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기이 기사부로의 생애와 애니메이션에 대한 철학
스기이 기사부로 감독의 8년의 방랑생활과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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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상으로는 방랑생활 내용 전에 나온 부분입니다. 여기서는 오오츠카 야스오, 데즈카 오사무 등 지금 애니메이션 팬들 입장에서 들어봤을 법한 이름들도 나옵니다. 내용 중에 대학에 대한 언급도 있을텐데 그건 교토 세이카 대학입니다. 그곳에서 애니메이션 학부의 기초를 닦으며 사이토 케이이치로(장송의 프리렌, 봇치 더 락), 이시다 히로야스(펭귄 하이웨이, 표류단지)와 같은 사람들을 교육했습니다.
영화감독의 뿌리가 된 두 편의 영화
어린 시절의 경험이 자신의 가치관 미의식을 형성하는 근본이 된다. 제1장에서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애니메이션의 길을 결심했다고 썼다. 하지만 스스로 영화감독으로서의 뿌리를 찾아보면, 더 어린 시절에 본 두 편의 영화를 잊을 수 없다. 두 편의 영화란, <미녀와 야수>(1946년, 장 콕토 감독)와 <歌ふ狸御殿>(1942년, 기무라 게이고 감독). <미녀와 야수>는미남으로 알려진 장 마라이가 특수 메이크업을 한 야수로 주연을 맡고 있는 환상적인 영화, 한편 <歌ふ狸御殿>는 미야기 치카코, 쿠사부에 요시코 등 다카라즈카 출신 여배우가 주역을 맡고 있는 뮤지컬 코미디다. 제2장에서는 이 두 편의 영화를 시작으로 내가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고, 어떤 경위로 애니메이션 업계에 들어가게 되었는지를 말하고 싶다. 그것 또한 내가 인간의 내면의 움직임을 애니메이션으로 그리고 싶다 생각한 것에 대한 해설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장 콕토 감독의 <미녀와 야수>를 본 것은 7살이나 8살 무렵. <미녀와 야수>라고 하면 1991년에 디즈니가 애니메이션 영화화한 것이 유명할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콕토의 영화가 훨씬 인상적이다. 이야기는 늙은 상인이 장사에 실패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실망한 가운데 집으로 향하는 상인은, 막내딸을 위해 최소한의 선물로 고성 안에 피는 장미를 손으로 꺾어 버린다. 그때 나타나는 것이 고성의 성주인 야수. 야수는 장미가 꺾인 것에 분노하고, 여기서 목숨을 빼앗기거나 딸을 대신 내놓으라고 상인을 위협한다. 막내딸 벨은 그것을 알게 되자 스스로 야수가 기다리는 고성으로 넘어가게 된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 막내딸이 하얀 드레스 같은 옷을 입고 포도선반 아래 벤치에 누워있는 장면이다. 화면 안쪽에 보이는 포도선반 안에서 스윽 야수의 얼굴이 페이드 인 된다.
그리고 야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막내딸을 바라보고 있다. 조용한 장면이지만, 어린 나는 이 장면에 뭐라 말할 수 없는 에로티시즘을 느꼈다. 사실, 나중에 이 작품을 DVD로 재검토했지만, 그곳에 그런 장면은 없었다. DVD화 때 잘라냈다는 것도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에, 어린 시절의 기억을 뇌내에서 되새기고 있는 사이에 내 머릿속에 하나의 가공의 장면이 완성되어 버린 것일까. 그러나 <미녀와 야수>가 예쁜 영화임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이 '환상의 장면'이 환상일지라도 나의 영상체험의 원점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
또 하나인 <歌ふ狸御殿>을 만난 것도 <미녀와 야수>를 봤을 무렵일 것이다. 이 영화는 1939년에 공개된 <狸御殿>(기무라 게이고 감독)에 이은 '너구리(狸)'로 '신데렐라'를 바탕으로 한 거침없는 코미디다. 이쪽은 DVD조차 나오지 않아서, <미녀와 야수> 이상으로 기억은 애매하다. 내 기억으로는, 남자인 너구리가 여자인 너구리를 쫓아 다른 세계로 들어가면 중국풍 건물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그 건물에서 여자의 진주목걸이가 툭 끊어져 진주가 굴러떨어지는 장면이 있다. 아래가 물이라 그대로 툭 떨어질 줄 알았는데, 진주는 찰랑찰랑 소리를 내며 수면 위를 미끄러지듯 흩어진다.
그 찰랑찰랑 소리와 굴러가는 진주가 무척 예뻤다는 것이 선명하게 인상에 남아있다. <미녀와 야수> <歌ふ狸御殿> 중 어느 쪽도 당시 7살이나 8살이었던 내가 스토리의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는 스토리가 전해지지 않더라도 그 영화가 품고 있는 판타지나 아름다움, 혹인 에로티시즘이라는 것을 관객에게 전달할 수 있는 매체이다. 어린 나는 각각의 영화가 가지고 있는 스토리 이외의 부분에 반응해서, 두 편의 영화를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미녀와 야수>의 한 장면이 환상이라도, <歌ふ狸御殿>의 내용이 모호해도 나의 평가가 흔들리지 않는 것은, 어린 시절의 내가 확실히 그 두 편의 영화에서 어떤 종류의 아름다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핵심이 된 채 성장해서 지금의 내가 있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아무튼 신기한 일이지만 <오공의 대모험>을 만들 때조차도 나는 이 <미녀와 야수>와 <歌ふ狸御殿>을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오공의 대모험>만이 아니다. 인기 격투 게임을 소재로 한 <스트리트 파이터 2 무비>를 영화로 만들 때도, 데즈카 선생님의 만화 <양지의 나무>를 TV로 만들 때도, 이 영화들은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물론 <은하철도의 밤> 때도, <구스코부도리의 전기(부도리의 꿈)> 때도 그렇다. 내용도 테마도 전혀 상관없을 텐데도. 이 두 편의 영화는 그만큼 내 마음 깊숙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사실, 영화를 만들 때 세세한 부분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구스코부도리의 전기>를 감독함에 있어서 사람들로부터 스기이가 만드는 영화는 동화를 원작으로 해도 전혀 어린이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들었다. 이와 비슷한 것은 <은하철도의 밤> 때도 들은 기억이 있다.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그것은 영화에 있어서 지나치게 스토리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스토리도 중요하다. 하지만, 아까 내 체험에서 소개했듯이 아이에게는 스토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오히려 아이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원샷이 그 아이의 마음을 사로잡는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아이가 어느 장면에서 강한 임팩트를 받을지는 예측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가 보는 영화는 전체를 치밀하게 만들어 나갈 필요가 있다. 아이가 종종 창작물의 허술한 부분을 간파해 버리는 것은, 애초에 아이의 시선이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스코부도리의 전기>는 확실히 5~7세 정도의 아이가 스토리를 완벽하게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내용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거로 된 것이다. 대신에 '숲이 예뻤다' '코토리(子取り)의 눈이 무서웠다' 같은 세세한 기억을 평생 간직해 주었으면 한다.
거기서 얻은 '아름다움' '무서움'이란 대체 무엇이었는가. 그것을 평생에 걸쳐 불태울 수 있는 몸이야말로 영화이고 영화를 보는 본질은 거기에 있다. 인간은 영화 화면(과 소리)에서 무의식적으로 다양한 정보를 얻고 있다. 그리고 인간이 뇌와 영화가 커뮤니케이션을 하면, 그 영화의 세세한 부분은 뇌 속에 하나의 세계관으로서 그 모습을 남긴다. 기옥 속에 단편으로만 남는 존재. 필름 본체가 영화인 아니라 관객의 기억 속에 축적되어 남는 것이야말로 영화인 것이다.
그리고 관객의 기억 속에 남은 것이 영화의 본질이라면, 관객인 당신의 인생관이나 가치관도 거기에 겹쳐 들어가 있을 것이다. 즉, 같은 영화를 봐도 한 사람 한 사람마다 그 체험은 모두 다르다는 것이 된다. 영화감독이라는 것은, 따지고 보면 그러한 체험의 소재를 제공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거기에 시각과 청각을 동시에 자극하는 영화만의 예술성이 깃들어 있다. 이것은 음악이나 문학, 혹은 조각이나 회화 같은 것과는 크게 다르다. 어린 시절의 두 편의 영화체험은 그런 영화예술의 본질을 가르쳐 준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 일본에서 볼 수 있는 영화는 마치 놀이공원의 어트랙션과 같은 작품이 주류가 되고 있다. 보고 있는 동안에는 결코 질리지 않지만, 끝나버리면 아무것도 기억에 남지 않는다. 나로서는 어째서 영화 고유의 힘을 더 효과적으로 살릴 수 있는 작품이 적은지, 안타까워 견딜 수가 없다.
밤비와 만난 초등학교 5학년
7살이나 8살 때 영화에서 강렬한 자극을 받은 나였지만, 역시 초등학생 시절에 가장 친숙했던 미디어라고 하면 만화였다. 당연히 나는 만화소년이었다. 바바노보루, 후쿠이 에이이치, 카노하라 호우메이... 추억이 깊은 작가는 많다. 아동만화가는 아니었지만 나는 시미즈 곤 씨의 그림도 정말 좋아했다. 당시 시미즈 곤 씨는 캇파가 등장하는 그림이야기(絵物語)를 그리고 있었다고 기억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역시 데즈카 오사무 선생님은 각별했다.
누마즈 시내를 흐르는 카노강에 오나리바시라는 다리가 있었다. 그 옆에 도로에서 한 계단 내려간 좁은 길이 있고, 그 안쪽에 서점이 있었다. 어린시절의 어느 날, 우연히 부모에게 이끌려 그 서점에 들어갔다. 가게 안에는 <タンクタンクロー>와 <冒険ダン吉>가 나란히 쌓여있었지만, 가게의 입두쪽에 특별코너가 설치되어 있었고 거기에 데즈카 선생님의 <신보물섬>이 나란히 놓여있었다. 표지의 그림, 표지를 넘긴 내부의 종이질도 포함해서 그 풍경은 지금도 뇌리에 제대로 새겨져 있다. <신보물섬>은 표지부터 다른 만화와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고, 컷 분할도 참신한 인상이었다.
어린 마음은 잘 모르겠지만, 특별한 재미, 설레는 느낌이 있었다. 그것은 <タンクタンクロー>나 <冒険ダン吉>라는 다른 만화의 재미와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그런 만화소년이었던 내가, 애니메이션을 내 일로 하고 싶다고 분명히 결심하는 인생의 큰 전환점이 왔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디즈니 영화 <밤비>를 본 것이 계기였다. <밤비>는 숲의 왕자로 태어난 새끼사슴 밤비가 숲의 동료와 함께 성장해가는 모습을 그린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디즈니의 장편 작품으로는, 첫 번째 작품인 <백설공주>로부터 5번째 작품에 해당한다. 미국에서는 1942년에 개봉했지만, 일본에서의 개봉은 종전으로부터 6년 뒤인 1951년이었다. <밤비>는 처음 본 장편 애니메이션은 아니다. 그때까지도 애니메이션 영화는 보고 있었고, 나름대로 좋아하는 작품도 있었다. 내가 마음에 들었던 것은 소련에서 제작된 <곱사등이 망아지>(1947년, 이반 이바노프 바노 감독)이나 미국 것도 디즈니가 아닌 데이브 플라이셔 감독의 <미스터 버그가 도시로 가다>(1941년) 등이었다.
<곱사등이 망아지>에서 인상적인 것은, 숲 속에서 빛나는 새의 날개를 발견하고 빛이 퍼지는 장면. 지금 보면 비교적 엉성한 이펙트이지만, 화면에는 기술의 레벨과는 별개의 임팩트가 있어 기억에 남아있다. 그 무렵의 디즈니에 대한 나의 평가는 '예쁘지만, 그런 만큼 걸리는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곱사등이 망아지>나 <미스터 버그가 도시로 가다> 쪽이, 훨씬 거칠지만 동시에 잊기 어려운 작품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나의 그 건방진 디즈니 평가는 <밤비>로 철회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훌륭하다고 생각한 것이 특별히 화려한 장면이라는 것은 아니다. 우선 영화의 서두. 카메라가 천천히 숲속을 PAN(옆으로 이동)해간다. 매우 시간이 긴 원컷으로, 나중에 시간을 재보니 길이가 60초 가까이 됐다. 그 장면은 멀티플레인이라 불리는, 배경을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는 방법으로 촬영되어 숲의 풍경에 깊이가 있다. 그리고 그 멀리 안쪽에 작은 폭포가 보이는데, 그 폭포가 잘 흐르는 것이다. 기술적인 뒷받침은 당연히, 나중에 알게 된 지식이고 당시에는 그런 지식 따위를 아무것도 몰랐지만 그 조용한 영상미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 후의 본편에도 인상적인 장면은 많지만, <밤비>의 충격을 이야기하려면 이 서두의 컷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초등학교 앞에 문구점이 있었다. 거기서 <밤비> 엽서 크기의 스틸을 팔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원해서 가지고 있던 용돈을 털어 거기서 팔고 있던 80종류의 스틸을 전부 사버렸다. 게다가 학교가 끝난 후 카노강을 건너 영화관이 있는 동네까지 나갔다. 창문에 장식되어 있는 밤비의 흑백 스틸(로비 카드)를 모사하기 위해서다.
이 흑백스틸도 갖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다. 영화관 누나에게 몇 번이나 부탁해 보았지만, "미안해 꼬마야. 안 돼."라고 거절당해서 마지못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애니메이션은 만화영화라고 불렸지만, 그 아름다운 화면을 포함하여 '애니메이션으로 이런 것까지 할 수 있나'라는 놀라움이 <밤비>에는 있었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애니메이션을 평생의 일로 삼겠다고 어린 마음에 맹세한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어떻게 하면 애니메이션 일을 할 수 있을지 전혀 몰랐다. 그 당시에는, 일본에 그런 직업이 있는지 없는지도 애매한 상태였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후반에 도쿄로 전학갔는데, 중학생 때 내가 보던 애니메이션이라고 하면 디즈니가 제작한 도널드 덕의 단편이나 플라이셔 형제의 <뽀빠이>였다. 모두 미국산이다. 실은 일본에도 전쟁 전부터 이어지는 애니메이션의 전통이 있었지만, 작품을 접할 기회도 적고 일본산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은 10대 초반의 나에게는 전혀 인연이 없는 것이었다. 간신히 도쿄의 초등학교에서 <すて猫トラちゃん>(1947년, 연출 마사오카 켄조)을 본 적이 있었지만 당시의 인상으로는, 아무래도 일본에서도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있는 것 같다 이상은 아니었다. 미국과는 수나 규모나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처럼 영화나 TV에서 대량으로 흘러나와 일본을 특징짓는 문화 중 하나라고까지 불리는 애니메이션. 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것은 그림자도 형태도 없었다. 그래서 당시의 나는 애니메이션을 직업으로 하고 싶다면 미국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우시오 소지 선생님 밑에서
나는 어렸을 때 도쿄와 누마즈를 왔다 갔다 했다. 당시에는 전쟁이 끝난 지 몇 년. 하라주쿠에서 시부야에 걸쳐서는 아직 큰 건물은 아무것도 들어서지 않고, 불타버린 들판처럼 아무것도 없었다. 전쟁의 잔재일까, 도로 옆에 소방차가 다 타서 뒹굴고 있던 것을 잘 기억한다. 이윽고 나는 도쿄로 이사를 와서 하라주쿠에 살게 되었다. 그 무렵 나는 신문 배달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배달 담당은 현재의 요요기 공원에 세워져 있던 미군의 숙소, '워싱턴 하이츠'다. 특별한 감찰을 받고, 미군용 신문 <스타즈 앤드 스트라이프스>를 나눠주고 있었다. 일요일판에 실려있던 컬러인쇄 신문만화(미국만화)를 원했던 것이다.
워싱턴 하이츠는 하라주쿠 역 외곽의 언덕 위에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서는 아오야마까지 바라볼 수 있었고 눈이 오는 날 등은 매우 아름다운 풍경이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중학생이 되어서도 나의 애니메이션에 대한 꿈은 쇠약해지지 않았다. 다만, 여전히 어떻게 하면 애니메이션 일을 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채였다. 거기에서 헤맨 나는, 이러면 만화가라도 되는 편이 좋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당시 우리 집에서 조금 떨어진 세타가야구의 쇼인 신사 근처에 우시오 소지라는 만화가가 살고 있었다.
우시오 소지라고 하면 후에 영상제작회사 피프로를 설립해 <マグマ大使> 등의 특촬 프로그램 등을 다수 담당하게 되는 사람이지만, 그 무렵에는 시대극 만화를 그려 인기를 끌고 있었다. 진로를 헤매고 있던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이 우시오 선생님에게 밀어닥쳐 제자처럼 다니기 시작했다. 내가 우시오 선생님을 선택한 것은, 건축물을 매우 정확하게 그리기 때문이다. 당시 우시오 선생님은 <朱房の小天狗>라는 연재를 하고 있었는데, 오층탑이 나와도 골격까지 제대로 그렸다. 시대극이라 칼도 나오는데, 대충 데포르메해서 그리는 것 같은데도 디테일은 매우 탄탄하고 단정했다. 그 화풍을 나는 좋아했던 것 같다.
밀어닥친 제자 같은 것이어서 처음에는 우시오 선생님도 다루기 어려웠다고 생각한다. 상냥하게 대해주었지만, 과묵한 선생님이라 처음에는 거의 상대받지 못했다. 그래도 평일에는 매일 중학교가 끝나면 선생님을 찾아갔다. 우시오 선생님이 재미있었던 것은 '물감을 이렇게 써라'나 '펜을 이렇게 써라' 같은 것을 일절 가르치지 않는 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중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가 상대다. 어시스턴트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일에 대해 이것저것 가르치려 할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어쨌든 이쪽은 진심이었다.
그래서 잡무를 도우면서 가만히 우시오 선생님의 모습을 보고 필요한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방해가 되지 않도록, 손을 보고 펜촉은 무엇에 사용되는지 확인한 적도 있다. 선생님이 화장실에 갔을 때, 잘못 쓴 종이를 주머니에 넣고 돌아가서 문구점을 찾아가 '이것과 같은 종이를 줘' 같은 일을 한 적이 있었다. 다만, 우시오 선생님은 그런 밀어닥친 제자인 나를 완전히 방치한 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그려봐라 라고 해줘서, 만화를 그려 가져가면 강평해 주었다.
다만, 거기서 받는 조언은 컷 나누는 방법 들 만화 그리는 방법이라기보다는 그림을 그리려면 어떤 공부가 필요한가 하는, 미술교육적인 내용이 많았다. 중학교 3학년이기 때문에 진학할 것인지 취직할 것인지가 큰 문제가 되는 시기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자식에 대해 신경쓰지 않았다. 우리 세대 사람들은 다소간에 그랬던 것이 아닐까. 먹고 살기만 해도 벅찬 시대였다는 사정도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나의 경우 할머니가 시끄러웠다.
할머니는 만화가나 애니메이션 같은 직업이 있다는 것을 별로 몰랐을 것이기 때문에, 그림만 그리는 나는 화가가 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할머니는 제대로 공부해서 제대로 된 일을 하라는 압력을 자주 가해왔다. 학교에서 돌아오니 내가 그린 그림이 전부 찢어져 있기도 했다. 진학여부를 결정하는 시기가 됐을 때 내가 상담한 것은 우시오 선생님이었다. "시험을 봐서 고등학교에 갈지 고민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우시오 선생님은 말을 많이 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대답해 주셨다. "평범하게 가족을 생각하면 진학하는 편이 좋겠지. 다만, 정말로 화가가 된다면 전문적으로 미술공부를 하는 길도 있어. 그런 길도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아."라는 내용의 조언을 해 주셨다.
당시, 미술과가 있는 고등학교는 도립공예고등학교 정도밖에 찾을 수 없었다. 고등학교 진학과 미술 공부 모두를 실현하는 것은 상당히 좁은 문이라는 것이었다. 만약 진학한다면 보통 고등학교에 가게 될 것이지만, 그림 그리기에는 보통 고등학교를 3년이나 다니게 되는 것에 별로 의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그대로 우시오 선생님에게 계속 다니는 것을 선택했다. 다만, 우시오 선생님한테서 월급을 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아울러 화숙(画塾)에 다니기 시작했다. 당시 겨우 15살이었고 부끄러웠지만 어른들과 섞여 나체 여성의 드로잉을 하기도 했다.
토에이 동화로
그리고 2년 정도 지난 1958년의 마지막 달이었다. 또 전환점이 왔다. 삼촌집에 갔을 때 "너, 이런 모집이 올라왔다."라며 신문 구인광고를 보여주었다. 그것이 토에이 동화의 구인광고였다. 광고에는 아직 새로운 스튜디오 사진과 나중에 생각해보니 멀티플레인 카메라 같은 촬영대 사진이 있었다. 일본에서도 애니메이션 일을 할 수 있는 것인가! 그래서 나는 곧바로 토에이 동화의 채용을 신청했다. 확실히 우선 서류 심사가 있었고, 거기에 합격한 사람만이 다음에 면접에 불려갔을 것이다. 면접 때는 긴자에 있는 토에이 본사에 불렸다.
그런데 그 면접이 끝나도, 한결같이 결과 연락이 오지 않는다. 농땡이를 부리던 나는 토에이 본사에 쳐들어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상당히 화가 났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본사에 들어가서 총무실을 확인하고, 그 안쪽의 입구에서 가장 먼 책상의 잘난 척하는 사람에게 툭툭 걸어갔다. "죄송하지만 얼마 전에 시험을 봤던 스기이라는 사람입니다만" 그, 나는 이미 떨어졌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떨어졌으면 떨어졌다고 빨리 알려주지 않으면 곤란합니다. 이쪽도 사정이 있다고요. 왜 빨리 연락을 주지 않는 겁니까?"라고 상대방에게 다짜고짜 들이닥쳤다.
상대는 놀라면서도 "너 무슨 이름? 스기이 기사부로? 잠깐만"이라며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너, 미안해. 여러가지 사정이 있어서 반송이 늦어지고 있는데 그렇게 당황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 일주일 안에 엽서를 쓸거야."라고 차분한 어조로 훈계하듯이 말했다. "어?!" 나는 그때 처음으로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았다. 그리고 갑자기 부끄러워지는 것을 느끼고 "감사합니다. 아, 정말 죄송합니다."라며 허둥지둥 토에이 본사를 떠났다.
그리고 응대해 준 사람의 말대로, 며칠 뒤에 면접 합격 연락이 자택에 도착한 나는, 다음 실기 시험을 보기 위해 오이즈미가쿠엔의 토에이 동화에 가게 되었다. 토에이 애니메이션의 스튜디오는 지금도 오이즈미가쿠엔에 있다. 첫인상은 '먼 곳이구나' 하는, 그다지 좋지 않은 것이었다. 다만, 스튜디오는 훌륭했다. 이제 막 만들어진 사옥을 가진 회사 같은 건 본 적도 없어서 매우 인상 깊었다. 특히 감동한 것은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보인 복도의 벽이었다. 좌우 벽에 일동영화주식회사 시대에 만든 <黒いきこりと白いきこり>(1956년) 등의 셀화가 액자에 정성껏 담겨 나란히 장식되어 있던 것이다.
토에이 동화의 사옥을 보고, 나는 '여기가 내 직장이다'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만일 실기시험에 떨어지더라도 어떻게든 토에이 동화에 침투하려 마음먹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방법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우시오 선생님에게 부탁해서 만화가 하나노하라 요시아키 씨의 소개를 받자는 아이디어다. 하나노하라 요시아키 씨는 토에이 동화에서 <かっぱのぱあ太郎>(1957년)라는 단편을 만들었다. 거기에 부탁하면 어떻게든 되는 게 아닐까.
아이의 생각이란 무서운 것으로, 하나노하라 씨와는 안면이 없었지만 분명 우시오 선생님과는 같은 만화가 동지로서 아는 사이일 것이라 단정짓고 있었다. 게다가 그것이 안 될 때의 최종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이 오카와 토에이 사장 자택 앞에서의 농성. 사장의 집 앞에서 토에이 동화에 입사시켜 줄 때까지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 꿈같은 것조차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토에이 동화의 실기 시험은 매우 잘 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교묘한 문제였다.
건네받은 종이에 타원이 그려져 있다. 타원의 원주를 사등분하는 위치에 A, B, C, D 점이 찍혀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빙글빙글 굴러가는 팽이의 그림. 문제에는 '이 팽이를 ABCD 지점에 세워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이 문제를 얼핏 보고 얼마나 사람을 바보로 아는 문제인가 생각했다. 팽이라 하면 어렸을 때부터 익숙하고 게다가 본보기 그림도 있다. 그것을 지정된 장소 네 곳에 세우라니, 너무 간단하잖아. 그러나 팽이를 그리기 시작하자, 바로 '아니, 이건 아니야.' 하고 생각했다. '잠깐만' 하고.
팽이가 타원의 원주 위에 있다는 것은 팽이가 돌면서 타원 위를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깨달은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팽이는 지금 내가 그리고 있는 것처럼 똑바로 서 있을 리가 없다. 타원의 궤도 안쪽을 향해 기울어져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석해서 기울어진 팽이를 그리기 시작하자, 원주 위의 앞쪽에 있으면서 안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팽이와, 반대로 원주 안쪽에 있으면서 앞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팽이가 너무 그리기 어려워 고생했다.
나는 지금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애니메이션을 가르치고 있지만, 같은 문제를 갑자기 내면 물음이 의도하는 수수께끼 같은 장치를 알아차린 학생은 몇 명 없다. 이 문제가 교묘한 것은, 단순히 출제의도를 간파하기 어렵기 때문이 아니다. 무엇보다 애니메이터에게 요구되는 능력을 바로 알 수 있도록 설계된 점이 교묘한 것이다. 우선, 이 출제가 움직임에 대한 질문이라는 것을 이미지할 수 있는지 여부. 거기서 움직임에 대한 감성이 시험된다.
거기에 그때 팽이에 물리적으로 어떤 힘이 작용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지 여부. 이것으로 평소 여러 가지 운동을 관찰하고 있는지 여부를 시험한다. 그리고 그 위에 이미지한 상태를 그림으로 재현할 수 있는 화력, 드로잉력이 있는가. 나는 이 뛰어난 문제를 만든 것이, 당시 토에이 동화에서 지도적인 입장에 있던 애니메이터, 훗날 <장난꾸러기 왕자의 오로치 퇴치>나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 등으로 애니메이션사에 남는 일을 한 모리 야스지 씨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 사실을 확인한 적은 없지만.
이때의 실기시험은, 50~60명 정도가 응시했을 텐데, 합격한 사람은 십여명이었다. 이렇게 시험에 합격한 나는, 염원하던 애니메이션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토에이 동화 합격에 대해서는, 약간의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가 붙어 있다. 우시오 선생님에게 토에이 동화에 합격한 보고를 하러 가니, 우시오 선생님의 남동생이 와 있었다. 나는 전혀 몰랐지만, 우시오 선생님의 남동생은 사기스(마사야스)라고 해서 TCJ(일본 텔레비전, 1952년 설립)라는 커머셜용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회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나는 이전에 몇 번 인사는 한 적이 있었지만 TCJ에 근무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덧붙여서 우시오 선생님의 본명은 사기스 토미오다.
우시오 선생님과 "토에이 동화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아, 다행이네." 같은 간단한 대화를 하고 정원으로 나갔더니 거기에 사기스 씨가 있었다. 인사를 하자 "스기이 군, 토에이에 들어갔다고?"라고 물으며 "사실 나는 TCJ에서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있어."라고 털어놓았다. 나는 광고에는 흥미가 없었기 때문에, TCJ에 취직하고 싶다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내 가까운 거리에 애니메이션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꽤 놀랐다.
얼마 후,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로 결정한 데즈카 선생님이 TCJ를 방문하여 '입사시켜 달라'고 의뢰를 한 약간의 '사건'이 있는데, 그때 데즈카 선생님의 응대를 한 것도 사기스 씨였다고 한다. 알다시피 데즈카 선생님은 그 후 1961년에 자신의 스튜디오 '무시 프로덕션'을 설립, 1963년에 <철완 아톰>의 TV 방송을 시작한다. 한편 TCJ도 곧 TV 애니메이션에 진출, <철인 28호>(1963년) <에이트맨>(1963년) 등을 발표한다. 이윽고 TCJ의 애니메이션 부문은 TCJ동화센터로 독립, 현재는 에이켄으로 이름을 바꿔 국민적 프로그램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사자에상>(1969년)을 제작하고 있다.
오오츠카 야스오 씨 밑에서 일하다
염원하던 애니메이션의 세계에서 일을 한다. 그것은 매우 기뻤다. 기쁜 나머지 잠을 이루지 못해서 한동안은 엄청나게 이른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오전 5시쯤에 일어나서 메이지신궁을 한 바퀴 마라톤하고(이런 것은 하면 안되기 때문에 들킨다면 수위한테 쫓겨나지만) 집으로 돌아간다. 땀을 흘려도 여전히 시간이 있으니까 라디오 드라마 같은 걸 듣기도 하고, 그러고는 하라주쿠에서 이케부쿠로를 경유해 오이즈미가쿠엔의 토에이 동화로 향했다.
당시에는 오전 9시 개학이었기 때문에, 여전히 일찍 도착하고 만다. 내가 들어갔을 때는 새 사옥을 증축 중이어서 우리 신입사원이 양성실이라 부르는 방에 가니, 책상 위에 희미하게 공사 먼지가 쌓여 있었다. 할 일이 없었던 나는 전원의 책상 위를 걸레질하거나 하며 시간을 보냈다. 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13명 정도라고 들었는데 결국 정식으로 입사한 사람은 일고여덟 명 정도였다. 동기는 사이가 좋았지만, 18살에 들어간 내가 보기에는 모두 연상이었다. 동기 중에는 후에 토에이 동화에서 프로듀서가 된 카츠타 토시오 씨도 있었다. 카츠타 씨는 유화를 그리다가 에코다의 화숙을 소개받기도 했다.
꽤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형, 형' 등을 외치면서 따라다니고는 유화 등도 꽤 배웠다. 양성이 끝난 후에 배속된 것은 일본 최초의 컬러 장편 애니메이션 <백사전>이었다.
<백사전>, 1958년 개봉. 중국의 전설을 주제로 마음이 착한 청년 허선과 백사의 화신 백 낭자의 사랑을 그린다. 연출(감독)은 야부시타 다이지. 당시 일본에서 대규모 흥행실적을 올리고 있는 것은 디즈니뿐이라는 상황 속에서, 토에이 본사의 오카와 히로시 사장은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을 기획. 전쟁 전부터 애니메이션의 전통을 계승하는 일동영화주식회사(설립 당시 명칭은 일본 동영상 주식회사)를 사원별로 인수하거나 미술대학 졸업생으로부터 애니메이터를 모집하는 등, 제작체제를 갖추고 1956년부터 본격적으로 애니메이션 제작에 착수했다.
우리 반의 치프는 오오츠카 야스오 씨. 오오츠카 씨는 토에이 동화에서는 훗날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1968년,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 등을 맡았고, 퇴사 후에는 <루팡 3세>(1971년)이나 <미래소년 코난>(1978년)으로 실력을 발휘하게 되는 사람이다. 나는 이 오오츠카 씨로부터 그림을 움직이는 것의 의미를 철저히 배우게 된다.
동경하며 들어간 애니메이션의 세계였지만, 토에이 동화라는 회사가 나아가는 방향은 결코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1959년)
<서유기>(1960년)
<안쥬와 즈시오우마루>(1961년)
나의 입사 후 위와 같은 장편 작품을 1년에 한 번 페이스로 제작한 토에이 동화이지만, 어떤 기획도 나는 흥미를 가질 수 없었다. 솔직히, 이 회사는 이런 작품밖에 만들지 않나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아울러 당시 벌어진 조합운동에 의문을 느끼고 있었다. 토에이에는 원래 이른바 어용조합이 있었는데, 그에 대해 작품투쟁이라는 관점에서 새로운 노동조합 결성운동이 일어났다. 작품투쟁이라는 것은 즉, 토에이 본사가 세운 기획을 토에이 동화 현장이 하청공장처럼 수주하려 제작하는 관계에 저항하려는 운동이다.
거기에는, 애니메이션 제작현장에는, 애니메이션을 잘 아는 작가가 있으니 현장도 기획결정에 참여하고 싶다는 주장이 있었다. 나도 그 주장에는 찬동했기 때문에 조합운동에는 참가했다. 그러나, 주장은 '작품투쟁'일지라도 노동관리와 대대적으로 관련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즉 현장의 의견을 회사에 통과시키기 위한 거래 조건으로, 현행 작품의 스케줄 준수 등이 조합 측에 강하게 요구되게 된 것이다. 내가 사내를 어슬렁거리고 있으면, 조합의 멤버 등이 "생산량으로 하루에 16장은 꼭 그려주세요"라고 하게 되었다.
현장에 창작권을 획득하기 위한 운동이 오히려 생산량을 묶어버리는 모순을 거기서 느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이라는 것은, 그렇게 노르마를 정해서 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라는 나름의 반발심도 있었다. 사실 나는 토에이 동화의 면접 때, 월급 같은 건 필요없다고 발언했다. 꽤나 위험한 말투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나는 월급을 받아 먹고 사는 것과 그림을 그리는 것을 연관지어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월급은 12000엔 정도. 높지는 않지만 당시 수준의 초봉 정도는 됐다. 나로서는 그걸로 먹고 살 수 있으면 됐다. 회사에서 월급을 받는 대신 일은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회사를 위해 일하려는 마음도 없었다.
우리의 일은 영화 제작이기 때문에, 영화를 만들기 위해 일하는 것이 제일. 임금을 준다고 해서 일하는 것은 아니었고, 창작의욕이 꺾여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이 생각은 토에이 동화를 그만두고 무시 프로덕션으로 옮겨서도 변하지 않았고, 지금도 별로 변하지 않았다. 이렇게 작품에 대한 반발과 조합에 대한 적응을 못하고 <아라비안 나이트 신밧드의 모험>(1962년)(이것도 나에게는 흥미없는 일이었다)를 마지막으로 나는 토에이 동화를 그만뒀다.
무시 프로덕션에서 데즈카 오사무와 드디어 만나다
토에이 동화를 그만둔 나는, 잠시 실업보험을 받아가며 어슬렁 거리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랬더니 그만두고 3개월 정도 지났을 때 츠키오카 사다오 군이 왔다. 츠키오카 군은 원래 데즈카 선생님의 어시스턴트를 하고 있었지만, 데즈카 선생님이 <서유기>(1960년)의 제작에 참가한 것이 인연이 되어 토에이 동화에서 일하게 된 사람이다. 이 몇 년 후에는 오리지널 TV 애니메이션 <늑대소년 켄>(1963년)을 다루게 된다.
세간에서는 NHK <모두의 노래>의 <북풍소년 칸타로> 등의 애니메이션을 다루었다. 애니메이션 작가로서 현재도 활약 중이다. 토에이에 들어가고 나서 순식간에 천재 애니메이터로 유명해졌다. 그 츠키오카 군이 "너, 데즈카 선생님에게 가."라고. "데즈카 선생님이 뭐?"라고 물었더니 "데즈카 선생님이 애니메이션을 할 거야."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데즈카 선생님에게 발길을 옮기게 되었다. 아무래도 츠키오카 군은 '그는 능숙하니까 꼭 확보해 두는 편이 좋다'고 데즈카 선생님에게 입김을 불어넣은 것 같았는데, 데즈카 선생님은 첫 대면인 나를 보고 "깃짱, 기다리고 있었어요!"라고 갑자기 친근하게 이름을 불렀다.
어렸을 때부터 팬이었던 데즈카 선생님이었지만, 그 기쁨보다도 "어, 만난 적도 없는데 깃짱인가요!" 라는 신기한 놀라움이 교차하는 첫 대면이 되었다. 그리고 그 날부터 바로 나는 <어느 길모퉁이 이야기>의 현장에 들어가게 되었다.
<어느 길모퉁이 이야기>, 1962년 공개. 데즈카 오사무가 애니메이션 제작을 위해 설립한 무시 프로덕션의 첫 번째 작품이 된다. 제작과 원안을 데즈카 오사무가 담당하고, 연출은 야마모토 에이이치와 사카모토 유사쿠의 공동. 어느 길모퉁이에서 보이는 소녀의 모습과 곰인형, 가로등과 심술궂은 나방, 청년과 소녀가 그려진 두 장의 포스터의 모습을 대사없이 영상과 음악만으로 그려냈다. 제17회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제1회 오후지 노부로 상 수상.
데즈카 선생님의 차고 2층과 별채를 사용한 스튜디오에는 감독인 야마모토 에이이치 씨가 있고, 애니메이터인 사카모토 유사쿠 씨도 있었다. 그 외 스태프를 넣어도 다섯 명 정도의, 데즈카 공방 같은 소규모 현장이었다. 제작 스케줄적으로는 슬슬 원화에 들어가려는 시기였다. 사카모토 씨는 원래 토에이 동화에서 함께 일을 한 적도 있어서 "깃짱이 와줬으니 '나방'을 해주지 않을래?"라고 해서 시키는 대로 나방을 그렸다. <어느 길모퉁이 이야기>는 매우 디자인화된 비주얼로 되어 있고, 저것은 야마모토 씨의 센스와 토에이 커머셜 애니메이션 부문에 있던 사카모토 씨의 센스가 잘 짜여져 합쳐진 작품이었다.
전체적으로는 움직이는 부분을 줄인, 리미티드 애니메이션 스타일의 작품이었다. 나는 나방을 움직이는 것에 처음으로 리미티드풍의 움직임을 궁리해 보았다(나방이 이동할 때, 첫 번째 그림과 마지막 그림이 연결된 듯한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빠르게 움직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오바케'라고 하는 기법을 사용해 보았다). 그리고 <어느 길모퉁이 이야기>의 완성되던 때에 부상하던 것이, 일본 아니메의 시작이 되는 <철완 아톰>의 TV 애니메이션화 기획이었다.
애니메이션에서 아니메로의 전환
데즈카 선생님은 <철완 아톰>을 애니메이션화함에 있어서, 그리는 그림의 매수를 줄이는 독특한 방법을 채택하기로 결정했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에피소드는 제1장에 기록한 대로다. 나는 처음에는, 데즈카 선생님이 애니메이션을 다루는 거니까 분명 디즈니 같이 정밀한 것을 만들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합리화라기보다 생략된 애니메이션이라는 기법에는 일종의 의심감을, <철완 아톰>의 1화가 완성될 때까지 계속 품고 있었다.
하지만, <철완 아톰>의 1화는 그런 의심감을 날려버리는 재미였다. 거기에는 데즈카 만화와 공통된 드라마의 재미가 있었던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데즈카 만화를 읽고 있었고, 데즈카 만화가 다른 만화와 다른 것은 '즐겁다'거나 '재미있다'가 아니라 좀 더 다른 무언가를 전달하려 하는 점이다. 그렇게 느꼈다. 그래서 다른 만화를 읽을 때와 데즈카 만화를 읽을 때는 접하는 방식이 달라졌다. 예를 들어 데즈카 선생님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만화화했다. 그것은 과연 아이가 읽을 만화를 생각해서 그렸던 것일까. 스토리를 다이제스트로 각색했다고는 하지만, 거기에는 확실히 도스토옙스키의 추출물이라고 할 만한 것을 넣었다.
<아톰> 이전에 TV에서 방송되었던 애니메이션은 미국제 개그물이 중심이었다. 그에 반해 데즈카 선생님이 30분 범위라는 긴 방송시간을 선택해 이야기의 재미를 주제로 한 TV아니메에 임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도전이었다고 생각한다. <아톰>에 의해 나의 관심은 애니메이션에서 아니메로 크게 전환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 안에 있는 영화 지향과 연결되어, '감정 있는 영화를 만든다'는 목표에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제3장에서 자세히 이야기하고 싶다.
애니메이션은 신의 업무
2006년부터 나는 대학의 애니메이션 학과에서 '애니메이션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수업을 하게 되었다. 그 안에서 '움직임'의 표현을 테마로 한 수업 커리큘럼을 구성했다. 학생 스스로 애니메이션의 원리를 연구하는 연습이다. 애니메이션이라고 해도 캐릭터 같은 건 나오지 않는다. 학생이 사용해도 되는 것은 사각형뿐. 이 사각형을 움직여 보라고 하는 것이다. 연습의 이름은 '원리연습/속도, 궤도, 변형'. 시각이 '움직임'을 인식하는 기본 요소인 속도, 궤도, 변형의 성질에 따라 어떤 인상이나 심리적 효과가 생기는지, 그것을 실험하고 연구하는 것이 목적이다.
사각형만으로 무엇을 표현할 수 있느냐며 의심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1분 정도의 작품이라면 사각형이라 해도 '속도, 궤도, 변형'의 세 가지 요소를 조합해서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여러 가지를 표현할 수 있다. 아니,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조금 지나치게 단순화된 말투일지도 모른다. 엄밀히 말하면 이 연습에서 사용하는 사각형(원기형이라고 부르고 있다), 움직임의 세 요소는 모두 극도로 추상화된 것이며 , 추상화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에 비유해서 표현이 가능한 것이다.
개념으로서의 형태. 개념으로서의 움직임. 그것들을 조합하여 무슨 일이 일어날지 확인해 나가는 것을 통해 애니메이션의 본질이 부각된다. 생명이 느껴지는 캐릭터를 그리려고 할 때, 이 추상화된 형상과 움직임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가 큰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무시 프로에서 매수를 많이 쓰지 않은 '정지된' 그림 중심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시작한 결과로 보이기 시작했다. 애초에 토에이 동화에서 나에게 애니메이션 움직임의 기초를 가르쳐 준 것은 오오츠카 야스오 씨였다.
오오츠카 씨의 말 중에서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것이 있다. 어느 날, 오오츠카 씨는 말했다. "스기이 군,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은 신의 업무야." "무슨 말씀이세요?"라고 되묻자 "그림이라는 건 원래 생명이 없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을 거야. 그런 생명이 없어야 할 그림이지만, 그림을 그리고 한 프레임 촬영을 하면 거기에는 생명이 깃들지. 생명이 없는 것에 생명을 준다. 그야말로 신의 일이겠지."
나는 그때, 이 사람은 굉장히 스케일이 큰 말을 하는구나 생각했다. 실제로 일을 시작해 보니, 애니메이터라는 일에는 바로 그와 같은 측면이 있었다. '생명이 없는 것에 생명을 준다'. 매우 논리적인 오오츠카 씨가, 애니메이션 기술을 가르칠 때 그러한 가르침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더욱 설득력이 있었다.
애니메이터로서 한 발짝 내딛다
토에이 동화에 들어가 3개월 동안은 양성 기간이었다. 그리고 양성 기간이 끝나고 처음에 배속된 곳이 오오츠카 씨의 반이었다. 나는 그 당시에는, 내가 양성에서 낙제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오오츠카 씨에게 배속된 것이라 생각했다. 양성기간 때 선생님은 키타 마사타케 씨. 당시 토에이 동화의 애니메이터는, 다이쿠하라 아키라파와 모리 야스지파 두 흐름으로 나뉘어 있었다. 대충 설명해 보자면 다이쿠하라 씨는 거칠고 다이나믹한 스타일, 모리 씨는 섬세하고 세련된 움직임이 특징이었다. 내 동기는 대부분 모리 씨의 반에 소속되었지만, 나만은 어째서인지 다이쿠하라 씨의 그룹에 있던 오오츠카 씨 아래에 배속되었다.
어째서인가 라고 썼지만, 사실 짐작이 가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양성기간의 마지막에 있던 졸업시험이 이유가 아닐까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졸업시험 과제는 두 가지. 하나는 고력(옛날 중국의 노동자)이 큰 나무망치를 들고 말뚝을 박는 동작을 그리라는 것이었다. 우리 신인 애니메이터는, 우선 '동화'라는 공정을 담당한다. 동화맨의 일에는 크게 '원화(움직임의 핵심이 되는 그림)와 원화 사이에 들어가는 중간 포즈를 그리는 것'과 '예쁜 선으로 그림 전체를 클린업하는 것'이 있다.
양성기간이 끝나기 전에, 이미 제작에 들어간 <백사전>의 제작현장을 견학하게 해줬다. 그때, 토리마루 군유키 씨라는 선배가 레서판다가 크게 점프하는 장면의 동화를 그리고 있었다. 움직임이 정성스럽게 그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파랑연필, 빨강연필을 구분하여 사용한 연필 선 자체가 매우 아름답다는 것에 압도당했다. 참고로 토리마루 군유키 씨와는 이후 오오츠카반에서 자리를 나란히 하게 되는데, 그 후 이 선배는 패션 디자이너로 전향했다. 영국 왕실의 어용인 <노먼 하트넬>에서 대처 영국 총리나 다이애니 왕비의 의상을 디자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 말뚝박기 과제 말이지만, 이미 '나무 망치를 휘두른 포즈'와 '나무 망치가 말뚝에 내리쳐진 포즈' 두 장이 그려져 있었다. 이 두 장이 원화니까, 이 두 장 사이에 동화로 10장 정도의 중간포즈를 그리고(이것을 애니메이션 업계 용어로 '나카와리를 넣는다'고 한다), 전체를 클린업하라는 것이다. 나는 기뻤다.
어쨌든 양성기간 중에는 캐릭터다운 캐릭터를 그릴 수 없었다. 양성기간 중의 과제는 개성 없는 캐릭터를 걷게 하거나, 해초를 매수를 써서 차분히 움직이게 하거나 같은 무미건조한 것뿐이었기 때문에 인간을 그릴 수 있는 것이 굉장히 기뻤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어떤 식으로 움직임을 그릴지는 어려웠다. 나는 생각했다. 나무 망치는 무거울 테니, 내리친다면 한 순간이다. 거기에 몇 장이나 그림을 넣으면 천천히 휘두르는 연기가 되어 버린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뿐이라면 기본으로 정해진 매수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마음대로 원화를 더했다. 휘두른 망치가 무거워서, 뒤로 휘두르는 동작 원화를 더 쓰는 것을 통해 규정된 매수로 완성했다. 과제는 하나 더 있었다. 이쪽은, 소년이 다이빙대 위에서 물로 뛰어들 때까지의 모습을 옆에서 본 앵글로 그린다는 것이었다. 이 과제에서는 자유롭게 다이빙 하는 모습을 그리기만 하면 되는데, 재미없다고 생각한 나는 뛰어든 후 본래라면 물보라가 튀었을 곳에 판자조각의 파편을 그렸다. '뛰어들었지만 아래는 물이 아니라 판자였다'는 개그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하고 싶은 대로 했으니, 나는 분명 내가 낙제 취급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좀 더 성실하게 했으면 좋았을까 생각하면서, 양성을 받고 있던 1층에서 <백사전>의 스태프가 있는 2층으로 올라가니, 사냥모자를 쓴 사람이 책상을 옮기고 있었다. 그것이 오오츠카 씨였다. 나중에 남에게 들은 말이지만, 내가 오오츠카반에 들어간 것은 오오츠카 씨가 나를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오츠카 씨는 아무래도 졸업시험에서 개구쟁이였던 나를 재미있게 봐주었던 모양이다.
오오츠카 씨에게 호되게 당한 일
나는 오오츠카 씨 밑에서 바로 <백사전>의 동화에 임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내가 맡은 것은 축제 장면의 동화였다. 축제 인파가 다리 위를 건너는 장면. 흐르는 강의 수면이 흔들리고, 수면에 비친 빛이 드문드문 흔들리는 컷이다. 이 드문드문에 나카와리를 넣는 것이 첫 번째 일이었다. 나는 정중하게 나카와리 하기로 했다. 최대한 신경 써서 마무리하고, 오오츠카 씨에게 가져갔다. 그랬더니 "안 되겠네"라고 말했다. 아직 선이 거친가 싶어서 연필을 깎고 예쁜 선을 그려서 두 번째를 가져갔다.
이번에도 하나하나 보더니 "안 되겠네"라는 오오츠카 씨.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잘 몰랐다. 어쨌든 그리는 것은 드문드문 뿐이다. 확실히 토리마루 씨 같은 선은 그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건 분명 선 연습을 시키는 거구나' 생각하고, 더 고쳐서 세 번째로 가져갔을 때 갑자기 오오츠카 씨가 말했다. "너, 이 강 어느 쪽으로 흐르고 있어?" 네? 라고 생각했다. 그런 건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오츠카 씨는 계속했다. "너 말이야, 양성소 끝나고 처음으로 건네받은 게 이 원화인데, 깔보고 있잖아. 애니메이션을 깔보면 안 돼. 이 그림은 화면 위쪽에 인파가 그려져 있어서 정교한 그림이라고는 해도, 화면의 중심에 있는 건 아니야. 화면의 대부분은 배경으로 그려진 다리 아래의 풍경이고, 강이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그러면 화면상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은 강의 드문드문 뿐. 하지만 그 드문드문 만으로도 표현을 할 수 있는 건 많이 있잖아? 애초에 강이라는 건 그 깊이에 따라 수면의 상태가 바뀌는 거지. 즉 이 드문드문으로 이 강이 흐르는 방향, 깊이까지 그릴 수 있는 거야. 그게 애니메이션이야."
실전 첫회부터 호되게 당했다. 오오츠카라는 사람은 모든 것에 있어서 그런 사람이었고, 어떤 일에 대해서도 매우 논리적으로 가르쳐 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첫 선생님이 오오츠카 씨고, 애니메이션에 대한 기본적인 사고방식을 제대로 가르쳐 준 것은 훗날의 나에게 매우 큰 힘이 되었다.
오오츠카 씨는 매우 파워풀한 사람이었다. 당시 장편 애니메이션 현장은, 동화는 하루에 15장 정도 그리면 끝나는 듯한(나 같은 경우는 꽤 땡땡이쳤던 탓도 있지만) 느긋한 시대였다. 그런 가운데 오오츠카 씨는 하루에 100장 정도의 동화를 아무렇지도 않게 그려버릴 정도의 마력이 있었다. 오오츠카 씨가 큰 소가 우르르 달려오는 장면의 원화를 그리고 직접 동화도 넣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오오츠카 씨는 밑그림을 그리지 않고 계속 동화를 그려간다. 자세히 보면, 소의 얼굴 크기나 얼굴 자체가 다르기도 하다.
오오츠카 씨에게 "이거 좀 얼굴이 다른 거 아니에요?"라고 물었더니, "이건 한 프레임 촬영으로 움직이는 거야. 한 장 한 장 얼굴의 차이는 보이지 않아"라고 한다. "이 장면은, 소가 무게감을 가지고 달리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게 중요해. 그러기 위해서는 데포르메가 필요하지. 얼굴을 비슷하게 하는 걸 고집하고, 정돈하는 데에 너무 힘을 주면 소의 무게감이 나오지 않아. 애니메이션은 무게감을 나카와리의 타이밍과 데포르메(변형)으로 낼 수 있어. 그때 중요한 건 어딘가 흐트러져 있는 거야."
나는 결국 그림을 정리하는 것에 집착해, 애니메이터로서는 오오츠카 씨가 말하는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오오츠카 씨는 역시 타고난 애니메이터로 태어난 듯한 사람이었다.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애니메이션을 목표로 그림을 그려왔고, 그림을 그리는 것에는 상당한 자신감이 있었다. 같은 세대 중에서는 돋보이게 그릴 수 있는 편이라고 자만하고 있었다. 오오츠카 씨도 가끔은 "너는 잘해"라며 칭찬해 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진작에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동화라면 그나마 괜찮았다. 오오츠카 씨 원화의 지시에 따라 그대로 치밀하게 일을 하면 막힘없이 일을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오츠카 씨와 같은 스케일을 가진 원화가는 도저히 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이것은 틀림없이 하나의 좌절이었다.
풀 애니메이션과 일본식 리미티드 아니메
토에이 동화에서 내가 배운 애니메이션의 기본은, 한마디로 말하면 자연을 본보기로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낙엽이 떨어진다. 그 물리현상을 단순히 그림으로 묘사한 것만으로는 낙엽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낙엽이 떨어지는 것처럼 느끼게 할 것인가. 거기서 필요한 것은, 형태나 움직임의 타이밍을 궁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야말로 낙엽다운 낙엽에 가까워져 간다. 이것의 뿌리를 따라가면 디즈니가 하던 일에 이르게 된다.
물을 얼마나 물답게, 불꽃을 얼마나 불꽃답게 그리는가. 그 질감과 양감을 형태나 타이밍으로 표현하려는 사상. 이른바 풀 애니메이션(1초를 위해 24장 혹은 12장의 그림을 그리는 스타일)이란 단순한 1초간 그림 매수의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자연에 있는 움직임을 본보기로 진짜답게 움직이는 것처럼 그리는 기법을 가리키는 것이다. 내가 토에이 동화에서 배운 상식과 전혀 다른 것이, 무시 프로덕션에서 종사하게 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방법이었다.
<철완 아톰>의 제1화 '아톰 탄생'에서 나는 원화를 담당했다. 하지만 완성될 때까지 나는 그 완성도에 회의적이었다. 어쨌든 기본 방침이 '움직이지 마'인 것이다. 예를 들어 아톰이 깜짝 놀라는 장면. 2초 반에서 3초 정도 걸리는 것으로 지정되어 있다. '내가 앗! 하고 놀란다면 이 정도의 연기를 하겠지'라는 상정을 하고 원화를 그리면, 데즈카 선생님으로부터 몸은 정지그림으로 괜찮다는 지시가 나온다.
"선생님, 그럼 어디를 움직이면 좋을까요?"라고 묻자, "깃짱(내 애칭이다), 아톰의 눈만 움직이면 됩니다. 눈을 딱 2, 3장으로 감고 열게 하면 그걸로 된 거예요."라고 한다. 이쪽으로서는 '어? 그걸로 3초라니?'라는 것이 솔직한 감상이다. 토에이 동화의 사고방식으로 연기를 그리면 어떻게 생각해도 30장 정도의 그림이 필요하다. 선생님의 의도를 잘 모르겠다. 그래서 데즈카 선생님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솔직히, 이런 움직이지 않는 애니메이션이 재미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임한 제1화의 시사본이었지만, 그 1호 시사를 보고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 그림이 거의 움직이지 않는 1화가 굉장히 재미있었던 것이다.
<철완 아톰>, 1963년 방송. 일본 최초의 30분 프레임 TV 아니메. 일곱 가지 힘을 가진 10만 마력의 소년형 로봇인 아톰의 활약을 그린다. 최고 시청률 40%를 넘는 인기 프로그램으로, 4년에 걸쳐 방송되었다. 3콤마 촬영(1초당 필요한 그림을, 3분의 1에서 3분의 2 정도로 줄인다), 뱅크 시스템(한 번 사용한 셀화를 몇 번 사용), 그림의 일부만 다른 셀로 움직이는 등의 생력화를 구사하여 당시에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30분 매주 방송을 실현했다. 그 외, 과자 메이커의 머천다이즈 전개 등, 크리에이티브 & 비즈니스의 양면으로 이후의 아니메에 미친 영향은 크다.
<철완 아톰>이라는 작품은, TV 내에 일본산 30분 프레임 아니메라는 비즈니스적인 시장을 개척했다는 의미에서도 매우 뜻깊은 작품이지만, 그 움직이지 않는 아니메에는 더 깊은 의미가 있었다. <철완 아톰>이 토에이 동화의 장편과는 전혀 다른 발상으로 만들어진 것은 설명한 대로이지만, 거기에 있던 것은 풀 애니메이션의 부정이 아니라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풀 애니메이션이 '자연을 본보기로, 움직여야 할 것은 모두 움직이게' 하는 사상인 반면, <철완 아톰>에 원류를 가진 일본류 리미티드 아니메는 종종 '멈춤으로 보여주는' 사상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확실히, 일본류 리미티드 아니메에서는 본래 연기를 해야 하는 부분도 멈춤(얼굴이나 몸은 움직이지 않고, 대사를 위해 입만 움직인다)으로 끝나 버리는 경우가 있다. 또, <철완 아톰>에서는 아톰이 걸어도, 오챠노미즈 박사가 걸어도 연기는 변하지 않는다. 금속제인 아톰의 움직임도 그 질감, 무게감이 전해지지 않는다. 이것은 움직임의 '기호화'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아니메라는 회화의 영상 표현의 본질은 그렇지 않다. <철완 아톰>은 그림이 멈춰 있어도 재미있었다.
그것은 곧 '애니메이션에 있어서 움직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라는 의문으로도 이어진다. 일본류 리미티드 아니메란, '자연을 본보기로 삼는 것'에서의 탈피이며 '움직임의 의미를 디자인화하여 파악한다'는 것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움직임의 기호화가 허용된다면 자연의 모범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움직임을 창작해도 OK라는 것이다. 본래라면 애니메이션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졌던 그림체를 도입할 수도 있고, 이론에 맞지 않는 거대 로봇이 난무해도 허용된다.
심지어 그림이 멈춰 있어도 카메라 워크나 음향으로 화면에 생명을 준다는 발상도 생긴다. 거기에는 지금까지의 애니메이션에는 없는 새로운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디즈니를 시작으로 오카와 히로시 사장이 토에이 동화에서 꿈꿔왔던 애니메이션 사상을, <철완 아톰>은 상당히 난폭한 방식으로 깨뜨렸다. 내 충격의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거기로부터의 해방도 의미했다. 나는 <철완 아톰> 이후 <오공의 대모험>(1967년), <도로로>(1969년)에서 감독을 맡고, <천일야화>(1969년), <슬픔의 벨라돈나>(1973년)에 애니메이터로 참가했지만 어쨌든 이 '움직인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한다'는 자세는 일관되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것=마음을 보이게 하는 움직임
<오공의 대모험>, <도로로> 등의 작품을 만들 때, 감독으로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작품마다 움직임의 테이스트를 바꾸자는 것이었다. 아니메에는, 우선 조형된 캐릭터가 존재한다. 그 조형과 움직임을 어떻게 싱크로시켜 나갈 것인가. 그것이 작품의 표현을 결정한다. <오공의 대모험>은 슬랩스틱이어서, 더 이상 '자연을 본받은'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채 자유분방한 움직임으로 그렸다.
<오공의 대모험>, 1967년 방송. 데즈카 오사무의 <나의 손오공>을 밑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애니메이션판은 철저한 슬랩스틱으로 제작되었다. 손오공, 팔계, 사오정, 삼장법사에 타츠코를 더한 레귤러 멤버가, 요괴변화부터 갱단까지 걷어차며 여행을 한다. 높은 시청률로 시작했지만, 중간부터 <황금박쥐>가 뒷방송이 되어 고전. 후반에는 시청률 부양을 위한 노선 변경도 이루어졌고, 결국 총39화로 종료되었다. 1970년에 <내일의 죠>로 첫 감독이 되는 데자키 오사무가 각 화 담당으로 실력을 발휘했다.
또, <도로로>에서 고집한 것은 사람이 사람을 벨 때의 심리였다. 베지 않으면 자신이 죽임을 당해 버린다. 그런 상황에 놓인 인간의 심리란 도대체 어떤 상태인가. 내가 스태프에게 말한 것은, "들어올린 칼을 내리치는 것은 단순한 물리현상이다. 중요한 것은 칼을 드는 순간이다."라는 것. 칼을 내리치는 액션 그 자체에는 별 의미가 없다. 사람을 베려는 의지는, 들어올릴 때의 액션에 나온다. 왜 베려고 했는지를 느끼게 하는 것은, 칼을 드는 그때이다. 인간의 움직임을 빗대어 휘두르는 동작을 그저 리얼하게 그리는 것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마음을 보이게 하는 움직임을 그려줬으면 하는 것이다.
(본편)
(파일럿 필름)
<도로로>, 1969년 방송. <게게게의 키타로>가 계기가 된 요괴열풍에 탑승한 데즈카 오사무가 그린 동명 만화가 원작. 전국시대, 아버지의 야망 때문에 몸 48곳을 마물에게 바쳐진 햐키마루가 마물과 싸워 자신의 몸을 되찾아 간다. 도로로는, 햐키마루와 함께 행동하는 아이의 이름. 어중간한 형태로 끝난 원작과는 달리 애니메이션판은 애니메이션판 나름의 최종회를 맞이했다. 방영 전 파일럿 필름은 컬러로 제작되었지만, 스폰서로부터 피가 너무 생생하다는 클레임이 나와서 본편은 흑백으로 제작되었다. 제14화부터 제목이 바뀌어 <도로로와 햐키마루>가 된다.
예를 들어 <오공의 대모험>과 병행하여 독자제작으로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를 아니메로 만들려고 시도한 적도 있다. 이 질투심에 이끌린 남자를 그린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의 에센스를, 하얀 모래와 석고의 대안면만을 사용해서 그리려고 생각한 것이다. 그때의 주제도 움직임만으로 오셀로의 심리를 표현할 수 없는가 하는 것이었다. <오셀로>는 결국 여러 사정으로 완성되지 못했지만, 이런 추상화된 표현은 아니메만의 영역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밖에도, 예를 들어 카프카 등은 아니메로 해보면 재미있는 그림을 그릴 수 있지 않을까. <변신> 등은 굉장히 아니메로 그려보고 싶다. 아니메 표현으로 주인공인 독충의 존재감을 회화적으로 표현하는 방향으로 힘을 쏟는 것이 아니라, 카프카가 그리려고 하는 은유이자 현실감이 있는 상징적인 벌레, 그것을 추상적인 심리극으로 그려보고 싶다. 어쨌든, 그런 사고를 자각한 나는 그 후에도 애니메이터로서 일을 할 때는 일관되게 '추상화된 움직임을 통해 보이지 않는 정서를 전하는 것'을 테마로 임하게 되었다.
<천일야화>에서는 주인공 아르딘이 여자만 사는 섬을 방문하는 장면에서 남녀의 얽힘을 담당했는데, 이것은 감독인 야마모토 에이이치 씨의 권유방법이 좋았다.
<천일야화>, 1969년 개봉. 어른을 위한 애니메이션을 컨셉으로 내걸고 성교장면도 볼거리 중 하나로 둔 장편 애니메이션. 큰 토네이도가 바그다드를 덮친 소란스러움에, 물 파는 청년 아르딘이 노예시장의 미녀 밀리엄을 데려가는 것에서 아르딘의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캐릭터 디자인을 현재 <호빵맨>으로 알려진 야나세 타카시가 담당했다. 애니메이션과 드라마, 시네라마를 조합한 <아니메라마>라는 신조어를 브랜드로 사용하여 성인용임을 어필했다. 이 작품의 히트에 힘입어 <아니메라마> 제2탄 <클레오파트라>(1970년)가 제작되었다.
'리얼하게 남녀의 얽힘을 그려줘'라는 것은 아니다. 섹스라는 것은, 외부에서 보면 단순한 물리운동에 불과하다. "그게 아니라 거기에 있는 마음, 섹스하고 있는 내면을 느끼게 해줬으면 좋겠어."라고 야마모토 씨는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니 "해주자"라고 생각해 버리는 것이 내 버릇이다. 그래서 그릴 때는 '섹스는 좋지'라며 그 쾌락을 그리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우선, 섹스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다음으로 그 쾌감이란 어떤 생리현상일까 하고 추구해 나간다. 그렇게 이치를 따지면서 섹스라는 생리적인 것을 조형화해 간다.
그런 의미에서 시작해 그것이 표현이 되고, 최종적으로 관객에게 전해지는 것으로 정서를 느끼게 하는 것이 되면 된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아니메라마 제2탄인 <클레오파트라>에서 데즈카 선생님과 공동감독이 된 야마모토 씨는, 여기서도 성교장면을 나에게 의뢰해 왔다. 테이스트는 다르지만 '평범하게 리얼한 여자의 알몸을 그리는 것은 지루하다'는 발상은 같다. 그리고 다음 <슬픔의 벨라돈나>에서 야마모토 씨는 전염병 페스트를 그려달라고 말해 왔다.
<슬픔의 벨라돈나>, 1973년 공개. 원작은 쥘 미슐레의 <마녀>. 중세 프랑스 농촌을 무대로 남편을 위해 악마에게 육체를 판 여성 잔느의 슬픈 운명을, 에로티시즘과 서정을 통해 그려낸다. 삽화가 후카이 쿠니의 일러스트를 사용하여 정지화와 카메라 워크로 보여주는 실험적인 스타일을 채용했다. <아니메라마> 3부작 중에서는 유일하게 데즈카 오사무가 노터치한 작품. 캐치프레이즈에는 <아니메라마>가 아닌 <아니메로마네스크>가 사용되었다.
중세에 유럽을 석권한 페스트를 그려줬으면 좋겠다. 야마모토 씨는 이미지보드를 가져왔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미지였고 이대로 해달라는 것이 아니다.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한다. 야마모토 씨의 이미지라는 것은 당시 애니메이터에게 있어서 그리기 어려운 이미지뿐이었다. 그래서 야마모토 씨가 이미지한, 거리가 타르처럼 녹아간다는 이미지를 그리면서 페스트를 춤추게 한 것이었다. 페스트라는 재앙적인 것이 증식해가는 그 모습을 추상화해서 그린 것이다.
<슬픔의 벨라돈나>는 일러스트를 카메라 워크로 보여주는 부분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개성적인 작품이다. 그린 것은 일러스트레이터인 후카이 쿠니 씨. 유럽을 느끼게 하는 여성상을 그리게 한다면 이 사람밖에 없다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여서 야마모토 씨에게 소개했다. 후카이 씨의 그림이 메인인 영화이기 때문에, 나의 역할은 야마모토 감독이 그 장면에 담고 싶은 영화적인 생각을 어떻게 애니메이션 표현으로 해나갈 것인가 하는 애니메이션 감독으로서의 일이었다. 이것은 나에게도 매우 재미있는 일이었다.
영화를 통해 '영상언어'를 배운다
야마모토 에이이치 씨가 나를 재미있다고 생각해 준 것은 <어느 길모퉁이 이야기> 시절부터 평소에 봤던 영화의 비평을 이것저것 말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무시 프로에 들어갔을 무렵에는 나도 나름대로 영화공부를 하고 나름대로의 '영화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추상화된 움직임으로 표현되는 정서. 그것은 영상만의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드라마가 되지 않는다. 그러한 짧은 영상을 한꺼번에 하나의 영화언어로 만들려면 각각의 영상이 흐름 속에서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것은 골라낸 말을 연결해서 하나의 문장을 만드는 작업과도 비슷하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영상언어'라고 부르고 있다. 영상언어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작품제작은 없다. 그것이 가능해야 생명이 느껴지는 캐릭터가 일관된 인물상으로서 관객에게 전해진다. 그리고, 영상언어를 익히기 위해 큰 참고가 된 것이 그 당시에 본 대량의 영화다. 예를 들어 어떤 샷의 레이아웃(구도)를 취할 때, 왜 그 구도를 취할지 생각하지 않고 왠지 모르게 결정해 버리면 왠지 모를 샷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거기서 작가가 의도를 가지고 구도를 선택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영상언어를 구성하는 언어로 기능하며 명확한 전달을 한다.
인간의 시각은, 인간이 의식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적어도 몇 배는 되는 정보의 양을 순간적으로 감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눈앞의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의 부드러움에 대해서는 만지지 않고 느낀다. 그것은 과거의 경험 정보를 뇌가 순간적으로 검색해서 해석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뇌의 힘이라면, 즉 영상언어라는 것은 말로 파악하기 전의, 무의식의 영역에 구도나 영상의 고단함으로 작용해 나가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이러한 영상관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누벨바그였다. 1950년대 후반에 프랑스에서 일어난 이 새로운 영화운동은 그야말로 새로운 영화언어를 만들어내는 운동이기도 했다. <어느 길모퉁이 이야기> 시절에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대히트하고 있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원작으로, 뉴욕을 무대로 이탈리아계와 푸에르토리코계 소년들의 항쟁과 그에 희생되는 소년소녀의 비애가 그려진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교묘하게 각색한 내용으로, 지금도 영화 베스트라 하면 상위에 얼굴을 내미는 작품이다.
하지만, 나는 당시 이 작품을 평하며 '저런 건 영화가 아니다. 저런 건 무대에서 무대에서 할 수 있는 걸 영상으로 했을 뿐이다.'라고 비판하고 있었다. 내가 영화다운 영화라고 생각한 것은, 예를 들면 <비오는 날의 만남(모데라토 칸타빌레)>(1960년, 피터 브룩 감독)와 같은 영화다. 원제는 <모데라토 칸타빌레>라는 피아노 연습곡에서 가져왔으며 잔 모로와 장폴 벨몽도가 주연을 맡았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이 원작이다.
프랑스의 시골마을에 제철소장의 아내가 있다. 그것이 잔느 모로. 그녀가 어느 날, 카페에서 한 여자가 살해된 현장에 있게 된다. 그녀가 신경이 쓰여서 다음날도 카페를 방문하면, 그곳에서 제철소의 직원인 장폴 벨몽도와 만나 연애관계가 된다. 당연히 두 사람은 쉽게 만날 수 없다. 그런 가운데 나오는 이런 컷. 단지 카메라가 밤의 그녀의 저택 밖을 쭈욱 움직이며 PAN(가로이동)한다. 잘 들으면 약간 발소리가 들어가 있다. 거기에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저택 앞을 카메라가 이동할 뿐인 컷은 그 후에도 몇 번 나오지만, 그때는 발소리도 없다.
공장직원이 그녀에게 마음이 있는 것을 그린 샷이다. 잔느 모로와 장폴 벨몽도는 만남을 거듭하면서 서두의 살인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죽인 남자와 살해당한 여자의 마음을 상상해 간다. 그 이면에서는 서로에 대한 마음이 높아져 가지만, 대사의 수만큼은 스스로의 마음을 말하는 대사는 적다. 더욱이 두 사람이 있는 방에서부터 바깥 강 건너 풍경의 롱샷까지 카메라를 멈추지 않고 원컷 PAN으로 연결한다. 영상과 영상의 조합에 의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두 사람의 마음이 스며나오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표현이야말로 영화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고, 영상이 언어처럼 조립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영화에서 생명이 느껴지는 드라마를 그려낼 수 없다. 여담이지만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듀얼>(1971년, 1973년 일본 개봉)을 처음 봤을 때 이 감독은 영화계에서 대성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스필버그 감독이 영화가 아니면 말할 수 없는 드라마를 훌륭하게 작품으로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대 트레일러에 쫓기는 승용차라는 것밖에 없는 이야기를, 거의 인간을 등장시키지 않고 그저 영상으로 보여준다. 무대에서도 문학에서도 불가능하고 영화에서만 그릴 수 있는 내용을, 영화만의 영상언어를 사용해서 말하고 있다. '이것은 영화를 잘 아는 감독이다' 하고 감탄했다.
귀한 글 정리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