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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의 헐크(2003)/ 지금 마블에게 없는 무언가

해리엔젤 해리엔젤
802 3 2

스포있어요.

 

 

 

 

 

 

 

 

 

 

 

Hulk_-_Asking_for_help.webp.jpg

 

개봉한지 20년이 훌쩍 지난 <이안의 헐크(2003)>는 현재의 마블에선 절대 만들 수 없는 영화입니다. 일단 이야기 자체가 너무 어둡고 묵직합니다. 마블 최강의 무력을 가진 헐크의 오리진을 다루고 있지만, 뜯어보면 억압받고 학대받은 아이에 대한 이야기거든요. 어릴적 비극적인 사고로 부모를 잃은 주인공 브루스 배너는 그 지적 우월함에도 불구하고 자존감이 없어서 시종일관 우울하고 무기력해 보이고, 그간 스멀스멀 쌓여온 내면의 분노가 헐크로 변해 터져나올 때조차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정도에서 그치고 말죠. 뭣보다 얄밉게 깐족깐족거리는 놈 하나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빌런도 없다보니, 히어로 영화 특유의 과장된 액션과 파괴의 카타르시스를 기대하며 극장에 온 당시 관객들은 벙찌기 딱 좋았겠죠.

이 영화가 개봉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전작 <와호장룡(2000)>에서 보여준 유려한 무협액션만 믿고 이안 감독에게 이 프로젝트를 맡긴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개봉 후에는 미국 특유의 정서가 담긴 히어로 영화의 감독으로 외지인인 대만 사람을 쓴 건 실수였다고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았죠.

 

하지만 저는 이안을 이 영화의 감독으로 앉힌 건 신의 한수라고 생각해요. 와호장룡의 유려한 검술, 대나무숲 허공답보 정도로 그를 기억하는 분이 많겠지만 사실 그의 필모를 가득 채우고 있는 테마는 바로 가족입니다. 그의 대만 시절 영화와 헐리우드로 넘어온 후 찍은 영화들은 하나같이 가족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 중 하나는 영국 실내극의 대가 제인 오스틴 원작의 <센스 앤 센서빌리티(1995)>였고, 또 하나는 미국 중산층의 모럴 해저드를 다룬 <아이스 스톰(1997)>이었죠. 

 

신기하게도 이 두 작품에서 이안 감독의 동양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는 조금도 드러나지 않습니다. 도리어 현지인들도 감탄할 정도로 정교하게 시대의 분위기를 구현하고 가족과 사회 구성원 사이의 내밀한 관계와 거기서 파생된 갈등을 세심하게 포착하고 있습니다. 가족이란 테마 자체는 범지구적이지만 그 디테일은 지역에 따라 각양각색일 수 밖에 없는 까닭에 그만큼 다루기 까다로운 주제입니다. 하지만 이안의 연출은 자신의 태생적, 지역적 정체성을 넘어서 오로지 영화의 상황, 그 자체에 완벽하게 녹아듭니다. 헐리우드 시절 오우삼 영화의 캐릭터들이 배우만 서양인일 뿐 그 본질은 여전히 중국인이었던 걸 생각해보면, 이건 정말 대단한 능력이죠.

 

이런 관점에서 보면 <헐크>는 이안이 자기가 가장 잘 하는 걸 한 작품입니다. 장르만 히어로물이 되었을 뿐이지 여전히 영화의 테마는 가족입니다. 이안은 "유능한 과학자가 감마선에 노출되어 헐크가 되었다"는 심플한 오리진을 그리스식 가족 비극으로, 이 비극에 얽힌 두 가문의 자식들의 사랑은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그려냅니다. 브루스와 베티는 끊을 수 없는 혈연의 악연에 고뇌하면서 운명의 장난질에 최대한 저항해보지만 결과적으로 완벽하게 실패합니다. 심지어 브루스는 과학자로서 촉망받던 미래까지 모조리 뺏긴 채 결국 도망자 신세가 되죠.

 

뭣보다 이 비극의 출발점이 되는 두 인물, 데이빗 배너와 로스 장군 역시 다층적인 캐릭터로 묘사되었습니다. 데이빗은 자기 자신과 어린 자식까지 꺼리낌없이 실험대상으로 삼는 매드 사이언티스트지만 동시에 행복한 가정의 자상한 가장이기도 합니다. 결국 그는 모순된 두 자아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세상을 원망하며 미쳐버립니다. 냉철한 군인인 로스 장군은 딸 베티만큼은 끔찍히 아끼지만, 막상 그녀와는 반쯤 의절 상태입니다. 배너 가문에 닥친 비극이 자신의 책임이 아님을 강조하면서도 마음 한켠으로는 어려서는 고아, 커서는 헐크가 되어버린 브루스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통제 불가능한 괴물이 되어버린 데이빗과 브루스 부자를 제거하기 위해 그는 냉정하게 핵폭탄 투하를 명령하고야 맙니다.

 

이처럼 어둡고 묵직한 서사를 전개하기 위해 이안은 스릴러와 공포영화의 형식을 적극적으로 차용합니다. 극 초반 브루스와 베티를 스토킹하는 데이빗의 묘사나 감마선에 의해 변이된 애완견들이 베티를 습격하는 씬들을 보세요. 요즘 마블 영화에선 절대 기대할 수 없는 음침함괴 오싹함이 있습니다. 후반부 배너 부자의 상봉씬은 마치 연극의 한 장면처럼 연출되었는데, 전기의자 두 개만 덜렁 놓여진 어두운 무대 위에서 에릭 바나와 닉 놀테가 펼치는 분노와 광기를 씹어삼키는 연기를 보고 있자면, 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에너지가 금방이라도 스크린을 뚫고 나올 것만 같죠. 덕분에 스토리의 태반이 햇빛이 쨍한 미 남부 사막지대에서 펼쳐짐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분위기 자체는 황량하고 삭막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처럼 <헐크>는 이안이라는 검증된 거장이 자신의 장기를 살려 깔끔하게 다듬어낸 독특한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이 영화를 어떤 식으로 만들겠다는 감독의 넘쳐 흐르는 아이디어와 이를 깔끔하게 갈무리하는 연출, 그리고 자신의 주제의식을 반드시 관철시키겠다는 강렬한 뚝심이 느껴집니다. 당시엔 흔치않던 히어로 영화를 만들기 위해,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안은 다양한 장르의 문법을 가져와서 작품 내에 훌륭하게 안착시킵니다. 그러면서도 마치 만화책을 읽는 듯한, 컷과 컷이 교차하는 독특하고도 유려한 편집을 통해 <헐크>의 원작이 마블 코믹스라는 점도 잊지않고 관객에게 상기시키죠. 한마디로 이안은 이 영화를 만듬에 있어 최선의 결정을 내린 후에는 이를 영상으로 옮기는 데 있어 일말의 머뭇거림이 없습니다. 거장만이 가질 수 있는 자신감, 또는 여유랄까나요. 

 

저는 이 영화를 보고나서 얼마 전 봤던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를 다시금 떠올렸습니다. 몇 번이나 재촬영을 했음에도 비실비실한 서사, 김빠진 액션은 강력한 스튜디오의 간섭에 쪼그라든 초보 감독의 자신감 부족에서 나온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모름지기 '영화는 감독의 것'이라는 다소 고리타분힌 생각을 가지고 있는 저 같은 관객에게는, 거장 감독이 거침없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관철하면서 만들어낸 이 20여년 전 영화가 화려한 CG로 도배된 걸 빼면 속 빈 강정같아 보이는 요즘 마블 영화와 비교해도 조금도 꿀리지 않아 보입니다. 지금 마블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건 프랜차이즈의 명줄을 어떻게든 늘려보려는 프로덕션의 무리한 스케쥴 관리 아래 검증안된 초짜 감독들이 붕어빵 찍어내듯 만든 고만고만한 작품이 아니라, 검증된 감독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치열하고 묵직한 서사와 이에 걸맞는 깊이있는 연출을 가진 작품이 아닌가하는 생각마저 드네요. 

 

PS. 

 

1.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시작하기 전의 작품이지만 크레딧에는 스탠 리와 케빈 파이기가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스탠 리는 작중에서 잠시 까메오로 출연했고요. 

 

2. 배우 이야길 안할 수가 없습니다. 극을 끌고가는 캐릭터는 딱 4명인데 이를 연기한 배우들 모두 최선의 연기를 보여줍니다. 닉 놀테와 샘 엘리어트의 진중한 연기도 일품이지만, 아버지에 대한 애증과 연인을 잃은 상실감을 별 다른 대사 없이 그저 사슴같은 눈망울에 오롯이 담아내는 제니퍼 코넬리의 처연한 연기는 그야말로 필견입니다.

 

Hulk19.webp.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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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arlHan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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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
이안 헐크 수작 입니다. 최고헐크 작품이죠. 인크레더블 망작을
보면 ㅋ. 개인적인 취향 입니다.
05:39
5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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