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아이들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
콜라이더의 칼럼을 우리말로 옮겨봤습니다.
원문은 아래예요.
https://collider.com/zone-of-interest-children/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요약
-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순수함은 선과 악이라는 인간 본성의 극단을 드러내며 성찰을 촉구한다.
-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은 아이들을 통해 잔혹함에 직면한 인류의 잠재적인 미래를 보여주며, 희망과 변화를 이끌어낸다.
- 어린 소녀와 클라우스와 같은 캐릭터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용기와 악을 외면하는 것 사이의 선택을 강조한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홀로코스트에 관한 가장 충격적인 재조명 중 하나일 것이다. 행복한 회스 가족이 그림 같은 일상을 보내는 동안 스크린 밖에서 벌어지는 만행의 잊기 힘든 소리는 영화를 본 후에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한편으로 영화의 주역은 크리스티안 프리델이 연기한 루돌프 회스와 잔드라 휠러가 맡은 헤트비히지만,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아이들이다.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은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과거가 아닌 현재에 관한 영화라고 말했다. 이름 없는 폴란드 소녀부터 회스의 큰 아들 클라우스(요한 카르트하우스), 막내 한스(루이스 노아 비테)까지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 등장하는 모든 아이들은 인간 본성을 반영한다. 선과 악, 그리고 눈앞의 악에 맞서는 것을 두려워하는 우리의 모습. 글레이저는 이 아이들을 통해 인류의 잠재적인 미래를 탐구한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선과 악은 인간성을 반영한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몇 장면에서 우리는 이름 모를 어린 소녀가 한밤중에 아우슈비츠 수감자들을 위해 음식을 묻어두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열화상 카메라로 찍은 이 으스스한 장면은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유일하게 들리는, 낮고 불길하게 울리는 음악으로 강조된다. 글레이저의 이러한 연출은 이 어린 소녀가 처한 위험과 선한 행동을 통해 보여주는 용기를 부각시킨다.
이 소녀 캐릭터는 글레이저가 아카데미상을 받을 때 헌정한 알렉산드라 비스트론-콜로지에치크(Aleksandra Bystron-Kolodziejczyk)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알렉산드라는 영화 속 소녀와 같은 행동을 했던 어린 레지스탕스 투사였으며, 글레이저는 열화상 카메라를 통해 말 그대로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그녀가 “선의를 위한 힘”이라고 말했다.
관객들은 그녀가 왜 그런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그녀가 하는 일이 선하다는 것만 알 뿐이다. 수용소에 아는 사람이 갇혀 있는지, 혹은 더 큰 저항 세력의 일원인지도 묻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본성이 선하다는 것이다. 이 이름 없는 소녀는 헤트비히와 루돌프 같은 어른들이 홀로코스트에 대해 취하는 평범한 태도(참고: 악의 평범성)와 극명하게 대비되는데, 소녀가 남겨두는 과일은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한 것이지만, 헤트비히의 정원에서 나오는 과일은 회스 가족만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아우슈비츠 수감자들의 입에서 뽑은 치아를 유심히 살펴보면서, 동생을 괴롭히는 (장남) 클라우스 회스도 등장한다. 관객이 보는 것은 타인의 고통에 매료된 소년의 모습이다. 아우슈비츠에서 수감자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실제로 보여주는 몇 안 되는 장면 중 하나라는 사실이, 이 소년이 하는 일에 주목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루돌프 회스가 자신이 저지르는 범죄로부터 가족을 분리하기 위해 쌓은 벽이 은유적으로 무너지고 있지만, 클라우스는 겁내지 않는다.
어린 폴란드 소녀의 경우처럼 역시나 관객들은 클라우스가 왜 그런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클라우스가 아버지처럼 나치 사상에 물들어 있다고 추측할 수는 있지만, 동시에 루돌프는 세상의 잔혹한 측면을 아이들에게는 감추고 있다. 그리고 클라우스가 어떻게 그 이빨을 갖게 됐는지도 관객들은 알지 못한다.
이처럼 설명되지 않는 동기와 배경 스토리에서, 관객은 글레이저의 논점을 파악할 수 있다. 이 아이들의 행동은 그들의 태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본성과 현재 처한 환경에 대한 반응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이 두 아이들은 모든 사람의 내면에 있는 선과 악을 대변한다. 사과를 수감자들에게 몰래 전달하는 이타적 행위에서부터 타인의 치아를 살펴보는 것까지, 글레이저는 이러한 행동을 통해 인간성의 양 극단을 제시하면서, 우리가 어느 쪽에 속하는지 궁금하게 여기도록 만든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가장 흥미로운 순간은 자기 성찰에 대한 미묘한 환기다.
영화에서 고작 여섯 살인 한스(회스의 차남)는 창밖의 시끄러운 소리를 듣는다. 죄수들이 사과를 차지하려고 싸우는 것으로 드러나는데, 이건 어쩌면 선행이 꼭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일 수도 있다. 루돌프 회스가 아무렇지 않게 수감자를 익사시키라고 명령하자, 한스는 창밖 광경에서 고개를 돌리고는 “다시는 그러지 마.”라고 속삭인다. 이건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충격적인 순간이다. 그저 한스가 수감자들에게 복종하라고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가 클라우스나 루돌프와 같은 본성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스가 다시는 창밖을 봐선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여기서 조나단 글레이저는 인간 본성의 가장 일반적인 측면을 제시한다. 용감해지거나 악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악행이 벌어지는 것을 외면하는 것 말이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글레이저가 인류의 잠재적 미래를 제시하기 위해 사용하는 캐릭터가 말 그대로 인류의 미래인 어린이라는 점이다. 글레이저는 창밖의 공포를 보고 싶지 않은 막내 아들의 모습을 통해 그러한 약점이 이해할 만한 행동이라고 제시한다. 글레이저는 관객에게 더 나아지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치는 게 아니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 어린 소년은 자라서 더 나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장남 클라우스도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을 저지르기 전에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름 없는 폴란드 소녀 역시 나중에 잘못된 길을 갈 수도 있을까? 루돌프 회스도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이 저지른 일의 엄청난 무게를 느끼며 구역질을 한다. 어쩌면 회스도 변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자신의 방식을 지나치게 고수하던 사람은, 자신의 본성에 욕지기를 느끼지 않더라도 변화에 고통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래서 루돌프는 구역질을 한 뒤에도 계속 악행을 저지른다. 그는 이미 늦었고, 그가 저지른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 하지만 내일의 아이들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 캐릭터들이 가장 흥미로운 것이다.
글레이저는 관객들에게 사람은 변할 수 있고,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 본성의 어떤 측면을 선택할지는 관객 각자의 능력에 달렸으며, 그 선택은 한 번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관객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글레이저의 의도를 완전하게 이해하려면 인류의 미래를 짊어진 캐릭터들, 즉 어린이들에게 가장 주목해야 한다.
gol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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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봐야겠네요
잘봤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