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크로넨버그 <미래의 범죄 (2022)> 약스포 리뷰
※ 이 영화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며, 다만 극 중 핵심 스포일러는 직접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이 올해 2022년에 선보인 <미래의 범죄>는 그가 66년도 덴마크 영화 <술트>를 보고나서 영화 속 문구인 '미래의 범죄'를 제목으로 1970년에 실험적인 단편을 만들어 본 뒤, 같은 주제를 완전히 색다른 장편 SF 영화로 만들어보자는 생각에 1999년부터 구상한 작품이다. 또한 이번 작은 크로넨버그가 <엑시스텐즈> 이후 23년 만에 다시 내놓은 바디 호러 영화이기도 한데, 사전에 각오를 단단히 하고 보아야 할 영화로 꼽힌 이번 <미래의 범죄>에는 살인과 수술, 부검 장면 등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스크린에 피가 거의 등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로테스크한 느낌도 별로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로넨버그 감독 본인의 입이나 해외 시사회에서 일부 장면을 못 견디거나 공황 장애를 겪을 관객들이 있을 것이라는 말이 나온 것은, 이것이 서구권에서 스크린 속 폭력적 묘사에 있어 매우 민감한 대상인 '아이'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미래의 범죄>는 무엇보다도 크로넨버그 감독의 오리지널 아이디어에서 나온 영화인 만큼 흔히 A24 스튜디오 영화들을 떠오르게 하는 그런 호러 장르가 아니며, 다만 호러적 요소들을 활용해 미래의 인간 신체와 진보된 기술 사이의 관계, 그리고 인간들에게 적응을 요구하는 새로운 기술-진보적 현실과 자아 정체성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새로 설정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탐구하는 디스토피아적 SF 영화에 훨씬 더 가깝다.
일단 이 영화는 시각적으로나 대사적으로 어떤 서사를 지닌 매끄러운 영화를 보는 느낌이라기보다는, 마치 중간중간 비연속적으로 막이 이어지며 등장인물들이 대사들을 통해 자기 소개도 하고 극의 핵심을 설명해주는 연극을 보는 것처럼 진행된다. (느낌이 그렇다는 뜻이며 실제로 연극 형식이라는 것은 아니다.) 이번 영화는 그리스에서 촬영되었는데, 영화보다는 그리스에 가서 직접 보는 야외 연극으로 생각하고 보면 편하다. 따라서 뭔가 복잡하고 창의적인 영화를 기대한 관객이라면 이 영화의 구성이나 세트의 소박함 또는 단순함에 실망할 수 있는 면이 분명히 있지만, 그와 동시에 분명하게 해석하기 어려운 점들이 존재하는 쉽지 않은 영화이기도 하다.
크로넨버그 감독이 이 영화의 미스터리들을 어느정도 불친절하게 그대로 남겨놓고 있다는 점과, 또한 그가 영화 전체를 통해 인간 육체의 미래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전하고 싶어한다는 의도가 더 크다는 점을 이해하면서 이 작품에 적응한다면 감상에 큰 문제는 없는 편이다. 특히 주인공 커플을 연기한 명배우들인 비고 모텐슨과 레아 세두를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면서 이 영화를 본다면, 이들의 연기를 통해서 어느정도 감독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파악할 수는 있다.
예고편에 위의 해당 장면이 나오기 때문에 영화의 인트로에 대해서 잠깐 스포일러를 언급하자면, 쥬나(Djuna)라는 이름의 한 어머니가 자신의 아들 브렉켄(Brecken)을 베게로 질식사시킨 뒤 전남편인 랭 독트리스(Lang Doctrice)에 전화로 해당 사실을 통보하는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되는데, 이 사건이 지닌 의미가 영화 전체에서 중요한 중심이 되며 나중에는 주인공인 사울 텐서(Saul Tenser, 비고 모텐슨)와 카프리스(Caprice, 레아 세두)와도 중요하게 연결된다.
이에 관해 영화 전체의 키워드 중 하나가 '플라스틱'인데,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은 영화 개봉 전 인터뷰에서 "<미래의 범죄>는 인간 진화에 대한 '명상'이다. 인류 역사의 현재 결정적인 갈림길에서 인간의 몸이 인류가 야기한 문제들을 해결 가능하도록 진화할 수 있을까? 과연 인간의 신체가 단지 기후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실제로 성장하고 번성하고 생존하기 위해 인공 플라스틱들을 섭취할 수 있게 될까?"라고 미리 힌트를 준 적이 있다.
간단히 전체적인 내용을 설명하자면, 빈부를 막론하고 상처에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신체 돌연변이들이 존재하는 미래의 환경에서 '가속 진화 증후군'을 겪는 주인공이자 행위 예술가인 사울 텐서는 외과 의사이자 동료 아티스트인 카프리스의 도움으로 자신의 내부에 계속 자라는 비정상적 기관들을 한번씩 제거하는데, 이 첨단 기술을 활용한 장기 제거 수술을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인 예술 퍼포먼스로 승화시켜 최고의 거리 행위 예술가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그에게서 영감을 얻어 온 몸에 귀를 붙인 다른 행위 예술가도 존재하고, 심지어는 국가 기관의 직원들도 그의 예술에 매료된다. 비록 수술 중의 신체 훼손에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 그이지만, 오히려 섭취와 소화를 돕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이는 생체 의자에 앉아 식사를 하는 장면에서는 평범한 음식을 먹는 일에 매우 고통을 느끼는 모습을 보인다. 비고 모텐슨은 감정 연기 뿐만 아니라 이렇게 자신의 신체와 끊임없이 싸우는 사울 텐서의 신음과 고통스러운 몸짓 연기들을 영화 내내 잘 보여준다.
그의 예술가 동료이자 사울의 돌연변이 장기들을 꺼내주는 카프리스를 연기한 레아 세두는 이번 영화에 가장 찰떡같이 잘 어울리는 배우이며, 비고 모텐슨과 동일한 무게감을 보여준다. 그녀가 연기하는 카프리스는 '무에서 의미를 찾는 일'을 사명처럼 여기는 예술가인데, 여기에서 '무(emptiness)'란 그동안 의미가 없다고 취급되어 온 인간의 신체, 내부를 다 제거하고 나면 속이 텅 빈 껍질에 지나지 않는 육체를 뜻한다. 원래 사울과 함께 하는 퍼포먼스 쇼에서 장기를 수술해 꺼내는 연기자(performer)에 지나지 않았던 카프리스는 영화 중간에서 "이제는 지휘자(conductor)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데, 영화의 마지막 클라이맥스에서 실제로 스스로 행위 예술쇼의 지휘자가 되면서 그녀만의 '의미를 찾는 일'에 있어서 한 단계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캐릭터인 팀린(Timlin)이 등장하는 장면들은 예상보다 많지 않으나 흥미로운데, 그녀의 내면에 주체할 수 없는 떨리는 감정과 열정의 폭탄이 도사리는 듯한 긴장된 느낌으로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대사들을 발성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비록 국가장기등록위에서 근무하고 있는 공무원이지만 그의 상사인 위펫(Wippet)처럼 사울 텐서의 장기예술에 깊이 매료된 캐릭터이며, "수술이 새로운 방식의 섹스"라고 정의하는 등 자신도 이러한 새로운 유혹의 일부가 되고 싶어한다. 비록 사울 텐서는 팀린을 대하면서 그녀가 "관료적으로만 매력적인 여성"이라고 평하지만, 영화 후반부에서는 이 팀린이 사실 얼마나 그의 예술의 신봉자인지가 충격적인 방식으로 드러나게 된다.
앞에서 영화 초반부의 중요한 사건과 주인공 사울 텐서의 고통 두 가지를 얘기했는데, 이 두 가지가 후반부로 갈수록 서로 가까워지면서 영화 후반부에 하나로 이어지게 된다. 이것은 사울 텐서에게 '죽음을 뛰어넘어' 새로운 인간의 정의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는데, 사울 텐서는 여러 이유로 처음에는 탐탁치 않아 하지만 결국 클라이막스의 사건을 거치고 난 뒤 완전히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원래 예전의 사울 텐서는 외과 수술에 고통을 느끼지 못하지만 식사할 때는 오히려 고통을 느끼고 또 신체 훼손을 통해 카프리스와 성욕을 나누는 등 마치 새로운 인간 신체의 미래상을 보여주는 듯 했으나, 결말에 이르면 그는 실제로 완전히 새로운 생물학적 정의의 인간으로 재탄생하면서도 예전과 정반대로 오히려 더욱 더 본래의 인간다운 모습을 보이게 된다. 앞서 두 주인공을 믿고 영화를 보면 된다고 한 것처럼, 비고 모텐슨과 레아 세두는 서로를 깊이 신뢰하면서 끝내 새로운 인간 종의 미래에 관한 깨달음을 같이 얻게 되며, 이는 사울 텐서가 새로운 지평과 대의에 관한 '믿음'을 이야기하는 장면에서도 드러난다.
이번 영화의 포스터에 등장하는 비고 모텐슨 - 레아 세두 - 크리스틴 스튜어트 외에도 극 초반에 죽는 아이의 어머니와 아버지 역할을 각각 연기한 리히 코르노우스키와 스콧 스피드먼의 연기 또한 이번 영화에서 인상적이다. 깨진 부부로 등장하는 두 캐릭터는 쉽게 말해 이 영화 속 인간 신체의 미래에 대하여 서로 상반되는 입장을 대변하고 있으나, 크로넨버그 감독은 이 둘 다 결말의 메세지에 기여하게 만든다. 그러나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직장 상사 역을 맡은 배우 돈 맥켈러라던지, 행위 예술가들을 감시하는 형사 역으로 등장하는 배우인 웰켓 붕궤는 극 중 연기에 있어 아쉬운 모습들을 보여준다.
한편 이 영화에는 일부 죽는 캐릭터들이 나오는데, 왜 이들이 죽어야만 하는지, 어떤 주체가 이들을 죽이는지는 명확히 설명되지 않으나 일단은 무언가를 오해한 사람들이 죽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는 넓게 보면 앞에서 카프리스가 추구했던 신체의 그 새로운 '의미'를 진정으로 수용하지 않거나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는 이들이 죽임을 당한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볼 수도 있을 듯 하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에서 제시되는 새로운 신체의 의미를 통해 순수한 직관과 환희를 얻는 사람들, 또는 진정한 승자들은 결국 '예술가'들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사실은 이 문단에서 언급한 사람들 모두가 '미래의 범죄자'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말이다. 그렇게 예술가-주인공들을 통해 크로넨버그 감독은 이번 영화를 통해 원래 정신과 연관된 표현인 '내면의 아름다움(inner beauty)'이라는 말을 완전히 육체의 차원의 언어로 정착시킨다.
크로넨버그의 전작들이 연상되는 요소들도 나오는데, 카프리스와 사울이 조종하는 버튼이 달린 원격 컨트롤러는 <엑시스텐즈>의 그 생체 게임기를 연상시키는 면이 있으며, 또한 카프리스가 사울의 배에 달린 지퍼를 열고 애무하는 씬도 <엑시스텐즈>에서 주드 로가 제니퍼 제이슨 리의 허리에 있는 코드 부분을 핥으려던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레아 세두의 연기는 <비디오드롬>에서 성적 흥분을 위해 자기 신체를 찔러달라는 여주인공도 잠시 연상시키는 면이 있다. 또한 심지어는 1970년의 <미래의 범죄> 단편에서 마지막에 주인공이 아이의 행동을 따라하는 장면도 어떻게 보면 이번 영화에서 어느정도 비슷한 부분이 존재한다.
한편 음악의 경우,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OST를 맡기 이전부터 크로넨버그 감독의 전담 음악 담당자였던 하워드 쇼어는 이번 영화에서도 자신의 장기인 불협화음을 선보이지만, 이번 작품의 경우에는 인물 간의 감정적이거나 에로틱한 씬들에 흘러나오는 섬세하고 감성적인 선율들이 오히려 좀 더 인상적이다.
결론적으로 이번 <미래의 범죄>는 영화 설정상 전혀 크로넨버그의 과거 이름난 바디호러 영화들만큼 임팩트가 있거나 기괴하거나 잔혹하거나 외설적이지 않으며, 현실-가상의 모호한 경계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고, 또 서사적인 재미 자체도 분명히 좀 더 약한 영화이다. 그렇지만 크로넨버그 감독은 분명히 이번 영화에 본인의 커리어를 지배하던 많은 생각과 철학들을 담아냈고, 특히 관객들이 섹슈얼리티에 대한 그만의 새로운 정의에 적응하길 바라는 듯 하다. 또한, 적어도 현재 우리가 당면하기 시작한 미세 플라스틱 섭취 문제나 썩지않는 합성 플라스틱 쓰레기 처리와 관련된 미래의 문제에 대해 인간 육체의 새로운 진화라는 해답을 제시하는 흥미로운 상상력만큼은 크로넨버그 감독만의 고유하고 나름 당위성 있는 고찰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면에서 메세지에 비해 영화가 살짝 모자란 작품으로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이번 신작과 관련해 크로넨버그 감독의 인터뷰들을 보면 이런 신체-기술-환경을 관통하는 주제에 대해서 그가 상당히 진지하게 설명하는 편인데, 그런 점을 고려하면 영화 속에서 새로운 시대의 테크노-휴먼이 되고 싶어하는 인물들에 관한 이 작품의 상상이 마냥 허구적으로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 영화에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미스터리들도 여전히 남아있는데, 이에 대한 힌트는 무엇보다도 감독의 생각들을 종종 그대로 말하는 듯한 각 인물들의 대사 속에서 영화에 대한 나름의 해석의 답을 찾는 것이 가장 도움이 될 듯 하다.
개인적인 <미래의 범죄> 왓챠피디아 평점 : 3.5 / 5
(저는 마음에 안드는 영화들에 주로 3점 이하를 주기 때문에, 3.5는 '괜찮음, 적당함' 정도로 봐주시면 됩니다.)
원글은 제 블로그(https://blog.naver.com/evenstar118/222784110496)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추천인 11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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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을 스포없이 쓰려다보니 오히려 기괴해진 것 같지만 영화 자체는 겁낼 만큼 그렇게 기괴하지는 않습니다 ㅎㅎ
영화 얼릉 보고파집니다..
엄청 고어한 영화일 것 같아 기대했지만 그런 류는 아닌가 보군요. 칸에서도 반응이 잠잠했던 것을 보면 그저 해프닝이었나 봅니다. 크로넨버그가 비주얼적으로 쇼킹하지만, 그저 무자비한 학살극은 찍을 것 같지는 않았네요. 후기 감사합니다!
네 쇼킹한 장면은 있지만 고어하지는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크로넨버그의 집대성 같은데...
보기 겁나면서도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