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리오 (1960) 멕시코호러영화의 걸작. 스포일러 있음.
이런 영화 아주 좋다.
서부영화같은 데서 전형적인 반푼이로 등장하는 멕시코 농민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그들이 자신의 비참한 생활 속에서, 정말 진정성을 갖고 훌륭하게 살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이 소박한 진정성이 내게 큰 울림을 주며 다가온다.
그들의 정신세계, 문화, 윤리의식, 생사관에 대한 영화다. 다른 어디에서 이것을 볼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 깊이를,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수준의 우화를 가지고 표현해낸다. 마지막에 정말 대단한 감동까지.......
마카리오는 멕시코 시골에 살았던 어느 나뭇꾼의 이름이다.
종교재판이 나오고 하는 것을 보니 시대는 18세기
정도였나 보다.
멕시코혁명이니 하는 것들은 아직 나오지도 않은 때다. 봉건적 신분제는 그냥 굳건해 보인다.
마카리오는 늘 배고프다. 아이들은 여섯이나 되어서 모두들 한창 자랄 때라 배고프다고 보챈다.
마카리오의 아내는 꿀꿀이죽같은 것을 끓여서 아이들 접시에다가 한 숟가락씩 얹어준다.
그럼 아이들은 한입에 후루룩 흡입하고서 배고프다고 보챈다. 마카리오나 마카리오의 아내는
자기들이 먹을 것도 아이들에게 양보하고 늘 배고프게 지낸다.
마카리오는 그렇게 지내다가 어느날 폭발한다. 다른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고 칠면조 한 마리를
자기 혼자 통째로 먹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먹지 않겠다고 아내에게 선언한다.
도대체 칠면조를 살 돈이 어디 있다고......
다 큰 어른이 칠면조 한 마리 혼자 먹는 것이 꿈이라니! 우습게 보일 지 몰라도, 영화를 보다 보면 그의
상황이 이해된다. 산에 가서 나무를 베어다가 팔아도 꿀꿀이죽 하나 배 부르게 못 먹는 삶이다.
멕시코사람들은 삶은, 죽음보다 훨씬 짧은, 우리에겐 잠깐이라고 말한다. 그럼 내세에는 지금보다 좋을 것이라고
믿는가? 그것도 아니다. 현세에 배고픈 사람은 죽어서도 배고프다.
어느날 마카리오의 어린 아들이 묻는다. 저 건너 부잣집에서는 죽은 가족들을 위해 호화로운 음식을 차리는데,
우리도 그렇게 할 것이냐고. 그러자, 마카리오의 아내는 꿀꿀이죽이 든 냄비를 보여준다. 이것이 우리가
먹는 음식이고, 죽은 우리 가족들도 이것을 먹을 것이라고. 아주 흥미로운 생사관이다. 가난하고 꿀꿀이죽조차 마음대로 못먹는 생활이 죽은 뒤에도 이어진다면, 멕시코농민들은 무엇에 마음을 기탁한다는 말인가?
"삶은 아주 약간의 즐거움만 있는 것이고, 재수 없으면 그마저도 없는 삶이 내게 주어진다." 아주 인상 깊은 대사다.
마카리오는 죽어서도, 그 많은 나뭇짐을 머리에 띠로 매어 이고서, 끝없는 산길을 헤메다닐 것인가? 꿀꿀이죽 한 숟가락씩 가족들에게 먹이려고?
마카리오의 아내는 남편에게 칠면조 한 마리를 꼭 구워주고 싶다. 그래서, 고민 끝에 마을 부잣집에 가서 살아있는
칠면조를 훔쳐다가 마카리오에게 구워준다. 그리고, 마카리오에게 몰래 주면서 숲에 들어가 먹고 나오라고 한다.
마카리오는 깊은 산속 숲에 들어가 칠면조를 먹으려는데, 어느 호화롭게 옷입은 남자가 나타난다. "참, 맛있어 보이는 칠면조군. 내게 그것을 나눠준다면 금화를 주겠네." 마카리오는 "내가 금화로 무엇을 살 수 있다고. 내가 금화를 내민다면, 사람들은 내게 금화를 훔쳤다고 생각해서 내 팔을 잘라 버릴 걸?" 그러자, 남자는 사라진다. 마카리오가 다시 칠면조를 먹으려는데, 이번에는 신이 내려온다. 그리고, 마카리오더러 칠면조를 나누어 달라고 한다. 마카리오는, "모든것을 갖고 있는 당신이 내게 칠면조를 나눠달라고 하시는 것은, 내게 선행을 하도록 만드시려는 것 아닙니까? 저는 선행을 위해 이 칠면조를 포기하지 않겠습니다"하고 대답한다. 그리고, 마카리오가 이 칠면조를 먹으려는데, 이번에는 굶어 눈이 퀭한 젊은이가 와서 애걸한다. "아주 맛있어 보이는 칠면조군. 난, 천년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어. 제발 칠면조를 좀 나눠주게." 마카리오는 그를 흘낏 보더니, 칠면조를 나눠준다. "당신은 나보다도 더 배고파 보이는군. 이리 와 앉게. 칠면조를 반 나눠주지." 그리고 둘은 게걸스럽게 칠면조를 먹는다.
"왜, 내게 칠면조를 나누어 주었는가?"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칠면조를 먹으려 할 때마다 누군가 나타나 방해했지. 자네에게 칠면조를 주지 않았다면, 나는 계속 방해받아 칠면조를 먹지 못하게 될 거야. 그래서, 더 이상 방해받지 않으려고 칠면조를 준 거야." 저승사자는 크게 웃는다. "내게 칠면조를 준 것뿐만 아니라, 나를 웃게도 해주었군." 저승사자는 마카리오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이것도 "선행은 보답을 받는다"식의 안일한 전개가 아니다. 무언가 상징이 들어가 있는 듯하다. 나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상징이다.
멕시코 농민들의 비참한 삶을 이렇게 리얼리즘을 갖고 그릴 수 있을까? 정말 가식 없는 진정성 있는 표현이다. "다 큰 어른이 칠면조 한 마리 통째로 먹는 것이 꿈이라고? 정말 유치한 사람이군."하는 생각이 들 지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 마카리오가 그런 꿈을 갖는 것이 이해가 된다.
칠면조를 다 먹은 젊은이는, "이제 내가 빚을 갚아야 하겠군."하면서 발로 땅을 툭 친다. 그러자, 거기에서 물이 솟아나온다. 그 물을 호리병에 담아주면서, "이 물만 한방울 먹이면 누구든 살려낼 수가 있네. 병자가 있는 방안에 들어가면, 내가 서 있을 걸세. 자네만 내가 보일 거야. 내가 만일 침대 발치에 서 있다면, 그 사람은 살아난다는 뜻이야. 그럼, 이 물 한방울을 그에게 먹여. 그 사람은 즉시 살아날 거야. 하지만, 내가 침대 머리맡에 서 있다면, 그 사람은 죽는다는 뜻이야. 무슨짓을 해도 그는 죽을 수밖에 없어. 자, 이제 나는 가네. 앞으로도 날 보겠지만, 대화는 나눌 수 없을 거야."
마카리오가 점차 타락해서 이 능력을 자기를 위해서만 쓰다가 파멸한다는 식의 내용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런 식의 뻔한 클리셰 없다. 마카리오는 그대로 현명한데, 타락한 신분제적인 사회가 그를 놓아두지 않는다. 마카리오는, 이 능력을 이용해서 환자들을 치유한다. 부자들에게서는 많은 돈을 받지만, 가난한 이들에게는 거의 보수 없이 병을 치유해준다. 부자도 가난한 사람들도 그를 사랑한다. (그는 부자들에게서조차도, 그들이 낼 수 있는 거액만 부른다. 더 준다고 하면 스스로 사양한다. "나는 당신에게서 고마움을 받고 싶지, 원망을 받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당신이 낼 수 있는 돈만 받겠다. 그 이상의 돈은 필요 없다." 누가 멕시코농민이 어리석다고 했는가?)
하지만, 마카리오는 신분제의 선을 넘는다. 부유해진 그는, 사치품을 사고 대저택을 산다. 천한 농민인 그가 말이다. 시기하는 사람들이 나오고, 교회에서는 마카리오를 마법사로 몰아서 화형시키려 한다. 무슨 권리인지 몰라도, 병사들이 와서 마카리오의 집을 부순다. "우리는 법적으로 그런 권리를 갖고 있다"하면서 도리어 큰 소리를 친다. 마카리오나 그의 아내나 그저 당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저 우리 분수를 지키며 살았어야 했어요"하는 아내에게 마카리오는 "꿀꿀이죽을 먹으며 배고프게 살라고? 그건 사는 게 아냐."하고 단언한다. 마카리오의 아내가 옳은가? 신분제 안에서 비참하게 살아갔다면, 위협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비참함이 무엇이 좋은가?
마카리오가 잘못한 것이 무언가? 그는 여전히 현명했으며, 탐욕에 빠지지 않았고, 모든이들에게 관대했다. 왜 사회는 마카리오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가? 마카리오가 정당하게 이룬 부를, 국가권력이 와서 큰소리치며 파괴해도 되는 것인가? 이 사회에서 농민이 된다는 것은 무언가?
그런 마카리오에게 마지막 희망이 주어진다. 총독의 어린 아들이 아픈데, 마카리오가 살려낸다면, 용서해 주겠단다. 마카리오는 희망을 가지고 병자에게 가는데, 저승사자가 침대 마리맡에 서 있다. 그토록 오랫동안 마카리오를 도와주었던 저승사자가 결정적인 순간에 그를 배신한다. 마카리오가 아무리 애걸해도 소용없다. 마카리오는 이제 죽은 목숨이다. 마카리오는 도망친다. 산으로 도망쳤는데, 신이 그의 앞에 나타난다. 마카리오가 신에게 살려달라고 애걸하자, 신은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네"하고 거절한다. 마카리오가 무슨 잘못을 했어야 책임을 지지, 그가 잘못한 게 무언가? 신분제를 거스른 죄? 무엇에 대해 책임을 지라는 것인가? 신조차도 신분제를 옹호하는 존재인가? 농민들은 이런 데도 신을 믿어야 하나?
그가 어느 동굴에 들어가자, 어둔 동굴 속에서 저 너머까지 작은 촛불들이 무수히 타고 있다. 저승사자가 나타나, 마카리오에게 친절하게 말한다. "마카리오. 내가 자넬 배신한 게 아닐세. 사람의 수명은 신이 정해놓은 거야. 내가 어쩔 수 없네. 자네 수명을 나타내는 촛불은 여기 있네. 다 타들어가고 있어. 자네 수명은 곧 끝날 거야."
마카리오는 자기 초를 들고 도망친다. "난 살 거야." 저승사자는 쫓아올 생각도 않고, 친절한 목소리로, "마카리오. 소용 없어. 신이 정해놓은 거야. 그냥 돌아오게."
그러자, 장면이 바뀌어, 마카리오의 아내가 숲에서 마카리오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찾고 있다. 그녀는 여전히 초라한 차림새다. 그리고, 아내는 마카리오를 찾는다. 그는 칠면조를 앞에 놓고 죽어 있다. 칠면조에 한 입도 대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지금까지 벌어진 일들은 무언가? 마카리오가 죽어가면서 꾸는 꿈? 마카리오가 죽은 다음, 사후세계에서 벌어진 일? 마카리오가 갖은 고난을 겪은 다음, 저승사자는 마카리오를 데려가면서, 마카리오를 원래대로 가난한 농민으로 되돌려 놓은 것일까? 이것이 신비롭다. 멕시코농민들의 정신세계를 반영하는 우화일 것이다. 나로서는 그것을 온전히 이할 수 없다. 깊이 있고 신비롭다.
아내는, "당신은 유치하고 변덕이 심했죠. 그리고, 우리 삶은 살아있을 때나 죽어서나 괴롭겠죠. 하지만, 그래도, 난 당신과 함께 있어서 좋았어요. 난 우리 아이들도 당신처럼 키울 거예요."하고 독백한다. 이것이 굉장히 감동적이다. 멕시코농민들이 자기들의 고난한 삶을 그대로 끌어안고 그 안에서 가치와 행복을 찾아내다니. 그들만의 방식으로, 이 고난한 삶에 대응하는 법을 찾아낸 것일까? 이것은 멕시코농민들의 정신세계의 심층을 보여주는, 아주 깊이 있고 심오한 대사다. 마카리오의 아내가 마카리오에게 가지는 사랑은, 이 세상 어느 사랑보다도 진실하고 감동적이다. 어느 사랑이야기에서도 이런 진실한 감동을 주는 대사를 들은 적 없다. 여배우의 연기도 아주 진정성있게 이 소박한 사랑을 구현해낸다. 내가 그동안 영화들에서 본 아름다운 사랑의 대사들을 까마득히 뛰어넘는다.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아이들을 마카리오처럼 길러내겠다니, 그것은 무슨뜻일까? 사실 나로서는, 그들의 정신세계를 모두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걸작을 본 다음 드는 생각이, 그들의 이런 정신세계는 존중받고 존경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당신은 결국 칠면조에 입 하나 대지 못했군요."
그런데, 칠면조를 반으로 잘라져 있고, 칠면조 반쪽은 누군가 다 먹어 놓았다. 저승사자와 마카리오의 대화는, 실제 있었던 것이다.
굉장히 풍부한 이야기다. 마카리오의 우화는, 내게 깊은 감동을 준다.
이 멕시코농민의 삶은, 굳이 멕시코사람이 아닐 지라도, 굉장히 의미가 깊다.
이 영화는 걸작이다. 영화 만듦새도 아주 좋다. 걸작이라 부를 만하다. 나는 주제와 플롯만 이야기했지만, 이 영화는 만듦새도 걸작이다. 특히, 마카리오가 저승사자인 친구를 좇아 동굴 안으로 들어서는 장면은, 호러영화로 보아도 걸작이다. 등장배우들의 연기도 아주 훌륭하다. 멕시코영화들 중에서도 일급 각본가, 일급 감독, 일급배우들 그리고 대예산이 들어간 영화다. 역사상 호러영화들 중 탑 파이브 안에 이 영화를 놓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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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다음에 기회되면 한번 봐야겠네요
좋은 작품 소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