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북경특급 (1994) 주성치의 스파이 코메디. 전성기 주성치의 매력을 볼 수 있다. (스포일러 있음)
주성치의 전성기는 아무래도 1990년대 같다.
B급정서가 지금처럼 높이 평가되지 않던 당시에 주성치영화는 저질코메디로 받아들여졌다.
홍콩영화가 쌈마이영화로 사람들 뇌리에 박힌 시대다. 주성치영화는 쌈마이인 홍콩영화가 난숙기에 접어들어
쇠퇴하고 저열해진 산물로 생각되어졌다. 쌈마이가 난숙기가 되어 더 쌈마이로 떨어졌다는 생각이었다.
당시 주성치영화를 요즘으로 비교해 보면 홍상수 영화 느낌이었다.
비슷비슷한 것을 이리 비틀고 저리 비틀고 해서 영화로 부지런히 만들어내는 것 같은데, 영화가 굉장히 재미있고
웃기고 주성치 특유의 스타일이 살아 숨쉰다. 노력하지 않고 술술 흘려내는 것처럼 영화를 쏟아냈던 느낌이다.
나는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겸허하고 서민적인 위치에서 영화를 만들었던 주성치의 이 시기 작품이 그의
가장 걸작들이라고 생각한다. 루저를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루저 그 자체였던 시기다. 행오버의 켄 정 캐릭터 느낌이랄까. 옷만 안 벗었지 그런 느낌이었다. 그의 영화 속 주인공의 페이소스 그리고 감동은 거기서 왔다. (이후 영화 속 주성치 캐릭터는 비록 루저를 표방하고 있지만 전형적인 영웅이다. 과도한 자의식도 눈에 띈다.)
중국 창녀촌 (지명이 그렇단다)에서 정육점을 하는 007은 사실 비밀첩보원이다. 그는 상부로부터 작전명령이 떨어지기를 애타게 기다린다. 그는 웃통을 벗고 담배를 아랫입술에 문 채 마니티 한 잔을 옆에 놓고 열심히 식칼로 돼지고기를 썬다. 마을 창녀들에게 007은 낭만적인 세련남이다. 북경의 타락한 어느 장군은 자기가 저지른 모종의 사건을 덮기 위해 가장 멍청한 스파이를 일부러 뽑는데 그가 바로 007이다. 그는 권총 대신 돼지 잡는 거대한 식칼을 허리에 차고 사건을 해결하러 홍콩으로 떠난다.
삿갓을 쓰고 상반신 벗고 사무실에 나타난 007은 장군의 비서와 개그를 한다.
"금낭이, 옛날이랑 하나도 안 변했군."
"엄마는 벌써 돌아가셨어요. 저는 엄마 딸 목단이라구요."
"엥! 목단이, 반가워. 한번 안아볼까?"
"그건 나중에 하고 들어가보세요."
주성치 특유의 오버연기를 하면서 아주 쌈아이스럽게 개그를 한다.
주성치는 장군을 만나러 가다가 뭔가 목단이를 향해 휙 던진다. 지푸라기로 묶은 돼지 간이다.
"먹어. 돼지간이다. 미용에 좋지." 주성치는 무슨 프랑스 갱영화의 알랭 들롱처럼 무게를 잔뜩 잡으면서
이런 대사를 진지하게 속삭이듯이 말한다. 이거 무지 웃기다.
그는 중국에서 최근 발견된 엄청나게 큰 공룡화석을 누가 도둑질해갔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되찾으러 홍콩으로 간다. 새하얀 양복에 허리춤에 돼지 잡는 거대한 식칼을 차고 트랜치 코트를 입은 프랑스 갱영화 알랭 들롱처럼 무게 잡고 다닌다. 딱 이런 느낌이다.
옷 벗은 켄 정이 중국 창녀촌 레드넥이 되어 알랭 들롱처럼 행동하고 쉰소리로 속삭이며 다닌다 하고 생각하면 된다.
여자들이 이런 007캐릭터에 푹 빠지는 것도 웃기다. 진짜 잘나서 여자들이 꼬이면 루저 캐릭터가 아니다. 정말 잘 생기고 엄청난 로맨티스트고 이런 과장된 이유로 여자들이 주성치 캐릭터에 빠지니까 오히려 반어법같이 들려 쌈마이틱하게 들린다. 이 시기 주성치는 굉장히 겸허하게 망가지면서 진정성 있게 이런 연기를 했다.
본드걸은 아담하고 동양적인 미인 원영의이다. 뭐 이런 타입이 섹시미를 발산한다거나 그런 것일 리는 없고,
그냥 당시 홍콩영화 여주인공의 비련미, 전통동양적인 여성, 정에 약한 참한 여성을 연기했다. 당시 홍콩영화에 숱하게 재탕되던 캐릭터다. 그런데 이 여자도 언밸런스하게 냉혹한 암살자로 등장한다. 그리고 연인으로 위장하고 주성치를 암살하려 시도하며 괴로워한다. 성춘향이 기관총을 들고 냉혹하게 사람들을 죽이려 하며 갈등 괴로워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정도 캐릭터가 있으면 영화는 자동적으로 흥미진진하게 굴러간다. 천의무봉으로 슬슬 자연스럽게 만든 것 같은데,
잘 뜯어보면 아이디어가 넘친다. 이 넘치는 아이디어, 기발함, 그러면서 굉장히 겸허하게 진정성을 가지는 것이
그의 젊을 적 영화들의 특징이다. 사람들은 주윤발은 좋아했지만 주성치는 사랑했다.
주성치는 점점 더 사건의 핵심에 파고들어간다. 아니, 주성치가 가면 사건이 알아서 풀려서 핵심이 스스로 그에게 다가온다. 이게 다 그가 가지는 엄청난 매력 때문이라는 설정이다. 얼렁뚱땅한 것 같지만
주성치 캐릭터의 힘으로 우수한 코메디가 된다. 주성치는 권총이 아니라 평소 손에 익은 돼지 잡는 식칼과 작은 칼을 가지고 사건을 해결한다. 원영의도 갈등을 기쁘게 그만두고 주성치에게 푹 빠진다. 둘 사이에 섹드립도 나오는데,
이것도 굉장히 웃기다. 순전히 주성치의 놀라온 개인기 덕분이다.
아래 홍콩에 처음 온 주성치가 초라한 여관방에 묵자 여관여주인이 홍콩에서 유명한 아가씨를 불러주겠다고 한다.
아래 여자가 여주인이다. 주성치가 못이기는 척 (?) 불러달라고 하자, 이 여주인이 주성치 바지를 벗긴다.
"내가 바로 그 여자예요. 나 홍콩에서 유명하다구요." 그리고 주성치에게 쫓겨난다.
이렇게 국산007은 홍콩서민들의 애환을 반영한 서민적인 영웅이 된다. 사건을 해결한
주성치와 원영의는 창녀촌으로 돌아가서 정육점 주인과 아내가 되어
개점휴업하고 포장마차 뒤에서 열심히 섹X만 한다. 둘이 얼마나 힘이 좋은지 마차가 들썩들썩하는데, 창녀촌 주민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언제 다시 문을 열지 하고 궁금해하며 그 곁을 지나다닌다.
영화를 "이 영화 007 흉내낸 것 아님"으로 시작하는데, 정말 007 패러디이면서도
세부적으로 굉장히 다른 굉장히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었다. 당시 중국사회를 부패한 지도층과
그에 걸맞게 타락한 사회구조를 대차게 까기도 한다. 점잖게 풍자하는 것이 아니라 대차게 까버리는 것이
주성치의 특징이다.
이 영화는 다른 무엇보다도 코메디영화의 본질에 충실하다. 웃기고 재미있다.
세부 하나 하나 아이디어가 넘치며 아주 탱탱하다. 천재의 증거다.
추천인 7
댓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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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할때 보면 기분 풀리는 주성치 영화였는데... 다시금 봐야겠군요
원영의가 총가지고 주성치한테 겨누는 씬이 진짜 최애 장면입니다 ㅎ
아, 근데 여주인공 배우 이름이 원영의 아닌가요?
우울할때마다
돌려보는 장면입니다ㅠ
정말 사랑하는 영화죠ㅠ
후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