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소리' 초간단 리뷰
1. 중국의 상업영화를 그리 좋아하진 않는다. 설령 작가가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영화들을 볼 때 마다 '짜사이뽕'이 가득 느껴지기 때문이다. 특히 대자본이 투입된 영화라면 중화식 민족주의를 부정하기 어렵다. 외부적 요인에 의해 영화를 판단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요즘처럼 중국이 미쳐 날뛰는 시기에는 중국영화를 보는 게 신경쓰인다. 그럼에도 2009년 중국영화 '바람의 소리'를 굳이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저 이해영 감독의 신작영화 '유령'의 원작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설경구, 이하늬, 박해수, 서현우, 김동희 그리고 '박소담'이 주연한 영화다. 최애배우의 신작이라면 당연히 사전답사가 우선돼야 하는 법! 꽤 간단한 의도로 이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2. '바람의 소리'는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의 중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총독부에 잠입한 항일단체 첩자를 가려내기 위한 첩보국 장교가 유력한 용의자들을 한 곳에 모아두고 그들 중 첩자 '유령'을 가려내기 위한 수사를 시작한다. 이 플롯은 대단히 재미있다. 밀실이 있고 몇 명의 각기 다른 인물이 있다. 수사하는 사람이 있고 그들 가운데 범인이 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영국식 탐정소설을 연상시킨다. '유령'을 찾기 위한 첩보장교와 '유령'일 수 있는 용의자들의 두뇌싸움이 쫄깃한 긴장을 더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그러나 실상은 대단한 두뇌싸움이 오가진 않는다. 나름의 반전은 있지만 이야기의 구조는 의외로 단순하다. 게다가 개성있는 캐릭터들이 모였는데도 그 개성이 살아나진 않는다. 특히 마지막 장면은 한국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신파' 소리 듣기 딱 좋은 상황이다. 항일투쟁을 소재라면서 신파를 벗어나긴 어렵다. 역사 자체가 아프고 저항하고 투쟁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관객을 눈물짓게 하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를 소재로 하면서도 메시지와 기조를 유지하되 슬프지 않고 드라마의 힘을 유지한 '밀정'은 가장 이상적인 일제강점기 배경의 영화다. '바람의 소리'는 '밀정'이나 '암살'과 비교하면 한참 못 미치는 영화다.
3. 그렇다면 이해영 감독의 '유령'은 어떤 모습으로 나오게 될까? 현재 알려진 '유령'의 시놉시스는 '1933년 경성, 항일조직의 스파이 ‘유령’으로 의심받고 외딴 호텔에 갇힌 5명의 용의자가 서로를 향한 의심과 경계를 뚫고 무사히 탈출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액션을 그리는 영화'다. 등장인물 정보는 '설경구가 경무국에서 통신과 감독관으로 좌천된 군인 출신 일본 경찰 무라야마 쥰지, 이하늬가 암호문을 기록하는 통신과 직원 박차경, 박소담이 조선인임에도 정무총감 직속 비서 자리에 오른 총독부 실세 유리코를 연기한다. 박차경과 함께 일하는 통신과 젊은 직원 백호 역은 김동희가, 암호 해독 담당 천계장 역은 서현우, 유령을 색출하기 위한 함정 수사를 지휘하는 경호 대장 카이토 역은 박해수가 맡았다'(뉴시스 2021. 1. 7. '이해영 감독 신작 '유령', 설경구·이하늬·박소담 주연' 참조)고 나와있다. 거의 유사해보이지만 몇 가지가 다르다. 우선 인물배경이 원작과 차이가 있다. 사실상 캐릭터 디자인을 새로 했다고 봐도 될 듯 하다. 그리고 시놉시스에는 예정에 없던 '액션'이라는 단어와 '서로를 향한 의심'이 나온다. '바람의 소리'는 액션영화가 아니다.
4. 우선 이해영 감독의 '바람의 소리'를 그대로 쫓아갈거라는 기대를 하진 않는다. 전작인 '독전' 역시 두기봉의 영화 '마약전쟁'을 원작으로 하면서 원작에 없던 '이선생' 캐릭터를 만들어 이야기를 전혀 다르게 이끌고 갔다. 때문에 '유령'은 '바람의 소리'가 가진 미흡한 부분을 채워줄 것으로 기대된다. 앞서 언급한대로 '바람의 소리'는 캐릭터성이 부족하고 긴장감을 유지하지 못한채 산만하게 전개된다. 재능있는 배우들을 대거 출연시켜 캐릭터에 힘을 싣는 작업을 진행해야 한다. 그리고 "'유령'을 색출해야 한다"와 "살아서 나가야 한다"의 대립에 더 집중해 빠르고 긴장감있게 이야기를 전개해야 한다. 사실 여기까지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다만 마지막 반전을 그대로 이끌고 갈 지는 의문이다. 한국 관객들이 신파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굳이 이를 부정할 이유도 없다. 다만 이야기의 구조상 신파를 살린다면 두뇌싸움은 반감될 수 있다. 어느 노선을 선택할지는 온전히 작가의 몫이다.
5. 한국과 일본의 역사에 따라 완전 다른 이야기가 될 가능성도 있다. 시놉시스에 언급된대로 '바람의 소리'는 1942년이 배경이지만 '유령'은 1933년이 배경이다. 게다가 중국과 일본, 한국과 일본의 관계와 배경은 근본부터 다르다. 애초에 '독전'과 '마약전쟁'이 달랐던 것처럼 '유령' 역시 플롯만 가져온 채 완전히 새로 이야기를 쓸 수 있다(이 가능성이 가장 높다. 만약 이대로라면 나는 그냥 중국영화 하나 잘 본 셈이다). 가장 궁금한 것은 '유령'이 항일투쟁의 가치를 고스란히 담을지 첩보스릴러의 장르성을 취할 지 여부다. 전자를 따라가도 상관은 없지만 실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 픽션인 만큼 그 노선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 후자의 경우 재미있는 첩보스릴러가 나올 수 있지만 극히 일각에서는 '군함도'가 받았던 논란을 받을 수도 있다('군함도'처럼 신랄하게 받진 않겠지만). 원작이 있는 영화고 원작을 봤는데도 이렇게 종잡을 수 없는 영화는 '유령'이 처음이다.
6. 결론: '바람의 소리'는 좋은 플롯을 가진 아쉬운 영화다. '유령'은 그 단점을 보완해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려 갈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재밌겠다.
추신1) 이 영화는 2009년 제14회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이다(당시 개막작은 '굿모닝 프레지던트'). 예로부터 부산국제영화제 개폐막작은 노잼에 흥행 폭망한다는 슬픈 전설이 있다(오열).
추신2) 박소담 만세
'유령' 촬영현장의 박소담.
추천인 3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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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뱅가드 보고 이런 영화가 진정한 중국영화지 생각이 들었지만요~~
그런 슬픈 전설이 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