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기이 기사부로가 말하는 산다는 것과 만드는 것
스기이 기사부로의 생애와 애니메이션에 대한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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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기이 기사부로 감독의 8년의 방랑생활과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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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기이 기사부로가 말하는 감독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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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만들고 싶은 영화
나에게는 아직 만들고 싶은 기획이 몇 개 있다. 그 중 하나가 에도시대 우에다 아키나리에 의한 괴이소설집 <우게쓰 이야기>의 한 편인 <뱀 여인의 음욕>의 영화화이다. 이전에, 기획을 요구받아 이 <우게쓰 이야기>를 제출한 적이 있다. 그런데 어떤 경위인지 출자자들의 회의를 거쳐 다시 나에게 돌아왔을 때는 전혀 다른 기획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것이 <겐지모노가타리>(1987년)이다. 그래서 벌써 25년 씩이나 감독하고 싶어서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이다.
<뱀 여인의 음욕>은 남자가 비오는 날 만난 여자와 만남을 거듭하는 동안 결혼하게 되는데, 그 여자가 괴물이라는 것을 알고 남자는 도망쳤지만, 더욱 따라다닌다. 최종적으로는 그 괴물은 뱀의 모습이 되어, 중에 의해 봉해진다는 이야기이다. 나는 젊었을 때 이 이야기를 읽고 계속 의문을 느끼고 있었다. 육체관계를 맺고 살림까지 차리게 될 정도로 좋아하는 여자가 괴물이었다고 해서 그 여자를 중에게 부탁해서 퇴치해 버린다는 이야기는 재미도 없고 아무 것도 없다.
나는 이 이야기를 순애 이야기로 만들 수 없을까 생각하고 있다. 미야자와 겐지의 작품을 애니메이션화 할 때도 생각했지만, 고전이라고 불리는 원작의 경우는 그 핵심 부분과 현대인이 안고 있는 문제를 제대로 연결시켜, 현대에 통하는 이야기로 만들지 않으면 관객에게 전해지는 영화가 되지 않는다. <은하철도의 밤> 때는 '인류가 달의 흙을 밟았다는 현실이 있는 한, 생명관은 바뀌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현대의 생명관으로 그린다'는 식으로 나는 그것을 스태프에게 말했다.
<구스코부도리의 전기(부도리의 꿈)>에서는 현대야말로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재검토하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는 관점에서 시작했다. <우게쓰 이야기>의 경우는 민족이나 인종의 대립이나 차별이 현대인에게 하나의 테마가 아닐까 생각한 것이 발단이다. 그것을 그리기 위해 나는 순애 이야기라는 구조를 채택하는 것은 어떨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과 인간을 구별하는 것이 정말 있는 것인가. 확실히 민족이 다르면 여러 가지 다르다.
종교가 다르면 가치관도 다르다. 하지만, 그건 정말로 넘을 수 없는 것인가. 내가 생각하는 세계에서는, 뱀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왕래하는 공간이 그려진다. 즉 인간과 뱀을 사이에 두고 다양한 것을 넘으려는 시도를 그린다는 것이다. <우게쓰 이야기>는 괴이소설로 알려져 있지만, 그 요소로써 사람의 마음의 나약함이라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그렇다면 현대에 만들어지는 <우게쓰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계속 '삶과 죽음'을 테마로 만들어 왔다
<우게쓰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으로 한다. 이런 기획을 내가 실현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도, 애니메이션이 정서를 그릴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으로 정서를 그리고 싶다. 그것이 내가 애니메이션을 평생의 일로 선택한 이유였고, 어떻게 하면 그것을 할 수 있게 되는가가 가장 큰 주제이기도 했다. 그리고 아다치 미츠루 선생님의 세계를 접함으로써, 나는 그 벽을 통과하는 힌트를 얻었다. 그래서 감독한 <나인> <터치> <은하철도의 밤>의 반응은, 그 후의 나를 애니메이션 세계에 머물게 했다.
그리고 꽤 많은 작품을 감독했다. 그 대부분은 원작이 있는 것이다. 원작을 감독할 때, 나는 우선 원작의 핵심 부분은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것을 소중하 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동시에, 그 표현은 원작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애니메이션용으로 번역해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애니메이션화를 위해 원작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엔터테인먼트로서 성립시키기 위해, 원작을 현대 관객의 마음에 닿도록 해석할 필요가 있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일까, 내 필모그래피를 돌이켜보면, 스스로 의식한 것은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비슷한 테마를 다룬 작품이 진열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도로로>를 시작으로, <은하철도의 밤> <터치> <겐지모노가타리> <양지의 나무> <폭풍우 치는 밤에>로 이어지는 일련의 작품이다. 이들 작품은 접근방식은 다르지만, 모두 삶과 죽음이 테마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삶과 죽음의 이야기가 근본적인 부분에서 정서와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의 사생관은 매우 단순한데, 인간은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한다. 의식이 없어진 이상, 거기에 있는 것은 무(無)뿐. 죽어버리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사람의 죽음을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그것이 죽음을 말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영화라면, 죽음이라는 것을 이야기로 그릴 수 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는, 종교도 철학도 될 수 있는 매우 무거운 소재이다. 하지만 그것을 부드러운 화법으로, 애니메이션으로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넓은 의미로 훌륭한 엔터테인먼트가 될 것이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정서를 통해 그리고자 하면, 삶이란 무엇인가를 그리게 된다. 예를 들면 <터치>. <터치>는 TV방송이 매우 인기있었기 때문에, 병행해서 극장판도 만들게 되었다. 원작은 아직 완결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에피소드의 양이 많다. 그래서 반대로 영화에서는 오리지널 에피소드를 만들어, 원작의 에센스를 응축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영화 <터치 등번호 없는 에이스>는 고등학교 입학부터 타츠야와 카즈야와 미나미의 나날을 순서대로 따라가며, 마지막 지구 예선 결승을 클라이맥스로 만들었다. 거기서 카즈야와, 카즈야의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에 오르는 타츠야의 모습을 그려 <터치>의 드라마를 응축시켰다.
<터치 등번호 없는 에이스>, 1986년 개봉. 인기 TV시리즈의 영화화. 재편집이 아닌 영화용 완전 신작으로, 카즈야와 타츠야와 미나미가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그 여름에 카즈야가 사고로 죽을 때까지를 그린다. 이 작품이 히트했기 때문에 <터치2 이별의 선물>(1986년), <터치3 네가 지나간 후에>(1987년)이 제작되었다.
산다는 것은 죽은 인간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하다. 카즈야의 등번호를 짊어지고 카즈야인 척 투수가 되는 타츠야의 모습은, 그런 사는 것의 본질에도 닿고 있다. 이것은 <은하철도의 밤>에서도 마찬가지다. 캄파넬라와 함께 환상의 은하를 여행하다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 조반니. 홀어머니가 기다리는 자택으로 밤길을 걸어가는 조반니는, 앞으로 캄파넬라와의 환상적인 여행의 기억과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 질문을 받고 있다.
하지만, 죽은 인간의 마음을 받아준다고 해도 특별히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타츠야라면 마운드에서 공을 던질 것이고, 조반니는 아마 식자공을 하면서 앞으로의 긴 나날을 보내갈 것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을 보내면서도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산다는 것을 폭력적인 위치에 두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비에도 지지 않고>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은하철도의 밤> <구스코부도리의 전기(부도리의 꿈)>을 감독했기 때문에 미야자와 겐지의 사생관과는 깊이 마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구스코부도리의 전기(부도리의 꿈).이 그리고 있는 자기희생이라는 것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고민한 것에 대해서는 제1장에서 쓴 대로다. 그리고 자기희생이라는 점에서 말한다면, <구스코부도리의 전기(부도리의 꿈)>에서 인용한 시 <비에도 지지 않고>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원래 <비에도 지지 않고>는 미야자와 겐지가 신앙한 '법화경'의 상불경보살의 정신(자신이 불법의 적에게 비방받아 박해를 받아도 반격하지 않는다)을 담은 시라고 한다. 게다가 멸사(滅私)의 사상을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전시 중에는 수련교과서에 게재된 적도 있다. 그럼 지금 그것을 어떻게 읽는가.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에도 여름 더위에도 지지 않는
건강한 몸을 가지고
욕심은 없고
절대로 화내지 않고
언제나 조용히 웃고 있는
하루에 현미 네 홉과
된장과 야채 조금을 먹고
여러 가지 일에 자신을 계산에 넣지 않고
잘 보고 듣고 이해하고
그리고 잊지 않고
들판의 소나무 숲 그늘에
조그마한 이엉 지붕 오두막에 살며
동쪽에 병든 아이가 있으면
가서 간호를 해 주고
서쪽에 지친 어머니가 있으면
가서 볏단을 져 주고
남쪽에 죽어가는 사람이 있으면
가서 두려워하지 말라 달래고
북쪽에 싸움이나 소송이 있으면
시시할 뿐이니 그만두라고 말리고
가물 때에는 눈물을 흘리고
찬 여름에는 허둥지둥 걸으며
모두에게 얼간이라 불리고
칭찬받지 못하고
근심거리도 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나는 되고 싶네
이 시는 마지막에 "그런 사람이/나는 되고 싶네"로 마무리한다. 그럼 "그런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시에서 "건강한 몸을 가지고"나 "절대로 화내지 않고" 등 구체적인 행동의 예는 다양하게 들려주었다. 그러나 제삼자로부터의 평가로 언급되고 있는 것은 유일하게 "얼간이~"뿐이다. 만약 이 시에 쓰여진 것을 전부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욕심은 없고" "여러 가지 일에 자신을 계산에 넣지 않고"니까 분명 성인처럼 존경받을 것이다.
하지만 겐지는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닐 것이다. "얼간이라 불리고"에는 자신의 시선을 한없이 낮추고, 대자연의 변동(가물 때나 찬 여름) 속에서 미야자와 겐지가 동화의 등장인물로 그린 자들처럼 살고 싶다는 마음이 그려져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얼간이'라고 불리게 되었을 때, 처음으로 "욕심은 없고" "절대로 화내지 않고"라는 일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되어, 다양한 사람들의 고생에도 자연스럽게 다가가게 된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미야자와 겐지는 여기서 멸사의 끝인 성인을 상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에 책상다리를 하지 않는, 시선이 낮은 만큼 생명의 본질에 가까운 존재를 이상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비에도 지지 않고>를 읽고 그럴 생각으로 <구스코부도리의 전기(부도리의 꿈)>에 도입했다. 그것은 물론 부도리가 어떤 결단을 내리고, 어떻게 되었는지를 영화 속에서 그릴 때의 핵심이 되기도 한다.
<양지의 나무>에 담은 생각
사생관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양지의 나무>도 언급해야 할 것이다. 데즈카 오사무 선생님이 에도 막부 말기의 격동기를 그린 원작을 내가 애니메이션화한 작품이다. 내 사생관이 잘 나타난 작품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양지의 나무>, 2000년 방송. 데즈카 오사무의 동명 원작의 애니메이션화. 코이시카와에 종두소를 창설하고, 데즈카 오사무의 증조부이기도 한 데즈카 료안과, 정의감이 강하고 직정형인 하급무사 이부야 만지로의 교류를 통해 에도 막부 말기의 일본을 그려낸다.
<양지의 나무>에는 2명의 주인공이 있다. 하급 무사인 이부야 만지로와 의사인 데즈카 료안(훗날 료센)이다. 료안은 데즈카 선생님의 증조할아버지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나는 이 두 사람을, 일본 열도에 살고 있는 일본인의 두 전형, 야요이형과 조몬형으로 해석했다. 이 야요이・조몬이라는 것은 하나의 비유로서 이해했으면 좋겠다만, 질서를 지키고 스퀘어한 생각을 하는 것이 야요이적이고 융통무애하고 퍼지한 것이 조몬형이라는 것과 같은 대략적인 구분 방식이다.
만지로는 무사도를 스스로의 사는 길로 정하고, 쓰러져가는 막부와 운명을 함께 하는 남자. 그에 반해, 일에 열심이긴 하지만 여자를 좋아하며 사상이나 주장이 굳지 않은 것이 료안이다. 이 대조적인 두 사람의 기묘한 우정을 날실로, 두 사람이 체험하는 막부 말기라는 시대를 통해 역사란 무엇인가를 그리려는 것이 나의 구상이었다. 그것을 위해 몇 가지 원작과 바꾼 부분이 있다. 그 중에서도 큰 변경점은 <양지의 나무>라는 제목으로도 되어있는 나무를 벚꽃에서 녹나무로 바꾼 것이다. 원작에서는 미토 번의 학자 후지타 토코의 코시이카와 저택 내에 벚꽃 노목이 서 있다는 설정이다.
하지만 나는 이 벚꽃을 일찌감치 쓰러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작품을 상징하는 <양지의 나무>를 새롭게, 에도를 바라보는 언덕 위에 서 있는 녹나무로 만들었다. 둘 다 에도 250년의 역사를 바라봤다는 설정이지만, 그 의미는 크게 다르다. 만지로는 막부의 개혁을 지망하고, 몰락해가는 막부에 충성을 다하는 캐릭터다. 마지막에는 새 정부와 싸우기 위해 창의대(쇼기타이)에 참가한다. 원작에서는 벚꽃의 노목은 에도막부의 상징이기 때문에 만지로의 마지막 싸움과 함께 노목은 쓰러진다.
그러나 이런 벚꽃 노목의 사용법이라면, 이때의 만지로가 태평양 전쟁 말기에 나라를 위해서라며 목숨을 잃은 젊은이들과 겹쳐서 보여버릴 수도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죽어간 젊은이와 막부 말기에 우에노로 향해 순사를 결심한 만지로는 죽음으로 향하는 의미가 다르다. 거기를 혼동해 버리면 제2차 세계대전의 젊은이도 불쌍하고, 만지로에게도 면목이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벚꽃이 아니라 녹나무로 한 것이다. 한편, 데즈카 료안(료센)은 메이지 정부 군대의 군의관이 되어, 그 종군 중에 '최근에는 옛날 만지로 같은 남자가 줄었구나' 하고 회상한다.
원작의 에피소드는 거기서 끝나는데, 나는 이 두 사람의 이야기 뒤에 애니메이션 오리지널 엔딩을 붙이려고 생각했다. 그림콘티도 그리고 레이아웃까지 진행했지만, 예산의 사정으로 마지막 순간에 영상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애니메이션 오리지널 엔딩에서 무엇을 그릴 생각이었는가 하면, 두 사람과 관련된 여자들의 그 후의 모습이다. 만지로도 료안도, 관련된 여자는 살아남았다. 예를 들어 료안과 친했던 오콘은 시나가와에 요정을 열었다.
시대 속에 사라져 간 남자들과 대조적인, 역사를 맡아가는 여자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던 것이다. 사람은 죽으면 무(無)다. 하지만 <터치>나 <은하철도의 밤>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살아있는 인간은 그래도 죽은 사람의 마음을 맡아서 살아간다. 그러한 개인의 마음의 연쇄가 계승되어 가는 것으로 역사가 완성되어 간다. <양지의 나무>는 역사물이다. 그렇다면 만지로나 료안의 마음을 누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그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내가 어린 마음에 데즈카 선생님의 만화를 특별히 느낀 것은 그 영화다움보다도, 무엇보다 거기서 '죽음과 삶'이 다루어져 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밀림의 왕자 레오>. 마지막에서 전원이 죽어 버린다. 어떻게 어린이용 만화인데 저런 마지막이 있을 수 있을까. 혹은 <불새>. 많은 사람들이 불로불사의 근원인 불새의 생혈을 구하다가 죽어간다. 무자비하다고 할 수 있는 대량의 죽음이 그려지기도 한다. 하지만, 데즈카 선생님은 죽음을 미화해서 그리려고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죽음을 이용해서 삶을 더 잘 바라보려고 한 것이다.
어렸을 때 데즈카 만화를 만나, 20대에 '아톰의 사상'이라는 세례를 받았다. 이 만남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과 같은 나의 삶의 방식이나 가치관을 찾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도 나는 역시 데즈카 선생님의 제자인 것이다. 데즈카 선생님의 일을 통해 받아들인 것을, 지금도 나름대로의 표현으로 형상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생명에 대한 상상력을 가지고
죽음을 경유함으로써 삶을 되돌아본다. 그런 이야기를 그리려면 당연히 생명에 대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2011년부터 원자력 발전을 둘러싸고 계속되는, 도쿄전력과 일본정부의 어처구니 없을 정도의 미적지근한 태도는, 생명에 대한 상상력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삼십여 년 전, 광고대리점을 통해 도쿄전력의 원전 PR 영화를 만들어 주지 않겠냐는 타진이 있었다. 전력 수요를 충족시키려면 원전이 필요하다는 스토리로 제작해 달라고 했다.
나는 그보다 더 전에, 원전에 대한 불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원자력이라는 취급을 잘못하면 대참사가 나는 기술임에도 불구하고, 완성된 원전에서는 학자를 멀리하고 관리・운영을 맡는 것은 기술자뿐이다. 기술자는 매뉴얼로 대응은 할 수 있지만, 상정을 넘어선 사태가 닥쳤을 때 원자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정・연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전은 기술자로만 운영되고 있다. 그런 현상은 매우 위험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게다가 안전대책에 할애하는 금액도 큰 액수가 아니다.
그래서 영화 의뢰가 있었을 때 나는 말했다. "PR의 취지는 압니다. 하지만, 안전대책은 도대에 어떻게 되어 있는 건가요? 그게 확실하지 않은데 공급이 필요하다고만 말씀하셔도, 위험해서 찬성 따위는 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런 PR 영화를 만드는 정도라면 도쿄 전력 제공으로 <지구는 살아있다>는 취지의 영화를 만드는 편이, 사람들이 몇 배나 도쿄 전력의 자세에 호감을 가지지 않을까요?" 과학기술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인류와 동물을 나누고, 무력한 인류가 여기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과학문명의 덕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완전히 다룰 수 없는 기술을 사용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인류는 슬슬 완전히 다룰 수 없는 기술에 대해서는 스스로를 규율하고 컨트롤하는 시대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행방이 보이지 않는 원자력 행정의 행선지는 거기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나는 <오공의 대모험>(1967년)에서 돗칸코 박사라는 캐릭터를 등장시킨 적이 있다. 돗칸코 박사는 폭탄 연구를 하고 있었는데, 점점 인간으로 실험을 하고 싶어진다. 거기서 지나가던 삼장법사 일행을 노리는데, 오공에 당해서 결국 실패하고 만다. 돗칸코 박사는 어쩔 수 없이, 마지막에는 자신을 실험재료로 삼는다...
당시만 해도 미국의 원폭 투하를 염두에 두고 이를 꼬집은 셈이었지만, 현재 완전히 쓸 수 없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 인류의 모습을 보면 돗칸코 박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거기에 있는 것은 상상력 혹은 품성의 문제다. 생명에 대한 상상력을 가진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구스코부도리의 전기(부도리의 꿈)>에서 신경을 쓴 묘사가 있다. 그것은 부도리의 아버지 구스코 나도리가 나무를 벨 때의 모습이다. 원작에 '구스코 나도리는 유명한 나무꾼이었습니다'라는 문장이 있다.
어떤 큰 나무라도 '갓난아기를 눕히듯 쉽게 베어버린다'고 하니 상당한 솜씨일 것이다. 그러나, 단지 나무를 베는 것을 잘할 뿐인 나무꾼이 '유명하다'는 호칭에 걸맞을까. 나는 거기서 나무를 베기 전의 나도리에게 나무껍질에 손을 대고 나무에 예를 표하는 연기를 붙였다. 나무를 베는 액션은 구체적으로는 그리지 않았기 때문에, 관객이 보는 나도리의 모습은 그 나무에 손을 대고 있는 모습이다. 나도리는 분명 나무를 만지고 '이제부터 널 쓰러뜨릴 텐데 용서해줘' 같은 한마디를 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손바닥을 통해, 나무가 물을 빨아들이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생업이긴 하지만, 앞으로 베러내려는 나무에 예를 다하는 듯한, 그런 나무꾼을 나는 품격이 좋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행위에 자각적으로 살고 있다는 것. 그것이 품성이고 상상력이다. 이러한 상상력을, 지금의 사람들에게도 공유해 주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란다. 정서를 가지고 캐릭터를 그린다는 것은 이런 식으로 움직임이 없는 얼마 없는 장면이라도 캐릭터 안에 고귀한 영혼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는 것이기도 하다.
살아있다는 것은 사랑스럽다
<은하철도의 밤>을 만들 때, 내가 생각했던 것은 조반니처럼 죽음의 곁에 바짝 다가섰다가 '삶'이라는 것을 보면, 그것은 분명 매우 사랑스러워 보일 것이라는 점이다. 그 사랑스러움을 관객도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영화를 만들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는 의도치 않게 여행함으로써 현실 세계를 멀리 떨어진 위치에서 바라본다는 조반니와 비슷한 경험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영화 마지막에 조반니가 다시 현실로 다시 태어난 것처럼, 나도 <은하철도의 밤>으로 본격적으로 애니메이션 업계로 돌아오게 되었다.
영화의 골격은 감독이 결정해야 한다. 그것이 일이다. 그러나 영화는 감독 한 사람이 만드는 것은 아니다. 내 인생과 마찬가지로 영화도 살을 붙여주는 것은 스태프, 현실에서 우리가 만나는 다양한 사람이다. 그런 만남이 내 인생을 심오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인생을 되돌아봐도, 이 책에서 말한 대로 다양한 만남에 의해 크게 변화해 왔다. 애니메이션에 대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아톰의 사상'을 깨닫게 해준 데즈카 선생님. 그 억제된 스타일을 통해 애니메이션에서도 정서로 이야기하는 드라마가 실현될 수 있다는 힌트를 준 아다치 미츠루 선생님. 그 외 오오츠카 야스오 씨, 선인 등, 셀 수 없는 사람이 내 인생을 풍요롭게 해 주었다.
거기에는 조반니나 부도리 같은 캐릭터들을 추가해도 좋을 것이다. 나도 분명, 애니메이션이라는 인생을 걸어오면서 다양한 사람에게 몇 가지 삶에 대한 생각에 기여를 했다고 생각하고 싶다.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만남은 만남은 어디서 기다리고 있는가. 그것은 요구함으로써 반드시 만날 수 있다. 요구하는 것이 자신의 안테나를 세우는 것이 된다. 요구하지 않으면 아무리 눈앞에서 만나도 눈치채지 못한다. 여행을 하고 있을 때의 시시한 이야기지만, '인베이더 게임이 유행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게임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나는, 그 사람에게 그런 것을 본 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다고 해서 웃음을 샀다. '동네에 인베이더라는 간판이나 안내가 나와있어'라고 했다. 정말인가 싶어서 의심하며 마을을 걸어보니, 들은 대로 간판이나 찻집 창문이나 마을 곳곳에 인베이더라고 쓰여져 있었던 그런 일도 있다. 안테나를 닫고 있으면, 눈앞에 있는 간판도 보이지 않는다. 이것으로는 생각지도 못한 만남은 오지 않는다. 인간이라는 것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그 시간만이 인생이다.
어떻게 살아도 한 번뿐인 인생.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죽은 사람의 몫도 맡아 살고, 그 마음에 의해 살고 있는 인생을 충실하게 하려고 한다. 그리고 벽에 부딪히면, 조금 여행을 떠나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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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애니 감독이 아닌 철학자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언급된 데즈카 오사무 작품들 제대로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