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로 보는 '반지 원정대'의 원작 설정들
<반지의 제왕> 실사영화 시리즈가 개봉 20년이 지난 지금은 판타지라는 거대한 장르에서 원작소설 3부작 못지 않은, 어쩌면 그 이상의 존재감과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죠.
하지만 흥미진진한 상업영화로 매끈하게 뽑기 위해 원작의 중요 인물과 설정을 생략하거나 바꿔버려서, 개봉 당시엔 원작을 줄줄이 꿰고 있는 전세계의 톨킨 덕후들에게 볼멘소리를 듣기도 했습니다. 자타공인 톨키니스트인 '성덕' 피터 잭슨이 연출했는데도요.
이제는 많은 분들이 아실 것 같은 설정들이지만 제가 한번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ㅎㅎ
프로도
나이가 50살 정도로, 호빗 4인방 중 단연 나이가 많은 어른입니다. 물론 호빗이 현생 인류보다 수명이 길어 33살을 성년의 기준으로 치는걸 감안했을 때, 우리에게 와닿는 체감상? 나이는 30대 초중반 정도 될 겁니다.
또한 1부 영화에서는 빌보가 사라진 생일 잔치날에 반지를 넘겨받은지 얼마 안돼서 간달프가 재방문하여 반지의 정체를 알게 되고 길을 떠나는 걸로 나옵니다. 반면 원작에서는 생일잔치 이후 20년 가까이 혼자 반지를 보관하고 있다가 간달프를 다시 만나 자초지종을 듣고 길을 떠나죠.
한편 촬영 당시 20살이었던 일라이저 우드의 캐스팅은 적절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프로도는 성년이 되던 해에 빌보로부터 반지를 받았고, 반지가 소유자의 노화를 멈추는 효과가 있음을 감안하면 이제 막 성년이 된 듯한 프로도의 외모는 이질감이 들지언정 일단 설정상 들어맞긴 합니다.
배긴스 집안에 대해 잠깐 얘기를 하자면, 빌보가 <호빗>에서 훌쩍 여행을 떠났다가 어마어마한 보물을 갖고 돌아오기 이전부터 명망있고 뼈대 깊은 역사의 명문가였다고 합니다. 샤이어에서 제일 가는 농토를 가지고 있었다는...
프로도는 그런 귀한 집 자식... 오늘날로 치면 부유한 지역 유지의 상속자였고 (ㅋㅋ) 이웃들로부터 괴팍하다는 소리를 들었던 빌보와 달리 성격도 원만해서 인망이 높았습니다.
샘 와이즈 갬지
프로도를 꼬박꼬박 '나리'라고 부르는 충직한 정원사입니다. 영화에선 어쩌다 우연히 간달프와 프로도의 대화를 엿듣다 들켜서 얼떨결에 따라나선 걸로 나오지만, 원작에서는 이미 프로도와 간달프 사이의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몇차례 스파이질을 하던 와중에 간달프에게 들킨 거라고 고백합니다.
나이는 영화에선 동년배로, 아니 오히려 프로도보다 나이가 좀 많아보이지만 원작 기준 프로도보다 10살 이상 어립니다.
여담으로 원작 말미에 (영화에서는 생략된) '샤이어 전투' 이후 샤이어의 시장이 되어 폐허가 된 샤이어를 훌륭하게 재건합니다. 그 이후로도 몇번이나 시장을 연속으로 더 해먹다가 말년에는 먼저 건너간 프로도를 따라 발리노르로 떠났다고 합니다.
1부의 초반 위기들
위에서 프로도가 반지를 받고도 20년 가까이 한가롭게 지냈다는 설정을, 영화에선 초반의 속도감과 위기감을 위해 생략했죠.
이처럼 영화로 먼저 접한 사람들이 원작 1부를 보면 상당히 느긋하고 태평한 편입니다. 심지어 프로도는 간달프한테서 "그거 절대반지임" 이 소리를 듣고도 한동안 밍기적거리다가 느지막히 길을 떠납니다.
그리고 호빗들이 길을 떠난 후 원정대가 결성되는 리븐델에 도착하기 전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이것들이 사실 반지나 사우론과는 별 상관없는 상황이라 역시 피터 잭슨이 큰맘 먹고 전부 잘랐습니다. 거칠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묵은숲(Old Forrest) : 호빗들이 경계하던 샤이어 근방의 울창한 원시림입니다. 몇몇 나무들은 2부에 나오는 엔트처럼은 아니지만 나름 의지를 갖고 살아있어서 지나가는 사람을 공격하기도 합니다. 호빗 4인방이 나즈굴에게 쫓기다 숲으로 들어왔다가 버드나무 영감한테 공격받고 죽다 살았습니다.
2) 톰 봄바딜 : 묵은 숲에서 호빗들을 위기에서 구해준 정체불명의 발랄한 노인입니다. 스스로를 묵은숲의 주인으로 자처하고 세상 어떤 것보다 오래 살았다고 자부하며, 심지어 절대반지마저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실없이 갖고 노는 인물입니다.
나중에 리븐델에서 열린 회의에서 간달프와 엘론드도 봄바딜을 언급하는데, 그는 세상일에 관심이 없으며 사우론에게 어느 정도는 저항할 수 있겠지만 오래 버틸 수는 없다고 합니다.
3) 고분 악령 : 톰 봄바딜의 집에서 쉬다가 다시 길을 떠난 호빗들이 이번엔 근처의 고분에 갇히고 고대 왕들의 악령에 사로잡혀서 정신을 잃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톰 봄바딜이 와서 호빗들을 꺼내주죠. 프로도가 빌보한테서 물려받는 검 '스팅'을 제외하면, 호빗들이 시리즈 동안 쓰는 호신용 검은 다 여기서 얻게 됩니다.
반지와는 연관성이 떨어지는 이 모든 내용들을 쳐내고, 가장 직접적인 위협 요소인 나즈굴에게만 초점을 맞춰 그들을 인상적으로 묘사한 것은 신의 한 수라고 생각합니다. 영화에 저런 것들을 다 넣었으면 최소한 40분 정도의 분량은 잡아먹었을 테고, 한창 끌어올리던 위기감도 팍 죽어서 이야기가 느슨해지고 집중도도 흐트러졌을 거예요.
글로르핀델 -> 아르웬
프로도가 나즈굴의 검에 찔려서 생사를 넘나든 것은 동일하지만, 프로도를 들쳐메고 리븐델로 달려간 인물은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글로르핀델'이라는 요정 군주인데, 아마 연차로 따지면 엘론드보다도 훨씬 선대일겁니다. (얼마나 오래 됐는지는 '실마릴리온' 내용이 잘 기억이 안나서...)
강한 권능의 요정 군주답게 나즈굴을 패기있게 쫓아버리기도 하고, 리븐델에서 열린 회의에서도 엘론드, 간달프와 동급의 상석에 앉아서 발언도 하는 등 비중이 꽤 있는 캐릭터였죠. 반지의 제왕 이전에는 나즈굴의 두목인 마술사왕을 패퇴시킨 업적도 있었구요.
하지만 프로도를 구출하고 나즈굴을 쓸어버리는 활약상은 아르웬에게로... 소설에 비중있는 여자 캐릭터가 워낙 드물어서 나름대로 홍일점에게 인상 깊은 장면을 만들어주려고 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튼 글로르핀델의 삭제는 아마 원작 팬들이 영화 보면서 통탄스러워 한 부분이 아닐까 하네요.
아라곤
캐릭터가 크게 바뀌었고, 결론적으로는 많이 너프되었습니다 ㅋㅋㅠ
영화에서도 강한 정신력에 경험치 만렙의 리더로서의 면모가 돋보이지만, 한편으로 조상인 이실두르의 실책으로 반지가 파괴되지 못한 것을 한탄하고 자기 자신까지 의심하는 등 고뇌하는 인물상입니다. 싸움도 잘하긴 하지만 압도적이지는 않은 것 같죠.
반면 원작은 그냥 아라곤이 가운데땅의 인간들 중 최강이며, 엘론드나 간달프, 사루만, 사우론 같은 초월적인 존재가 아닌 이상 상대할 자가 없다고 단언합니다. 옛날 영웅 설화처럼 시종일관 준비된 왕, 무결점의 영웅으로 묘사되며, 갈등이나 고뇌 따위는 없이 미나스 티리스로 돌아가 곤도르의 왕이 될 날을 꿈꾸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영화에 비하면 말도 상당히 많은 편이에요ㅋㅋ 자기가 겪은 경험이나 읽어본 옛날 책 등을 소재 삼아 호빗들에게 틈틈이 썰풀이를 해줍니다.
이 또한 톨키니스트들이 부정적으로 평가한 대목이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탁월한 각색이라고 생각합니다. 무결점이었던 아라곤을 치열하게 갈등하며 성장하는 영웅으로 바꿈으로써, 3부의 '왕의 귀환'이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고 벅찬 감동을 줍니다.
이외에 사소한 것들
카라드라스: 원정대가 처음 맞이한 난관이죠. 영화에선 사루만이 마법으로 눈보라와 천둥번개를 일으켜 원정대의 진로를 방해하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원작에서는 그냥 "카라드라스의 심술"이라며 자연을 의인화하는 걸로 넘어갔습니다.
모리아행: 영화에서는 김리가 모리아로 가자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간달프가 몹시 꺼려하지만, 원작에서는 간달프가 모리아 행을 결정하고 아라곤이 회의적으로 반응합니다.
이거 외에도 더 있을텐데, 원작을 잘 기억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댓글로 달아주세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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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그와중에 카라드라스 사진에서 깨알같이 혼자 눈 위를 걷고 있는 레골라스^^
글로르핀델은 어라 크레딧에 이름 정돈 있었지 않나?싶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길갈라드였군요; 말씀하신 대로 원작 재현도보다 영화적 흐름을 우선한 피터 잭슨의 선택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톰 봄바딜 역시 상징하는 바가 있는 캐릭터지만 아마 영화에 나왔으면 아주 겉돌았을 듯 하고요. 사실 전 톰 봄바딜이 삭제된 건 딱히 아쉽지 않았는데 '그래도 금딸기 아가씨는 보고 싶었는데...'정도 생각은 잠깐 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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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두개의 탑이랑 왕의귀환도 부탁드려도 될까요?
쓰는데 꽤 오래 걸렸는데ㅎㅎ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ㅠ
2,3부에 대한건 극장에 걸린 후 리뷰가 익무에도 충분히 올라온 후에 구상해보려구요. 일단 저도 다시 봐야 할것 같고...
그리구요, 분명 간달프 지팡이 사루만에게 뺏기고 몸만 겨우 탈출한 거 아니었어요? 확장판에서도 지팡이는 다시 갖고 계시던데, 엘프 동네에서 새로 장만하셨나? 그렇게 생각하면 되겠죠?ㅎ
본문에도 언급하셨지만 샤이어 전투가 생략된 것도 그 때문이고,
파라미르도 원작과는 달리 인간적인 약점에 흔들리는 인물로 그려졌던 것 같고...
아라곤 각색을 잘했다고 생각하는게 반지원정대에서 고뇌하는 인물상을 만들어준 덕에 후반부에서는 그의 결심이 더 극적으로 느껴져요.
이번 리뉴얼된 소설 정발이 사건사고로 휘청대고 있어서 아쉬운부분입니다ㅠㅠ 보고싶었거든요
그런데 말씀처럼 외려 영화상으로는 성장의 모습이 보여지게 되니
잘 한 것 같습니다.
드라마에서는 상위 인류(High Men)_두네다인의 참된 모습이 나오지 않을까 합니다.
- 아르웬은 원작에서 거의 끝에 나오는데, 리브 타일러의 미모라면 처음부터 나오는게 좋은 선택이었죠.
모든 영역에서 엘프족들의 영향을 발휘하는 모습으로 나와도 좋을, 그런 각색이었습니다. ㅎㅎㅎ
- 두개의 탑에서 다이어울프를 탄 오크족과의 전투씬은 원작에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이 전투씬은 박진감 넘치고 멋있었습니다.
그래서 곤도르의 힘과 위상도 많이 너프되고... ㅋㅋ
전체적으로 각색을 참 잘한 거 같아요.. 특히 아라곤은 원작대로면 좀 덜 매력적이었을 거 같거든요ㅎㅎ
당연히 덜어낼 장면이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원작의 수 많은 노래들은 어땠을까 하긴 했어요ㅎㅎ
호빗에 나오는 타우리엘 입니다... 원작엔 없는 캐릭터이고...
없을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꺼에요... 추측이지만 ^^ ; 원래 타우리엘은 원작에 없습니다.
반지 책 읽은지가 꽤 됐는데 덕분에 기억이 새로워지네요.^^
안그래도 여성 캐릭터 비중이 좀 적은 편인데.. 물론 후반부에 에오윈이 있긴 하지만...
아르웬 띄워준 건 괜찮은 각색이라 생각해요.
원래 두개의 탑에도 나오게 해주려 했는데.. 그건 오버라서 자제한 건 다행이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