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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 개인적인 후기입니다

sonnybonnie
346 0 0

기대가 무색하게도 전투 장면만 나오면 급격하게 피로해지네요. 천영과 종려가 모포를 휘날리며 칼을 부딫히는 전투 장면도 현란한 카메라워크와 과한 슬로우 모션으로 힘만 주었을 뿐 마음에 전혀 내려앉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 버립니다.

 

이건 아마도 캐릭터의 전사가 충분히 다뤄지지 않아 일어난 문제겠죠. 실제로 2시간에 달하는 러닝타임 중 가장 흥미로웠던 건 초반 20여분, 그리고 간간히 나오는 천영과 종려의 이야기였습니다. 서로의 운명이 어떻게 얽히게 되었고, 오해가 두 사람을 어떻게 파멸로 몰고 가는지 그린 과정이 꽤나 드라마틱 하더군요. 그러나 그런 극적인 전개조차 캐릭터가 충분히 다듬어지지 않은 바람에 몇몇 장면에서 고개를 갸우뚱한 채로 극을 따라가게 됩니다.

 

천영은 신분에 대한 콤플렉스를 지닌 천민으로 세상을 향한 울분을 억누르고 살아가는 인물입니다. 그런 설정에 걸맞지 않게 전투 중에는 지나치게 재기발랄해요. 상대를 도발한다거나 농담을 하는 모든 장면이 어색했습니다. 마치 영화 [군도]에서 조윤(강동원)의 겉모습에 돌무치(하정우)의 성격을 이식한 것 같다고 할까요. 무엇보다 그가 7년 동안이나 의병에 들어가 왜구와 맞서 싸우는 이유를 영화는 전혀 말해주지 않습니다. 한 사회구조의 피해자가 도리어 자신을 수없이 좌절케 한 사회를 위해 싸우는 결심을 한 데에는 분명 어떤 계기가 있을 터인데, 그에 대한 어떤 설명도 없으니 캐릭터의 정체성이 흔들릴 수 밖에 없죠. 정확히 이때부터 영화는 천영과 함께 무너져 내립니다.

 

종려라는 캐릭터는 더욱 난해합니다. 어렸을 적부터 동고동락했던 친구인 천영을 단지 부하의 말 하나만 듣고 자신의 가족을 파탄낸 철전지 원수로 각인합니다.(부하조차 그 장면을 직접 본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 뒤로 살육에 미친 복수귀가 되어 백성들을 베어가르는데, 이 변화가 너무 갑작스러워 황당하기까지 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이때 종려가 천영에게 느껴왔던 자격지심 같은게 작용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문제는 영화에 나타나는 감정선이 매우 단순하고 그 깊이가 얕다는 거에요. 서로에게는 분노 말고는 이렇다할 감정 자체가 없어요. 두 사람의 빈약한 우정서사는 천영을 향한 종려의 일방적인 동정심에 기반하고 있고요. 이런 설정에 으레 클리셰처럼 따라붙는 계급과 능력에 대한 질투조차 두 사람 사이에선 전혀 묘사되지 않습니다. 천영을 향한 질투나 선망의 감정을 표현했더라면 종려의 변화가 훨씬 설득력있게 다가왔을 거란 아쉬움이 남네요. 

 

그 외의 캐릭터들도 잘 만들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영화는 왜란이라는 시대상을 다루니 무능한 지배층을 상징하는 선조를, 적으로 일본 장수를, 무신들만 나오니 의병장으로 사대부를, 남자만 있으니 여성 의병을 추가하는 식으로 극을 채워나갑니다.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선인이거나, 악인이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입체적인 면모는 찾아볼 수 조차 없으며 오직 기능적인 역할에만 충실하죠. 특히 선조는 중반부에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두 사람의 관계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고 영화 내내 찌질하고 한심한 말만 하다 퇴장합니다. 이렇게 비중이 많았어야 할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네요. (차승원 씨의 탁월한 연기에도 불구하고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캐릭터들을 소모시키면서 얻은 액션신은 훌륭한가? 저는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연출은 차치하고, 무엇보다 액션만을 위한 액션에서 느껴지는 공허함이 너무 큽니다. 적어도 이 영화에서 액션의 원동력은 두 인물 간의 갈등인데, 오해가 앙금으로 발전해나가는 과정을 설득시키는데 실패하니 싸움의 목적도 덩달아 휘발되어 버린다고 할까요. 액션의 주체인 인물이 제대로 잡혀있지 않으니 어떤 처절한 사투도 그냥 화려한 눈요기 정도로만 다가옵니다. 그 바람에 최후반부 세 명의 전투신은 거의 허공에 칼질을 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죠. 액션도 결국 인물과 이야기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네요.

 

여러모로 실망스러운 영화였습니다. 각본은 그냥저냥 괜찮는데, 박찬욱 감독의 명성치고는 많이 아쉽네요. 전작인 [동조자]와 [헤어질 결심]에서 보았던 경이로운 지점 같은 건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가장 아쉬운 건 연출이었어요. 주연 배우들은 다양한 감정을 얼굴에 녹여서 연기한 것 같긴 한데, 카메라가 그것들을 캐치하거나 캐치하더라도 서사 안으로 끌어들여 의미있게 사용하지는 못한 듯 하네요.

 

물론 배우들 연기만큼은 최고였습니다. 특히 김신록 배우나 차승원 배우는 빛이 나더군요. 오직 자신들의 역량만으로 납작한 캐릭터에 바람을 불어넣어 생생한 캐릭터로 살리는 걸 보고 최근 많은 감독들의 러브콜을 받는 이유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진선규 배우도 제 몫을 잘 해주었고요. 이제는 강동원보다는 박정민에 더 눈길이 간다는 점에서 세삼스럽지만 세대교체를 확연히 체감하는 그런 작품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결론 : 연출보다 배우들의 연기가 돋보이는 영화. 액션을 중시한다면 그냥저냥 괜찮지만 드라마를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비추천.

 

 

sonnybonn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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