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프터 양] 간략후기
최근 애플TV 오리지널 시리즈 [파친코]를 연출했던 코고나다 감독의 신작 영화 <애프터 양>을 개봉 전 시사회로 미리 보았습니다.
한국계 미국인인 코고나다 감독은 [파친코]에 이어 이번 영화에서도 아마 스스로가 고민해 보았을 정체성과 가족의 문제를 다룹니다.
그 배경이 가까운 미래이고 그 소재가 안드로이드라는 점이 사뭇 생소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안드로이드의 기억으로 향하는 한 가족의 여정을 통해 감독은 결국 그 어떤 종과 성분(?)을 초월한 가족의 의미를 사색적으로 탐구합니다.
정적이고 고요한 부분이 많아 신경써서 들여다 보게 하고 골똘히 생각해 보게 하지만, 그럴 가치가 충분한 아름다운 영화입니다.
입양된 아이의 정체성 확립과 정서 함양 및 교육을 위해 안드로이드 형제자매를 구입하는 게 일상화된 가까운 미래.
제이크(콜린 파렐)와 키라(조디 터너-스미스) 부부는 입양한 중국계 딸 미카(말레아 엠마 찬드로위자야)를 위해
안드로이드 '양'(저스틴 H.민)을 구입했고, 양은 미카의 '오빠'로서 그동안 충실한 가족의 구성원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양이 잠자리에 들고는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지 않은 채 작동을 멈추는 상황이 발생하고,
그간 가족이 되어준 고마움과 미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제이크 부부는 양을 고칠 방법을 백방으로 찾습니다.
그러던 중 이웃을 통해 알게 된 수리 전문가로부터 양에게 특별한 기억 저장 장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더는 양과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를 상황에서, 가족은 저장 장치에 기록된 양의 기억을 탐험하기 시작합니다.
양과의 이별을 앞둔 가족의 마음은 아픈데, 양이 가족과 함께 하는 동안 그의 마음은 (그게 만약 있다면) 어땠을까요.
제이크네 가족과 양은 인연을 맺은 후로 길고 깊은 그들만의 역사를 그려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애프터 양>은 그들이 쌓아왔을 그 개인적인 역사를 일일이 거슬러 올라가 연대기 순으로 되짚지 않습니다.
영화가 양의 기억을 통해 가족이 지나온 나날들을 탐색하는 시각적 방식은 그래서 무척 새롭습니다.
점점이 흩어져 숲을 이룬 양의 기억들 사이를 누비다가 어느 한 기억 속 풍경으로 첨벙 뛰어들어가는 모습은,
마치 컴퓨터 하드디스크 속의 수많은 폴더들 사이를 VR 장치를 쓰고 들어가 본다면 이런 느낌일까 싶게 추상적이면서 구체적입니다.
스크린을 통해 바라보는 이 장면은 마치 관객 또한 양의 기억 속으로 뛰어든 듯해 기대 이상으로 놀라운 감흥을 주는데,
이런 경험 자체가 한편으로는 기억으로 맺은 타인과의 역사가 지니는 속성을 시각화한 것 같은 느낌도 줍니다.
시간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을 것만 같던 예상을 깨고 점점이 흩어져 있는, 서술되지 않고 관찰되는 장면들로 이루어진 양의 기억처럼,
가족을 포함하여 우리가 타인들과 맺은 모든 관계의 역사 또한 인과성과 상관없이 흩어진 조각들의 모임으로 이루어져 있는 게 아닐지.
여기서 나아가 <애프터 양>은 이러한 관계의 비선형적 속성을 곧 가족의 의미와도 결부시킵니다.
상당히 독특한 인상의 오프닝 크레딧에는, 정기적으로 열리는 듯한 비대면 가족 댄스 콘테스트 장면이 등장합니다.
제이크네 가족을 비롯한 여러 가족이 마치 조만간 아이돌 그룹 데뷔라도 할듯 칼군무를 구사하는데,
몇 안되는 유머러스한 장면으로 부담없이 즐겨도 좋겠지만 한편으로 그들이 생각하는 가족의 의미를 담은 장면으로도 느껴집니다.
세세한 동작 하나하나 맞춰야 끝까지 성공하는 댄스 콘테스트처럼 가족이 굴러가는 모습도 그래야만 할 것 같은 강박 혹은 간절함.
질서정연한 대열과 복사+붙여넣기한 듯한 움직임까지 갖춰야 생길 수 있는 게 가족의 유대같아 보이지만,
양의 머릿속에 흩뿌려진 기억을 탐험하면서 가족의 모양 또한 경계를 나눌 수 없는 비선형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인종도 국적도 심지어는 종도 상관없이, 서로가 공유하는 기억의 그물로 이루어지는 가족이라는 이름.
어떤 형태로든 방향이든 상대이든 나눌 수 있는 기억의 힘이 그 가족이라는 이름을 만든다는 것이 어느새 위로로 다가옵니다.
오롯한 사색 뿐 아니라 미쟝센에서도 공을 들인 연출이 특색인 코고나다 감독답게 <애프터 양>의 분위기 또한 인상적입니다.
근미래가 배경이고 안드로이드가 주요 소재로 등장하지만 모던하면서도 자연친화적인 이미지들을 통해 새로운 미래상을 구축하고,
현란한 그래픽 기술을 보여주지 않아도 센스 있는 연출로 진보한 미래의 세상을 무리없이 구현해 내죠.
자연 소재들이 쓰인 듯한 집 내부 인테리어와 인물들의 복장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개념을 떠나
아마도 감독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희망할 미래의 어떤 면을 재현하며 심리적인 안정감을 줍니다.
자동차 안에서 마치 옆에 있는 사람과 대화하듯 전화 통화하는 인물들의 모습도 그 자체만으로 미래의 이미지로 다가오기 충분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 걸맞게 배우들 또한 절제미와 일관성을 지닌 연기로 조화로운 호흡을 보여줍니다.
양의 기억 속 기록을 통해 가족의 역사를 침착하고도 지속적으로 탐구하는 제이크 역의 콜린 파렐과 키라 역의 조디 터너-스미스,
따뜻하지만 건조한 말투로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들에 대한 호기심을 끊임없이 드러내는 양 역의 저스틴 H.민,
인간과 안드로이드가 함께 하는 이 가족 형태에서 어쩌면 다음 세대에 자리할 가족의 의미를 가장 먼저 깨닫는 이일지도 모를
미카 역의 말레아 엠마 찬드로위자야까지, 능히 가족의 모습이라 납득할 수 있는 정갈한 앙상블을 보여주었습니다.
양은 제이크 가족을 사랑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근거는 그가 작동하면서 시간의 흐름을 따라 쌓아온 관계의 노선이 아니라,
매 순간마다 드넓은 기억의 장 곳곳에 남겨 온 추억들이 이루는 너른 벌판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중한 추억들은 꼭 타임라인을 좇고 순서를 따지고 들어가야 할 필요없이 언제 어디서든 방문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겠죠. 가족이란 이렇게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하고 영화는 이야기합니다.
자초지종과 인과 관계를 주저리주저리 설명하기보다 그저 고요히 바라보는 태도로 기억을 탐색하는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점점이 내려앉은 기억들이 선과 면을 이루며 만들어내는 가족의 풍경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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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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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보영상중에 댄스장면만 떼놓은 걸 봤다가, 깜짝 놀랬습니다.
담주에 볼건데 완전 기대중이에요. ㅎㅎㅎ
나는 누구인가? 보다는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를 보여주는 영화였던거 같네요.
찔끔찔끔 보여주다 엔딩에 가서 비로소 풀로 삽입된 곡 glide는 정말 멋진 마무리였던거 같습니다.
양의 기억을 탐험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양의 눈을 통해 보는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는 점도 재밌었고요.
오늘 같은 날은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을 볼 수밖에 없는거 같습니다 ㅎㅎ
다음주에 보러갈 예정인데 기대됩니다.
정식 개봉 되면 꼭 보려고 하는데, 어떤 작품일지
많이 기대하고 있습니다. 항상 좋은 리뷰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