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제 아제 바라아제 (1989) - 스포일러 있음.
강수연이 뇌출혈로 심정지까지 왔다는 뉴스를 읽었다.
강수연은 꼬마일 적에 아역으로 탑을 찍었다. 신드롬일 정도로 사랑을 독차지했던 것은 아니지만
건실하게 탑 정도? 그것도 아주 오래 말이다. 누가 이야기해도 이의 없었을 것이다. 강수연과 콤비로 똑같은 정도의
인기를 누렸던 아역배우가 윤유선이다. 강수연은 아역배우라고 해도 깜찍함으로 승부하는 귀염둥이 타입이 아니라
어른스럽고 착하며 심지 깊은 (좀 계산적인 듯도 보이는) 스타일이었다. 윤유선은 극강의 귀여움으로 인기를 얻는 타입이었고.
너무나 인기 있어서 저 인기가 성인배우로 이어지려나 했는데,
이 우려를 보기 좋게 깨부수고 로맨틱코메디 주연으로 성인배우로서 탑을 또 찍었다. 청춘스케치에 출연했던 몇년 동안은 신드롬이라 할 만했다. 청춘스케치라는 영화 자체가 별 걸작이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 영화계는 비참한 지경이었다. "우리나라 영화를 돈 주고 보나?" "뭔가 허술하고 허접한 것이 우리나라 영화지. 우리나라 영화는 우리가 보아주어야지" "우리 영화를 보려면, 마음을 비우고 좋은 장면 몇개 보는 것에 의의를 두겠다 하는 생각으로 보아야지"같은 분위기? 그러니까 이런 영화계 상황에서 풋풋하고 사랑스런 로맨틱코메디가 등장하자 인기가 확 몰린 것이다. 이 영화 자체는 신드롬이라 할 만했고 박중훈이나 강수연이나 신드롬적인 인기를 누렸다.
강수연은 이 인기에 안주하지 않고 부지런히 소처럼 영화를 찍었다. 원체 아역배우로서 탑의 지위에 있었다 보니
별로 신드롬적인 인기에 흔들리지 않고 제 중심을 지켰다. 그녀는 신드롬적인 인기를 오래 누리지 않았지만
건실하게 탑의 느낌으로 지속적인 인기를 얻었다. 강수연은 청춘스타로서 오래 머물면서 뽑을 것을 뽑아내자 하는
생각이 없었다. 대배우로 한단계 더 올라서는 수단으로 청춘스타의 지위를 영리하게 이용했다 정도 느낌이 든다.
씨받이와 아제아제바라아제 같은 임권택 감독과의 협업을 가지고 베니스국제영화제와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타면서 전국민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퀘퀘한 냄새를 풍기는 사글세방 이미지의 우리나라 영화에서
말로만 듣던 유명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다니! 지금 김연아 정도의 신드롬?
김연아와 다른 점은,
강수연은 사랑이라기보다 존경을 받았고 본인이 카리스마와 대배우로서의 자존감, 의지같은 것이 강했다.
강수연의 국제적 성공은 강수연만의 것이 아니다. 당시 서울올림픽 개최 이후 국제적으로 우리나라 위상이 높아지고 강수연의 국제적 성공은 이를 동력으로 이용했던 감이 있었다. 즉,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나라인데 배우가 의외로 연기를 잘 하네?" 이런 느낌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올림픽을 개최하고 요즘 떠오른다지? 여기에서 영화를 만들었어? 어디 한번 볼까?" 이런 느낌?
그리고 당시에는 올림픽 금메달같은 국제적 컴피티션 성공이 국위선양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강수연의 국제영화제 수상은, 배우로서 성공을 넘어서 국위선양을 엄청난 레벨로 해내는 국가적인 사건으로 간주되었다.
강수연이 아제아제바라아제를 찍을 때, 신문기사가 정기적으로 실려서 "임권택 감독과 강수연 두 대가가 모여서
찍는 영화가 이 정도 마쳤다. 이 두 대가들이 어떤 걸작을 보여줄까?"같은 보도를 하였다.
강수연은 이렇게 대배우를 넘어서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강수연이 베니스 국제영화제와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탄 것은, 훗날 다른 여배우들이 유수 영화제에서
상을 탄 것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다른 여배우들이야 어느 정도 성장한 우리나라 영화계를 바탕으로 해서 상을 탄 것이지만, 강수연은 퀘퀘한 냄새 나는 사글세방같은 우리나라 영화계를 극복하고 세계의 탑을 찍은 것이니까. 당시 강수연에 대한 국민들의 감격과 존경은 대단했다.
강수연이 밀려나기 시작한 것은,
한석규와 전도연으로 상징되는 좀더 모던하고 세련된 영화들이 등장하면서부터이다. 이 영화들은
강수연보다 젊은 세대들의 영화였다. 영화의 어법, 분위기, 연기스타일 등이 완전히 참신해지면서 강수연은
한참 나이에 원로의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여전히 존경은 했고 천외천의 대접을 받았다.
강수연은 비중 있는 조연으로 물러나느니 그냥 은퇴를 했다.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아역 때부터 지금까지 자기를 끊임없이 상승시키고 더 위로 올라가려고
전력질주해 온 삶이다. 지금은 강수연에 대해 많이 잊혀진 듯하다.
그렇다면 강수연은 미래에도 대배우로 남아있을까? 영화사적 위치야 굳건하겠지만, 그녀의 연기가
미래에도 동시대인들에게 주었던 똑같은 감동을 관객들에게 주기는 어렵지 않을까?
한석규와 전도연이 영화계에 등장하던 그 시점에 벌써 좀 낡은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으니 말이다.
이 영화 아제아제바라아제도 마찬가지다. 불교영화다. 오늘날에는 아득히 멀리 느껴지는 소재다.
하지만 당시에는 불교라는 것이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멀지 않았다. 탁발승이 목탁을 두드리며 들어와서
시주하십시오 하면 사람들이 쌀을 가져다가 바랑에 부어주던 시대다. 이 영화가 지금은 생활감을 잃었다는 것은
큰 타격이다.
왜 불교영화인가? 사실은 불교영화가 만들어진 것이, 해외를 겨냥해 만들어진 감이 있다. 보편적인 소재를 영화화하면 해외의 주목을 받지 못하니까 뭔가 특이하고 향토적인 소재로 나가자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강수연과 진영미가 주연을 맡았다. 그러니까 두 여승이 구도의 길에 나가는 십여년에 걸친 여정을 그린 것이다.
처음 그들은 한 절에 머무는 여승들이다. 강수연은 그 절의 스타 - 뛰어난 학식과 명석함을 자랑하는
젊은 진성스님이 부럽다. 뛰어난 외모의 강수연은 별다른 지식도 철학도 없다. 설상가상으로
강수연에게 반한 어떤 젊은 남자가 자꾸 그녀에게 찾아온다. 남자가 더 이상 어쩔 수 없을 정도로 절박하게 애원하니까, 강수연은 굉장히 고민하게 된다.
그 절의 노스님인 은선스님은 강수연더러 남자를 따라 하산하라고 한다. 불도를 닦는 것은 절 안에만 고독과 적막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서 평범한 생활을 하면서 그 안에서 도를 찾으라고 한다.
진성스님도 절을 떠난다. 그녀는 철저하게 엘리트적인 학승이다. 그녀는 사람 속으로 들어가려는 것이 아니라
혼자 떠돌며 구도여행을 한다. 그녀는 점점 더 고독과 고립을 추구하면서 불도를 닦는다.
영화는 강수연과 진성스님의 이후 삶을 번갈아가며 보여준다. 강수연은 못난 남편을 만나 고생이라는 고생은 다 하면서 강한 생활력으로 타인을 포용하는 삶을 산다. 진성스님은 붙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득도를 하기 위해 처절하게 고민한다. 둘 다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 대승불교와 소승불교 이야기다. 하지만 원작자나 감독이나 배우나 불교철학은 깊지 않은 듯해서 강수연이나 진성스님의 구도행각을 불교철학적 관점에서 깊이 있게 펼쳐내지 못한다. 그냥 "아, 둘 다 고생 많이 하네?" 정도? 이 부분이 피상적이고 간략한 것은 큰 단점이다. 불교영화인데 불교에 대해 이야기는 안하고
등장인물들인 강수연이나 진성스님의 인생역정을 그린 것이다.
십수년이 지나 강수연과 진성스님은 둘 다 절로 돌아온다. 노스님 은선스님은 열반에 들려 하는데,
자꾸 열반에 들기 전에 누군가를 기다린다. 한밤중이다.
애제자인 진성스님이 돌아와도 은선스님은 본 체 만 체하고 누군가 계속
기다린다. 열반에도 들지 못하고 말이다. 갑자기 은선스님이 기쁜 듯 문을 열어보라고 말한다.
어둠 속에 강수연이 쑥스러운듯 쭈뼛거리면서 인사를 한다. 자기가 들어가도 되겠냐는 듯.
은선스님이 기다렸던 사람은 물론 강수연이다. 삶에 지쳐 초라해진 그녀가 불도를 이루었던 것이다.
이 장면이 자못 감동적이다. 하지만 불교적 감동은 아니다.
차라리 이 영화는 로드무비다. 구도를 하기 위해 정처없이 방랑하는 진성스님 이야기는 로드무비의 전형이지만,
내적으로 치열하게 방랑하며 길을 찾는 강수연 이야기도 로드무비다. 두 길은 아주 오랜 세월이 흘러 한 지점에서
만난다. 바로 은선스님의 열반이다. 그들이 오래 전에 떠나면서 서로 헤어진 장소도 은선스님이었다.
그들은 출발점으로 회귀했던 것이다.
추천인 6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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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 못 본 영환데 꼭 봐야겠습니다.
김수연님 꼭 나으시길...
<아제 아제>랑 또다른 임권택 감독의 걸작 <만다라>도 보지는 않았지만 왠지 걸작의 향기가 나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