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공포영화 <회로>(2001) 리뷰
구로사와 기요시의 <큐어>(1999)를 보고 오랫동안 식어있던 일본 영화에 대한 애정에 불이 붙었다. 그 후 김봉석 평론가님께서 소위 구로사와 기요시의 '절망 3부작'이라 불리는 <회로>(2001)와 <절규>(2006)를 추천해 주셨다. 그렇게 감상하게 된 <회로>. <큐어>의 짙은 세기말적 감성은 그대로다. <큐어>는 사이비, 최면 공포에 가깝다면, <회로>는 좀 더 귀신에 대한 이야기다. 물론 할리우드식 노골적 귀신 이야기는 아니다.
평범한 직장인 쿠도 미치(아소 구미코 분). 디스크를 작업하던 친구 다구치가 일주일째 연락이 되지 않아 그의 집을 찾아간다.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다구치. 결국 그녀 앞에서 자살을 한다. 그 후 그녀의 주변에 점점 이상한 일들이 생겨난다. 또 다른 친구도 이상한 행동을 보이고, 누군가는 실종된다.
평범한 대학생 카와시마 료스케(가토 하루히코). 인터넷이 연결되지도 않은 화면에서 "유령을 만나고 싶습니까"라는 메시지가 뜬다. 그후로 그의 주변에 이상한 일들이 생겨난다. 같은 대학에서 이상한 사이트를 연구하고 있는 카라사와 하루에(코유키)를 알게 되고, 이미 그녀의 주변 사람들도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인터넷을 매게로 알 수 없는 공포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덮치고, 대혼란에 빠진 거리에서 마침내 쿠도 미치와 카와시마 료스케는 서로 만나게 된다.
쿠도 미치라는 여성과 카와시마 료스케라는 남성. 서로 모르는 평범한 두 주인공의 이야기를 교차로 보여주다 후반부에 서로 만나게 되는 구조다. 이야기는 친절하지 않다. 정신없는 점프컷으로 끊기듯 흘러간다. 하지만 뚝뚝 끊기듯 연결되던 모뎀 전화 시절의 영화 분위기와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소리 없이 움직이는 화면. 점점 무언가에 홀리는 사람들. 나긋하게 귓속으로 속삭이는 목소리. 여자 귀신의 몸짓. 공포에 질린 얼굴. 잿빛의 그림자. 비디오테이프 느낌의 투박한 화면과 사운드. 일반인보다 더 일반인 같은 배우들은 사실감을 더하며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노력은 빛을 발한다. 결국 시청각을 잠식하고 정신 깊이 침투하여 온몸의 털이 쭈뼛 서게 만드는 소름 끼치는 공포를 완성시킨다.
당시 일본 사회에 만연히 퍼져있던 공허함과 불안감을 공포로 실감 나게 다뤄냈지만, 영화 속 공포가 아직도 강력하게 작용하는 것은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공허함과 불안감은 누구에게나 빼놓을 수 없는 익숙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불규칙적으로 찾아왔다가 사라졌다가를 반복할 뿐이다. 세상이 획기적으로 달라질 리는 없을 것이며, 후퇴와 전진을 반복하며 아주 느린 속도로 나아갈 뿐이다. 공허함과 불안감. 두 단어의 어감이 세 보일지 몰라도 이제 우리에게 평범한 감정이 되어버렸음을 인정해야 한다. <회로>가 아직까지도 강력하게 무서운 이유이다.
지난 몇 년간 잘 정돈된 매끈한 공포영화를 만나왔던 나에게 다른 차원의 공포영화가 아닌 공포 그 자체를 보여주었다. 잔상에 남는 장면들이 많고, 정신이 뒤흔들릴 정도로 무섭다. <회로>는 정신으로 무서운 것을 경험하게 만든다. 점프 스케어, 잔인한 고어 신 등 단순히 눈과 귀로 무서운 것은 더 이상 무서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섭다.
구로사와 기요시만큼 스크린과 현실의 공포 간극을 좁힐 수 있는 감독은 없을 것이다. 특별한 동시에 유일한 재능이다. 2006년 <회로>를 할리우드에서 <펄스>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했다고 한다. 용기가 가상할 따름이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공포영화는 구로사와 기요시만이 할 수 있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다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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