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guilded (1971) 스포일러 있음.
이 영화를 보며 돈 시겔 감독의 연출 스타일이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젊었을 적 연출 스타일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영화라고 보아도 좋을 정도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좀 더 감상적이고 섬세하기는 하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연출 스타일의 출발점이 어디였는지 알 수 있다.
남북전쟁이 막바지에 달하는 시기에, 남부 어느 버려진 대저택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니까 고딕호러 성격이
있는 영화다. 중상을 입고 죽음 목전에까지 다다른 복군 병사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어느 여자아이에 의해 구출되어 남부 버려진 대저택에 간다. 그곳은 여자기숙사 학교로, 교장선생과 교사 그리고 여러 명의 어린 여자아이들 학생이
있었다. 이 여자들 사이에는 위계질서가 존재한다. 그리고 규율이 존재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오기 전까지는
이것이 잘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젊은 미남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이 고립된 장소에 오자,
여자들은 성에 굶주려 왔던 자신들을 깨닫는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여자들이 자기를 남군에 넘기지 않도록
살아남으려는 절박함에서, 이 여자 저 여자 다 유혹한다. 때문에, 여자들 사이에서 성에 대한 욕망은
욕망 수준을 넘어서 갈등과 파국 수준으로 치달아간다.
좁은 공간에서 제한된 등장인물들 간에 벌어지는 심리 스릴러다. 사건이래봤자, 외적인 사건이라기보다
내적인 심리적 사건들이라서, 설득력 있게 표현하기가 까다롭다. 이것을 아주 선명하게 진정성 있게 그리고
매순간 순간이 흥미진진하게 연출해낸 것은 아주 훌륭한 일이다. 여교장 역을 맡은 제랄딘 페이지가 놀라운
연기를 보여주었는데, 여자로서는 이미 시들어가는 초로의 역할이다. 규율과 절제를 강조하는 원칙주의자로서
가난에 시달리는 학교를 어떻게든 꾸려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억척스럽고 강인한 여성이기도 하다.
하지만 젊어서는 친오빠와의 성에 탐닉하던 쾌락주의자였는데, 친오빠가 가출한 이후 자기를 억제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엄청난 성적 갈등을 내면에 품고 사는 여자이지만, 외면적으로는
규율을 지키고 자기 억제력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 여자만은 건드렸으면 안되었는데, 이 여자의 마음 빗장을 열어버리고 만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몰락으로 치달아가는 것은 모두 제랄딘 페이지가 하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나 정열적이고 질투가 많아서 살인까지 저지를 정도의 여자가, 겉보기에는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그때 그때 최선의 방법을 찾아 노력하는 것으로 위장한다. 제랄딘 페이지는 그 내면적인 에너지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나 다른 여자들을 압도하며 저택에 큰 그림자를 드리운다.
영화가 굉장히 재미있다.
사실 영화의 내적 공간이 상당히 넓은데, 그래서 이 영화를 다양한 방식으로 만들 수 있었다.
가령 전통적인 고딕 호러 방식 영화로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 혹은, 쇠락해 가는 남부 어느 가문에 촛점을 두어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식으로 풀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고립된 대저택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제랄딘 페이지 등 여러 명의 성에 굶주린 여성들 간 갈등을 그린 것이니까, 페미니즘의 요소가 들어있기도 하다.
이 중 어떤 방식을 선택하느냐를 보면 감독 스타일을 알 수 있다.
돈 시겔 감독 선택은, 규모를 아주 줄이고 아주 꽉 짜여진 스릴러 영화를 능수능란하게 연출해내는 것이었다.
얘술적 야심 별로 없다. 텍스트에 대한 창조적인 해석도 별로 없다. 하지만 대신, 영화 주제의 선명성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행동을 긴장감 있게 흥미진진하게 그려내고 있으며, 이것을 영화 내내 유지해 간다.
뻔한 장면도 뻔하지 않고 흥미진진하게 만든다. 돈 시겔 감독은 뛰어난 장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