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운전사' 초간단 리뷰
1. 한국영화에서 근현대의 과거를 재현하는 일은 꽤 어렵다. 유럽처럼 오래된 건축물이 남아있는 것도 아니고 소품 몇 개로는 쉽사리 예전 그 느낌을 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실 터널을 지나 밝은 거리로 들어서는 첫 장면은 1980년이라고 보기에는 이질적일 수 있다. 그러다 몇 초 지나지 않아 '택시운전사'는 거짓말처럼 1980년의 서울 거리를 재현해낸다.
2. '택시운전사'의 시작은 대단히 낯이 익다. 서울에서 택시를 운전하는 김만섭(송강호)은 혼자서 어린 딸을 키우는 평범한 소시민이다. 그는 지나가다 시위현장을 볼 때도 "학생들이 공부를 할 생각을 해야지, 데모나 하고 말이야"라는 식으로 말을 한다. 영화 '변호인'에서 양우석 변호사의 초반부 모습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보여줄 이야기는 다분히 예측이 가능해진다. 김만섭이 변해가는 과정, 위르겐 힌츠페터(피터·토마스 크레취만)와 우정을 쌓아가는 과정 등이 이야기의 주를 이룰 것이다. 이 영화를 예상해내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3. 이 뻔해보이는, 예측 가능한, 많은 사람이 알고 있을 법한 이야기에 관객을 몰입시키는 것은 광주에 대한 디테일이다. 한국영화에서 '80년 5월의 광주'를 묘사하는 영화는 많았다. 1995년작 '꽃잎'도 있었고 2007년작 '화려한 휴가'도 그랬다. 광주가 전면에 드러나진 않았지만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에서 보여지는 광주도 처절했다. 확실히 말하자면 이 영화가 묘사하는 '그날 광주'의 디테일은 역대 어느 한국영화보다 생생하고 처참하다. 거리에서 군인들이 시민들을 무차별 폭행하는 장면이나 사살하는 장면, 광주MBC 화재, 광주적십자병원, 광주역 앞 등의 디테일은 여느 한국영화보다 생생하다. 사실 '택시운전사'는 이 디테일만으로도 제 역할을 다 한 셈이다.
4. 특히 사복조장(최귀화)을 중심으로 한 사복조의 존재는 관객으로 하여금 현장감을 한껏 살려준다. 이전 영화에서 묘사하는 광주는 군복을 입은 자들이 대놓고 쫓아오는 모습이었으나 사복조는 마치 닌자처럼 조용히 침투해 추격을 한다(물론 그래도 대충 눈치는 챈다). 사복조장을 연기하는 최귀화의 연기도 생생했을 뿐더러 붉은 빛이 뒤덮은 밤거리에서 추격씬은 단연 이 영화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여담이지만 실제로 광주의 밤거리에서 그런 추격은 있었을 것 같다.
5. '실제사건'이었는지 여부는 확인이 되지 않으나 이 영화에는 극적 장치로 활용된 부분도 다수 존재한다. 군인들이 총을 쏘는 장면에서 택시들이 뛰어들어 구하는 모습이나 후반부 카체이스는 다분히 '영화적'이라는 인상을 준다(만약 실제 사건이었다면,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 이러한 장면들은 말 그대로 '장치'로써 잘 활용되고 있다. 광주에서 변해버린 김만섭의 모습을 드러내거나 광주시민들의 절실함을 드러내기에, 앞서 언급한 두 장면은 대단히 효율적이다.
6. 같은 맥락에서 황태술(유해진)의 집에서 하루를 보내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천진난만한 청년 구재식(류준열)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나, 김만섭과 피터의 갈등이 해소되는 장면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피터가 갓김치를 먹고 "매워, 매워"하는 장면은 작위적인 설정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 상황에 이르는 과정은 자연스러웠다(적어도 "두유노우갓김치?"의 느낌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앞서 말한대로 갈등이 해소되는 장치로써 효율적으로 쓰였다.
7. '광주항쟁'에 대한 시나리오 공모전을 준비한 적이 있어서 자료를 읽었던 적이 있다(물론 시도조차 못한 이야기다). 기억에 남는 두 가지 상황은, 그날 계엄군이 철수하고 광주 시민들의 승전보가 울릴 즈음 공수부대는 실탄사격을 자행했다(5월 22일쯤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시민들 누구도 가리지 않고 항쟁에 손을 보탰다. '택시운전사'는 이 두가지 화두에 매우 충실한 영화다. 앞서 언급한대로 이 영화를 보면서 '그날 광주'의 디테일에 덜컥 겁을 먹고 시민들의 모습에 목이 메일 것이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광주 시민들의 모습은, 정말 그럴 것 같은 사람들의 모습이다.
8. 오래전 이정국 감독의 '편지'(박신양, 최진실 주연)를 볼 때 알게 된 사실: 신파를 만들때는 전반부 분위기가 대단히 밝고 화기애애해야 한다. 그래야 후반부의 신파가 더욱 부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대놓고 '신파'다. 분명 어느 관객은 "신파네"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그날의 광주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이것밖에 없다. 억울하게 자녀를 잃은 부모들의 곡소리가 도시 전체를 메웠다는게 그날의 풍경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려도 슬퍼질 수 밖에 없다. 그날의 광주 자체가 슬픔이고 상처인 것이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적어도 이 영화에서 '국뽕'은 우려하지 않아도 된다. 그건 보증한다.
9. 워낙 대배우들이 나온 만큼 연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워낙 차분하고 지적인 외모인 토마스 크레취만은 저널리스트의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애쓴다. 갓김치를 먹은 익살스런 표정이나 광주의 참상을 보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서도 침착한 가운데 감정을 드러낸다. 그러니깐 절제된 가운데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저널리스트에게 딱 기대할 수 있는 캐릭터다. 더 이상 설명할 것이 없는 배우인 송강호 역시 크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송강호의 전작에서 '정점'이 있었다면 딱 그 정도에 머물러있다. 그래도 이미 범접하기 힘든 선이긴 마찬가지다. 송강호가 내려놓은 빈틈은 다른 배우들의 앙상블로 채워진다. 이야기의 감초이자 눈물샘이 원천인 류준열, 소름돋는 감초였던 최귀화는 이 영화의 또 다른 재미가 된다.
10. 결론: '택시운전사'는 광주항쟁을 소재로 한 '상업영화'다. 다소 상투적일 수 있는 이야기에 '광주'의 짙은 디테일이 묻어나면서 극적인 효과가 살아난다. 아마 관객이 이 영화에 조금이라도 눈물지을 수 있다면, 그것은 광주를 잊지 않고 기억한 것과 같을 것이다. "반드시 보라"고 강요할 수는 없으며 그러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그날 광주의 모습을 깊게 관찰하고 싶다면 '택시운전사'는 충분히 좋은 영화가 될 수 있다.
추신) 아래 스포일러 주의
- 영화 내내 '박하사탕'을 떠올리며 "계엄군이 너무 악마처럼 보여지면 어떡하지? 그 병사들 중에도 '피해자'가 있는데"라고 우려하는 순간 엄태구가 등장한다. 대단히 중요한 캐릭터다.
- 실제 김사복(김만섭)씨도 참 야속한 사람이다. 저렇게 그리워 한 사람이라면 나타나 줄 법도 한데...
추천인 58
댓글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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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발력있어서 살았지
칸이 조금 가깝네요 ㅎ
감사히 잘 봤습니다
오늘 본 입장에서 공감 많이 가는 글이네요.
벌써 뭔가 감동이...
후기 잘 읽었습니다 :)
리뷰 잘 봤습니다.
한달 기다리기 힘들어지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