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트메어 앨리] 간략후기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새 영화 <나이트메어 앨리>를 보았습니다.
윌리엄 린지 그레셤의 동명 소설이 원작인 이 영화는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로서는 보기 드물게
판타지 요소가 없는 걸로 알려져 있지만, 이상하게 영화를 보고 나면 판타지 세계를 본 것 같고 그 세계 속의 괴물을 본 것 같습니다.
어두운 느와르 장르에 와서도 여전히 뒤틀린 듯 꿈결 같고도 고상한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연출은,
평범한 사기극처럼 보이는 이야기로부터 그토록 괴물 같은 인간의 심연을 마주하게 하며 보는 이의 정신을 얼얼하게 합니다.
2차 대전 발발 직전의 미국, 스탠튼 칼라일(브래들리 쿠퍼)이라는 남자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불사르고 나와 떠돌던 중
숙식을 해결하고자 흘러들어간 카니발 유랑극단에서 일자리를 얻고 그곳의 일원이 됩니다.
야심에 찬 단장 클렘(윌렘 데포)이 이끄는 이 유랑극단에는 점술가 부부 지나(토니 콜레트)와 피트(데이비드 스트라탄),
몸에 전기가 통하는 몰리(루니 마라), '지구에서 가장 힘센 사나이' 브루노(론 펄먼) 등 다양한 재주(?)를 지닌 사람들이 있습니다.
스탠튼은 이들과 어울리던 와중에 지나와 피트 부부가 선보이는 독심술 기술에 흥미를 느끼고는 그들에게 기술을 배웁니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보이는) 그 기술로부터 발전 가능성을 엿본 스탠튼은 사랑에 빠진 몰리와 함께 독립하여
이 기술로 더 큰 꿈을 이루기 위한 야망을 펼치기 시작하고, 고위층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독심술 공연으로 유명세를 쌓아갑니다.
그러던 중 공연에서 만난 심리학자 릴리스(케이트 블란쳇)가 스탠튼에게 접근해 더 큰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제안합니다.
돈 많고 상처 많은 고위층 사람들과 1:1로 만나 그들에게 심령술을 선보이자는 것이죠.
이게 성공한다면 스탠튼은 엄청난 돈을 쓸어담게 되겠지만, 어두운 예감처럼 이는 곧 그를 더 깊은 심연으로 이끕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에는 늘상 괴물, 유령 같은 초자연적 존재가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영화에서 그러한 초자연적 존재들은 단지 맞서 싸워야 할 대상만이 아니라 인간을 투영하는 대상이었죠.
인간을 흉내내거나, 인간의 공포를 형상화하거나, 인간과 사랑에 빠지는 그 존재들을 통해 감독은
인간과 괴물의 경계를 허물고 이를 통해 역으로 인간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는 했습니다.
<나이트메어 앨리>는 그런 감독의 지난 작품들과는 정반대로, 초자연적 존재나 현상을 전면에 나타내지 않습니다.
인간 바깥에 괴물 같은 존재를 세워두는 대신 인간 내면으로부터 괴물 같은 속성을 끄집어내는데, 점술과 심령술이 그 수단입니다.
미래를 내다보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초월하는 초자연적 능력을 발휘하는, 아니 발휘한다고 믿게 만드는 기술들이죠.
일확천금을 노리며 거칠 것이 없던 스탠튼은 타로 카드 점을 통해 자신의 앞날에 관한 예견을 듣습니다.
스탠튼은 자신의 앞날이 오로지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믿으며 심령술을 이용한 계략을 실행에 옮기지만,
문제는 이 심령술이라는 게 내면의 심연이라는 인간의 매우 취약한 부분을 건드리는 기술이라는 점입니다.
그만큼 기술만 터득한다면 상대를 속여먹기에 더없이 쉬울 것이나, 그 파장은 예측의 범위를 아득히 넘어설 수 있습니다.
영화는 자신이 타인의 내면을 읽어낸다고 믿을수록 그 내면에 도사린 까마득한 어둠에 잡아먹히고 마는,
출구 없는 마성의 미로로 하염없이 헤매어 들어가는 스탠튼의 자취를 따라가며 거부할 수 없는 악몽 속으로 초대합니다.
스탠튼은 자신의 모든 행보가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고 믿지만, 영화를 보는 우리는 그게 아니라는 걸 압니다.
운명을 개척하는 게 아니라 예정된 운명으로 걸어들어갈 뿐, 내면의 어둠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거기로 빨려들 뿐입니다.
던져진 타로 카드 점처럼 예정된 내면의 심연과의 만남 앞에서, 영화는 비로소 인간과 괴물의 경계를 제시합니다.
인간이라면 그 심연에 맞섬으로써 존엄을 지킬 것이고, 괴물이라면 그 심연에 뛰어듦으로써 존엄을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계속 나아간다고 생각하지만 그럴수록 막다른 골목으로 접어들게 되던 인간이 맞닥뜨리는 결말은
어느 정도 예견된 수순임에도 어안이 벙벙해질 수 밖에 없는데, 이를 통해 영화는 인간을 파국으로 이끄는 것이
심연을 드리우게 한 가혹한 세상인지 그 심연으로 광기 어린 발걸음을 옮기는 인간 자신인지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감독은 전체적으로 다소 느린 호흡 속에서도, 걸음걸이가 너무나 당당하고 야심차서 불안에 휩싸이면서도
지켜볼 수 밖에 없는 파국으로의 여정을 고딕 동화처럼 뒤틀리고도 우아한 터치로 그려냅니다.
그 속에서 마치 독을 품은 뱀처럼 위험하고도 아름다운 연기 호흡을 주고 받는 배우들이 일품입니다.
주인공 스탠튼을 연기한 브래들리 쿠퍼는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안한 에너지를 지닌 인물을 강렬하게 표현합니다.
감정 표현이나 액션을 과하게 뿜어내지 않고도 비뚤어진 욕망으로 내내 꿈틀거리는 내면의 텐션이 또렷하게 느껴집니다.
스탠튼에게 절호의 기회를 제안하는 심리학자 릴리스 역의 케이트 블란쳇 역시 특유의 고혹적인 톤을 날카롭게 다듬어,
과연 기회의 손길일지 마수일지 가늠할 수 없는 긴장감과 어둡고도 고급스러운 품격을 영화에 더합니다.
케이트 블란쳇과 <캐롤>에서 훌륭한 호흡을 맞춘 바 있는 루니 마라는 그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스탠스로
신기루 같은 로맨스를 형성하는 스탠튼의 연인 몰리를 연기하며 극에 비극적 낭만의 색채를 더합니다.
음울하고도 아찔한 긴장감을 자아내는 타로 카드 점술가 지나 역의 토니 콜레트, 유랑극단 단장 클렘 역의 윌렘 데포도 인상적이며,
론 펄먼, 리처드 젠킨스 등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에 단골로 출연하는 배우들의 존재감 또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나이트메어 앨리>는 스릴러 작법이 어울릴 법한 느와르 장르의 영화이지만,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스릴러 작법을 충실하게 따르기보다 본인이 잘하는 쪽인 동화적, 우화적 접근으로 이야기를 다룹니다.
한 인간이 스스로 괴물이 되기를 택하기까지, 아니 운명에 이끌려 괴물이 되는 길로 접어들기까지의 자초지종을
시작도 끝도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기운 속에서 짚어나가니, 스릴러로서의 서스펜스는 다소 떨어질 수도 있겠으나
인간을 휘감아 도는 어둠의 농도와 파국의 크기는 더 크게 다가오며 또렷한 여운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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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그 시대로 초대받은 것처럼 화면 가득 재현 된 세트와 미장센! 놀이 동산 같은 유랑극단의 반짝이는 조명과 끊임없이 내리는 비 그리고 센 스토리.. 여운이 오래 갈듯해요. 리뷰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어둠의 농도와 파국의 크기를 확실히 느낀 장면이었습니다.
언제나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