 찍었다. 칼라로 찍은 정도가 아니라, 칼라화면을 효과적으로 사용해서 인상적인 이미지들을 창출해내었다. 저택에 불이 나서 불길이 낼름낼름 저택을 핥는 장면은 칼라화면을 아주 효율적으로 사용해서 생동감 있는 이미지를 만들어낸 장관이다. 그리고, 무대장치나 무대효과 등은 예산을 엄청 써서 아주 아름답고 스케일 크게 만들었다. 멜로드라마치고는 특이하게 스펙타클한 영화다.
그러면, 별 것 아닌 영화에 돈만 쳐발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연출이 아주 안정적이고 훌륭하다. 1950년에 만들어진 영화같지 않게 뭔가 연출이 현대적이랄까......미야가 고토를 켜는 장면같은 것은 아주 미시적으로 섬세하면서도 다이나믹을 강조한 훌륭한 장면이었다. 배우는 그냥 고토만 켜는데, 음향효과도 없이 연출만으로, 무슨 일이 터질 지 조마조마한 긴장을 부풀려나가는 것이다.
배우들의 연기를 보면, 일급배우들이다.
무려 크라이테리언 컬렉션에서 리매스터링되어 나왔다.
** 일본 휴양지 아타미에 가면 해변에 간이치와 미야 동상이 서 있다. 간이치가 발로 미야를 빵 차버리려고 발을 들고 있고, 미야는 간이치 바지가랑이를 잡으려고 하는 포즈다. 하도 유명해서 사람들이 그 동상 앞에서 동상의 포즈를 따라하며 사진을 찍는다고 한다. 일본에서 이 장면이 아주 유명하다고 하니, 일본사람들도 신파조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나 보다. **
** 금색야차는 우리나라에서 장한몽이라는 제목으로 번안되어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영화 금색야차는 우리나라에서 신상옥감독이 거의 카피수준으로 신성일 주연 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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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요. 미야 때문에 등장인물들 모두가 불행해진 것 같습니다. 관객들도 복장 터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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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여자랑 결혼까지 하고...
검색해보니 원작은 사실 미국 여성 작가의 소설이고, 그게 일본서 번안돼 히트하고, 다시 한국판으로 번안된 거라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