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다라 (1981) 임권택 감독의 걸작. 스포일러 있음.
생각해 보자. 인간의 삶은 고통의 바다다. 그것은 인간이 집착하기 때문이다. 모든 집착을 버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마저 버리면
인간은 고통의 바다를 초월해서 법열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윤회의 고리를 끊고 이를 초월해서 부처가 될 수 있다.
"태어나지 말아라. 죽기 괴로워라. 죽지 말아라. 태어나기 괴로워라."같은 심오한 말을 성불한 부처들이 가르쳐왔다.
우주의 원리를 인간의 몸으로 초월해서 부처가 된다니 어마어마한 이야기다.
그런데 불교 교리에 따르면 누구나 수행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종교 교리가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을까?
아무리 발버둥쳐도 부처가 될 수 없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정말 진심으로 발버둥치는데도 부처가 될 수 없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만일 당신이 덜 간절하다면, 머릿속으로 알고 있는 부처의 진리를
착실히 실행하며 신자의 길을 갈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진짜 간절하게 부처가 되길 원한다면? 절벽을 어떻게든 올라가 부처가 되려고
돌벽을 긁다가 손톱이 빠지고 그래도 올라갈 수 없다면? 자책도 해보고 자학도 해보고
욕도 해보고 참선 정진도 해보고 그래도 안된다면?
만다라는 이런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불교영화라고는 하지만, 불교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득도하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사람의 이야기다. 불교는 득도하려고 발버둥치라는 종교가 아니다. 원작 소설 만다라가 나왔을 때 불교계에서는 불교를 모르면서 소설을 썼다고
비판의 목소리가 있었으니까. 승려를 소재로 하지만 이 이야기는 일반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다.
법운(안성기)이라는 젊은 승려는 피가 뜨거웠던 어머니가 자기를 버리고 도망간 다음 혼자 자란다. 어머니가 지금 있는 곳을 알고있지만
용서할 수 없다. 그는 승려가 되어서 부처가 되려고 한다. 부처가 되려는 열망은 진짜 간절하다. 그는 발버둥칠 준비가 되어있다.
하지만 용서할 수 없는 어머니와 아직도 자기를 못잊고 방황하는 애인이 그의 발목에 묶여 있다. 매정하게 그들을 끊어내지 못하는
집착과 부처의 세계를 열망하는 간절함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 그의 심리다. 그는 바로 우리들 자신을 상징한다.
늦게 불교에 입문한 법운보다 저만치 앞선 승려가 동년배인 숙관이다. 굉장히 친절하고 인격이 뛰어나며 학식도 깊이 쌓았고
참선도 많이 했다. 재능과 인격을 겸비한 엘리트다. 법운은 그가 저만치 앞서나가서 부처의 세계에 다다르려한다고 생각한다.
그를 동경하고 부러워한다. 하지만 숙관의 고백을 듣고 하늘이 무너져내린다. "난 사실은 부처의 세계를 잘 몰라."
숙관은 득도한 것처럼 보이는 주지스님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주지스님이 득도한 것처럼 오늘 아침 심오한 이야기를 했지? 사실 그것은 불교 경전에 나오는 누구누구 이야기를 그냥 재탕한 거야."
법운은 좌절한다. 저 절벽 위에 올라가 부처가 된 사람이 아직 없다면, 지금 이 절에는 지금 나같은 사람들뿐이라는 이야기 아닌가?
누가 날 이끌어주거나 방향을 가리켜줄 사람 하나 없다는 이야기 아닌가?
법운은 어느날 밖에 나갔다가 지산이라는 땡중을 발견한다. 술 마시고 창녀촌에 드나들고 자유롭게 파계하며 사는 지산은
자기 합리화를 하며 궤변을 늘어놓는다. 법운이 들어봐도 궤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득도한 고승이 번뇌에서 벗어나 파탈한 경지는 척 봐도 아니다.
그냥 땡중이다. 심지어는 법운까지 억지로 창녀촌에 데리고 간다. 못 볼 것을 봤다는듯 법운은 지산을 급히 떠나버린다.
이 영화는 전형적인 로브무비다. 법운은 늘 어딘가를 걷는다. 황량하다. 육체적으로 길을 걷지 않을 때라도 내면으로
혼자 외로운 길을 걷는다. 목적지는 분명하다. 부처가 되는 성불의 길이다. 하지만 그 방향도 어떻게 가야 한다는 계획도 없다.
노스님은 지산에게 말한다. "유리병 안에 갇힌 새 한마리가 있다. 이것을 어떻게 꺼낼 거냐?" 법운은 고민한다.
새는 유리병 안에서 질식해 죽을 텐데. 어떻게 꺼내야 하지? 그는 유리병 속 새 한 마리를 생각하며 무작정 황량한 길을 걷는다.
그는 다시 만난 숙관으로부터 어느 승려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전염병이 퍼진 어느 마을에서
사람들을 돌보던 승려 이야기다. 수련을 그렇게 엄청나게 한 숙관도 공포를 느꼈는데, 그 승려는 자기가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환자들을 돌봤다. 법운은 숙관이 지산을 칭송하는 것을 듣고 지산을 다시 찾아간다.
지산은 자기가 알던 땡중 그대로다. 법운은 지산을 모시고 어느 시골을 찾아간다. 세상과 연을 끊고 구도에만 몰두할 셈이다.
법운의 업그레이드 버젼이 지산이다. 법운은 새 한마리를 유리병에서 꺼내기 위해 고민하는 정도에 그치는 데 반해,
지산은 자기를 학대하고 파멸시킬 정도로 간절하다. 모든 존재를 그 한 문제에 쏟아붓는다. 그런데 부처의 세계에 한 발은 커녕
아무리 해도 근처에도 갈 수 없다. 법운과 시골마을에 간 뒤에도 길을 걸어 마을에 가서 주막집에서 산다.
그러다가 어느날 밤 새 눈 내리고 지산이 돌아오지 않는다. 아침이 되자 지산을 찾으러 나간 법운은,
탑 앞에서 합장하고 얼어죽어 있는 지산을 발견한다. 그 처절함. 간절함. 비극적인 구도행위. 그것이 지산이다.
이 영화가 걸작인 이유도 바로 이 장면 때문이다. 자기 목숨조차 던질만큼 간절한 구원을 향한 몸부림을
이렇게 섬찟하게 보여준 영화 별로 없다.
법운은 지산을 화장한다. 불 타 없어지는 지산의 시신을 보면서 "당신은 죽어 다시 윤회하려 가는가? 아니면 성불해서 해탈의 길로
갔는가?"하고 묻는다. 구도자의 입장에서 지산은 별로 배울 것도 없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안된다" "무작정 간절해라" 이런 것을
배워야 아는가? 법운은 전화를 걸어 어머니를 용서한다. 그는 지산의 죽음을 통해 자기를 얽매던 집착 하나를 끊어낸다.
법운의 구도의 길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득도의 길은 아직도 모르겠고 방향도 경로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자기를 지긋지긋하게 얽매던 집착 하나를 초월했다. 그는 자유로운 마음으로 길을 떠난다.
이 영화가 대중의 인기를 끌고 서구비평가들에게 찬사를 받았던 이유는 역설적으로 불교에 대한 영화라기보다
구원을 향해 발버둥치는 영화라서 이해하기 쉽고 와닿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진짜 심오한 불교 교리에 대한 영화였으면
사람들이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 지산역할을 맡은 전무송은 일생 일대의 명연기를 해낸다. 물론 이 역의 임팩트가 하도 커서
이후 커리어 내내 이 역할이 따라다녔다.
임권택은 대가이지만 봉준호나 박찬욱 나홍진 감독이 대가인 이유와는 다른 의미에서의 대가이다. (봉준호나 박찬욱 감독이 대가인 이유와 같은 의미에서 대가는 유현목 감독이다.)
완벽한 영화를 만들지는 못한다. 아마 오늘날의 눈으로 본다면 허술해 보일 지도 모른다.
그가 대가로 추앙받았던 이유들 중 하나는
그의 활동기가 우리나라 영화사 암흑기인 1970년대에서 1980년대 후반이었기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그 기간 동안 우리나라
영화사를 떠받들었던 대가가 임권택이다. 우리나라 영화계가 암흑기에서 벗어나 부활의 용틀임을 시작한 것도
만다라가 베를린영화제 본선에 진출하면서 사람들이 자신감을 얻기 시작한 데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말하자면 한국영화 암흑기의 김연아같은 영화다.
임권택 감독은 딱히 지적이지는 못하다. 그래서 주제를 단단하게 장악하지 못한다.
아마 임권택 감독은 자기가 잘 아는 것들을 다룰 때 걸작을 만들 수 있었을 지 모르겠다.
이 영화에서도 임권택 감독은 원작소설의 이론적 지적인 면은 장악해내지 못한다. 하지만 본능과 직관력 그리고
감성적 성실함으로 법운과 지산의 간절함, 내면적 황량함, 고독한 구도의 길, 처절함 등을 생생하게 포착해낸다.
그리고 지산의 처절한 최후라는 한국영화사에 남을 절정을 창조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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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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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실 불교 너무 어렵죠. 근데 뭔가를 아는 이의 행동만 잠깐 봐도 도를 아는 지 아닌지가 그냥 드러납니다.
말로 하긴 너무 어려우나 보면 바로 알죠.
대중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던 것 같습니다. 지산의 죽음을 보고 법운도 자기 번뇌의 한자락을 끊어냈으니
결국 어딘가 도착하기는 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