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중전기 (山中傳奇/ 1979) 호금전감독 올한국로케 영화. 스포일러 있음.
산중전기는 호금전감독이 우리나라에 와서 찍은 영화다.
이소룡이 나오면서 주류에서 밀려난 호금전감독은 제작비 조달에 난항을 겪었고,
우리나라에서 제작비를 대준다는 말에 우리나라에 와서 찍은 것이라고 하는데, 세세한 사연은 잘 모르겠다.
B급 공포영화를 많이 제작했던 박윤교감독이 호금전의 협녀에 반해서
조감독을 자처했다고 한다. 호금전감독이 고마움을 느껴서 박윤교감독을 조감독이 아니라, 감독으로
크레딧에 넣었다고 하는데, 이것도 세세한 사정은 잘 모른다. 이 영화를 보면, 당시
우리나라 해인사, 불국사, 종묘, 비원 등 명소가 다 나온다. 그리고, 바위 계곡, 벼가 넘실거리는 논,
남한산성 등이 나오는데, 아마 호금전감독이 아니라 박윤교감독이 찍은 장면도 많을 것 같다.
산중전기는 말 그대로 산속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일들을 기록했다 하는 뜻인데,
산속이라는 데가 해인사, 불국사, 비원 등이니 별로 와 닿지 않는다. 아마 홍콩사람들이 홍콩영화를 볼 때 이런
느낌이 들 지 모르겠다. 아무튼 호금전감독이 만들어 낸 아주 기이하고 독창적인 이야기를 볼 수 있다.
고승이 쓴 불경이 있는데, 이 불경을 읽으면 마귀도 환생할 수 있고 사악한 귀신을 물리치는 힘이 있다.
고승은 이 불경을 복사하기 위해서 필경사 석준을 고용한다. 석준이 마귀들의 방해와 유혹을 받을 것은 분명하기에
소승은 유리알염주를 주고 결계를 만드는 법을 알려준다. 그리고, 어느 지역으로 가서 복사하라고 알려준다.
석준은 과거에 실패하고 필경사를 선택한 평범한 학자다. 자기가 지금 하는 일에 대해 보람도 자랑도 없다.
그는 산 넘고 물 건너 들판을 지나 산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다가 어느 정자에 잠시 앉아 잠깐 눈을 붙이려 한다.
그런데 나무를 짊어진 나무꾼을 만나 잠이 들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서게 된다. 그가 가르쳐 준 방향으로
따라가자 (남한산)성이 나온다. 거기에서 만난 선비가 길을 알려주는 대로 따라가자 노승이 말해 준 장소가 나온다.
이제 악몽 시작이다.
풍경이 너무 친숙하다. 해인사, 불국사 모두 지금 그대로다. 정겹기 그지 없는 벼들이 넘실거리는 논을 지나서
남한산성으로 가는 것이 모두 다 친숙한 풍경들이니, 감흥이 반감된다. 석준은 그 길을 걸어간 것이 아니라
버스를 타고 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니,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남한산성에 가서 산 속 깊은 데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일들을 그리니, 별로 실감이 안난다.
아주 안타까운 일이다. 영화 내용 자체는 기이한 일이 맞기 때문이다.
호금전감독 특유의 동양적 심오한 분위기와 유유자적한 동양화같은 화면이 강렬하다.
호금전감독의 가장 걸작이라고는 못하겠지만, 가장 호금전다운 영화다.
협녀의 주인공 서풍이 여기서는 악역으로 나온다. 서풍은 강직하고 아름답게 생긴 배우인데, 악역을 하니 또
악독해 보인다. 석준이 나뭇집에 자리를 잡고 복사를 시작하니, 서풍은 이웃집에 산다며 들락거리다가
순진한 석준을 유혹해서 단번에 결혼해 버린다. "허 허 이거 참......"하다고 갑자기 결혼까지 하게 된
석준은 나름 행복하다. 성미 까다롭지만, 수 틀리면 그런 것이고, 평소에는 잘 보살펴주고 도와준다.
석준은 자기가 아내도 잘 얻고 필경도 순조롭게 잘 되는 줄 안다. 하지만, 서풍은 마귀였다.
서풍은 석준이 필경하는 불경이 목적이고, 그 일이 끝나면 석준을 죽일 생각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쿵후액션영화가 아니라, 기이한 이야기를 적은 환타지물/공포물이다.
호금전영화답게 불교적인 환상의 세계를 그린다. 서극처럼 돈 많이 들여서 화려한 특수효과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심심해 보일 수도 있다. 오늘날 CGI에 비할 바 아니다.
하지만 대신, 예술가의 수작업같은 독창성과 아름다움이 있다. 유현하고 깊고 동양화적인 여백의 미가 느껴지는
그런 호금전 특유의 스타일이 아주 농후하다.
와이어액션을 보면 왜 서극이 호금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지, 이해가 간다.
와이어로 날아다니면서 싸우는 장면이 한 1분 정도 나온다. 아마 돈이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머리를 풀어헤친 귀신이 저 멀리에서 날아오는 장면은 참 무섭다. 공포영화의 한 장면이라서 무서운 것이라기보다는, "이야기 속으로"의 무서움을 준다.
깊은 산속이라서 집도 몇채 없다. 석준은 주막을 하는 의운이라는 여자를 만난다. 그녀는
석풍을 두려워하면서도 석준에게 당신 아내가 마귀라고 알려준다. 석준은 긴가 민가 하면서도 아내에게 의심을 품게된다. 눈치 빠른 아내는 석준과 의운의 일을 눈치채고 본색을 드러낸다. 더 이상 마귀인 것을 숨기지도 않는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집 몇채 없는 마을을 휘젓고 다닌다.
이것이 공포영화인가? 그럴 지도...... 석준이 무서운 마귀 서풍을 피해 도망가는 탈주극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의운도 귀신이고 길을 가르쳐주었던 선비도 귀신이고 다 귀신이다. 석준은 들끓는 귀신과 마귀들 한복판에
온 것이다. 고승이 이것을 몰랐을 리 없고, 일부러 이 장소를 가르쳐주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석준이 이 고난을 통해 불도의 세계로 가기를 고승은 바랬던 것이다.
이 귀신들을 계도하기 위해 귀신마을을 순례하는 승려가 나온다. 그는 징을 들고 다니며 징을 울린다.
이것도 무슨 상징이리라. 석준은 깊은 학문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귀신들이 들끓는 세계에서는 별 도움이 안된다.
석준은 하나 하나 이 귀신들이 왜 귀신이 되었는지 알게 된다. 모두 인과의 법칙 속에서 죄를 지은 사람들이었다.
석준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인간의 탐욕이 얼마나 추하며 얼마나 큰 인과응보를 가져오는지 목격하게 된다.
여기는 귀신이 들끓는 곳이 아니다.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이 삶을 지나고 죽음을 거치면서 증폭되고 또
증폭되는 세계다,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축소해 놓은 것이다.
와이어액션으로 하늘을 날아다니며 도술을 부리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오늘날 홍콩액션물의 아버지다.
하지만, 그의 와이어액션에는 동양적 미와 심오한 사고 그리고 불교적 세계가 있다. 보여주고 화끈한 인상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마지막 액션에서 모든 귀신들이 최후를 맞는다. 그들은 지옥에 떨어진다.
썩은 살점 덩어리들로 남아 버린 귀신들이 땅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이 장면은 스케일이 꽤 크다.
돈만 많았다면 이런 장면들 다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호금전의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이런 스케일 큰 특수효과가 아니다. 호금전의 독창적이고 심원한 비젼이다.
석준은 눈을 뜬다. 그는 정자에서 지금까지 잠이 들었었던 것이다.
이 꿈은, 고승이 석준을 위해 만들어준 안배였을 지 모른다. 석준은 꿈을 꾸면서 깨달음을 얻는다.
그는 필경을 마치고 불경을 건네준 다음 떠난다. 더 이상 그는 자기와 세상에 불만을 가진 선비가 아니다.
그는 생과 사의 이치를 깨달은 굳건한 자유인이다.
호금전 철학의 집대성이다. 무려 3시간이나 된다. 할 말이 3시간 분량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속도가 아주 느리다. 집약해서 스토리만 그렸다면 1시간도 충분하다. 하지만 그래서야 호금전의 그
심오한 세계를 그리지 못한다. 스토리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호금전이 만들어낸 심오한 불도의 세계를
그려내야 하기 때문이다. 느릿느릿 이야기를 진행시키면서, 큰 그림을 그리고, 마침내 생과 사와 인과응보의 거대한 세계로 확장시켜 나가는 것이다. 세계관 운운하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사라진 줄 알았다가 근래 발견되어 리매스터링이 되었다고 한다. 서풍은 얼마나 기뻤는지, 리매스터링 비용을 자기가 다 부담했다고 한다.
추천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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