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게임'이 세계를 열광시킨 이유(일본 매체 칼럼)
데일리신초 라는 일본 매체에 올라온 칼럼인데...
글 내용이 상당히 좋아서, 분량이 많았지만 옮겨봤습니다.^^
https://www.dailyshincho.jp/article/2025/02021050/
시즌3 공개일 확정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를 열광시킨 이유
‘민주주의’와 ‘평등’의 기만을 드러내다.
2021년 9월 시즌 1이 공개되자마자 순식간에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된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그로부터 약 3년 후인 지난해 12월 시즌 2가 공개되었고, 최근에는 올해 6월부터 시즌 3가 공개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도대체 <오징어 게임>은 왜 주목받는 것일까? 영화 저널리스트 아츠미 시호 씨가 설명한다.
게임 참가는 ‘스스로 결정한 것’
“여러분께서는 모두 자발적으로 어떤 강압도 없이 이 게임에 자원하셨습니다. 지금 다시 선택의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오징어 게임> 시즌 1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게임장에 모인 참가자들에게 이렇게 말한 '□마스크'는 “빚쟁이에게 쫓기는 쓰레기 같은 삶”과 “우리가 주는 마지막 기회” 중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가뜩이나 돈이 필요한 참가자들은 천장에 매달린 거대한 투명 ‘상금 저금통’을 보고 더욱 욕심이 나서, 모두들 ‘참가 동의서’에 사인한다. 동의서는 “게임을 임의로 중단할 수 없다”, “게임 거부할 시 탈락”, '참가자 과반수가 동의 경우 게임 중단 가능“이라는 3가지 항목만 있는 간단한 내용이다.
여기까지 전개되면서 참가자들은 게임 주최 측이 설치한 여러 함정에 걸려들고 만다.
우선 첫 번째는 양자택일. 빚더미에 앉은 참가자들은 분명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은 선택지가 2개뿐’일 리가 없다. 선택을 강요하는 상황에서 극단적인 ‘모 아니면 도’만을 제시하는 것은, 다른 선택지가 없는 것처럼 여겨지게 만드는 인지적 편향을 유발한다.
‘게임의 규칙’은 깰 수 없다.
두 번째는 '참가 동의서'에 사인하는 것인데, 이는 상대방에게 특정 행동을 취하게 하는 세일즈(혹은 사기)의 일반적인 테크닉 ‘치알디니의 법칙’으로 알려져 있다.
예컨대 어떤 계약을 할 때, “약속했죠? 사인했죠?”라는 압박을 받고서 어쩔 수 없이 동의한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 있을 것이다. 설령 법적으로 무효일지라도, 인간은 구두나 서면으로 한 자신의 결정에 대한 일관성에 얽매이기 쉽다. <오징어 게임>에서도 참가자들은 게임의 주최 측이 강요하는 규칙을 어기는 게 심리적으로 어려워진다.
교묘한 것은 첫 번째 게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가 끝난 이후의 전개다. 참가자들은 여기서 처음으로 ‘탈락은 곧 죽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 직후, 게임에 걸린 엄청난 상금을 ‘저금통’에 와르르 떨어트리는 돈다발이라는 강렬한 비주얼로 보여준다. 이렇게 눈앞에 매달린 당근을 보게 된 참가자들은 우여곡절을 겪고서도 결국은 “우리(주최 측)가 주는 마지막 기회”를 선택하게 되고, 동시에 ‘탈락=죽음’이라는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규칙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참가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감옥’
참가자 전원이 ‘단체복(녹색 운동복)’과 ‘번호’로 관리되는 것도 <오징어 게임>의 큰 특징이다. 또한 주인공 기훈이 깨어나는 장면을 보면 각 침대를 비롯한 곳곳에 감시 카메라가 설치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수법은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가 말하는 ‘규율 권력’과 유사한 것이다. ‘규율 권력’이란 소속된 인간의 ‘신체’, ‘공간’, ‘시간’을 의도적으로 통제해 권력에 복종하는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근현대의 조직 관리와 통치에 많이 이용되었다.
군대나 학교에서의 제복을 비롯한 복장 착용 규칙, 관리자가 한눈에 감시할 수 있는 공간 구성(파놉티콘), 정해진 좌석이나 이동 시 강제되는 대열, 기상과 식사 등이 꼼꼼하게 정해진 시간표 등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푸코에 따르면 이러한 관리 방식에서 탄생한 것이 근현대의 ‘감옥’으로, 폐쇄된 공간에서 은밀한 강제적 권력 행사를 통해 인간을 처벌하고 교정하는 장소인 것이다.
<오징어 게임>은 바로 그것을 재현한 것이다. 요컨대 무인도에 만들어진 시설은 시리즈 전체를 통해 여러 차례 “살아봤자 아무짝에 쓸모없는 쓰레기”로 묘사되는 참가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감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름’과 ‘얼굴’을 빼앗긴, 견고한 계급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
참가자들을 가장 밑바닥에 두고서 형성되는 계층 구조의 존재도 이 세계를 강화한다. 운영 측 진행 요원으로는, 낮은 순서대로 ‘◯(잡무 담당)’, ‘△(병사)’, ‘□(관리자)’라는 계급이 존재하는데, 시즌 1에서는 그중 ◯와 △의 생활(시간표에 맞춰진 작업, 감시 카메라가 붙은 독방 같은 방, 상급자에게 말을 붙일 수 없는 규칙)을 엿볼 수 있었고, 더 나아가 시즌 2에서는 그들 또한 참가자들과 별반 차이 없는(어쩌면 젊기 때문에 그보다 더 못한)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와 △는 예컨대 고대 로마인들이 노예들을 관리하기 위해 특권적 지위를 부여한 일부 노예와 다를 바 없다. 한국 영화 <기생충>이 그와 꽤 비슷한 상황을 그린 바 있다. ‘지상’의 인간으로부터 특권적 지위를 부여받은 ‘반지하’ 사람은 자신들이 ‘지하’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손에 쥔 알량한 특권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지하’를 격멸하고 공격하도록 내몰리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지상’의 사람들은 ‘반지하’ 역시 ‘지하’와 똑같이 경멸하고 있다. 만약 그들이 연대하여 공격의 대상을 ‘지상’으로 돌리면 귀찮아지기 때문에 그들을 분열시키기 위해 ‘반지하’를 특별 대우할 뿐이다. 이민자 배척을 부추기는 트럼프 정권을 비롯한 모든 나라들의 모든 정권들이 써왔고, 지금도 쓰고 있는 ‘분열 통치’라는 수법이다.
‘상대방의 이득’은 ‘나의 손해’라는 제로섬 게임
<오징어 게임> 시즌 2에서는 이러한 분열을 더욱 심화시키는 두 가지 규칙이 추가된다. “게임이 중단되면 적립된 상금을 남은 참가자들이 나눠가진다.”와 “게임이 하나씩 끝날 때마다 계속할지 중단할지 투표하고, 과반수가 동의할 경우 중단한다.”는 것이다.
게임은 ‘승부를 결정하고, 상금은 승자들이 독식’하는 규칙으로 진행된다. 즉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탈락시켜 패자로 만들어야하는 ‘제로섬 게임’(누군가의 이득(+1)이 누군가의 손해(-1)이 되어 총합(SUM)은 항상 제로(0))인 것이다. 게임이 끝날 때마다 머리 위에 매달린 ‘저금통’에 ‘탈락자(사망자) 수×1억 원’이라는 돈다발이 떨어지는 모습은, 바로 그런 ‘패자의 손해’가 ‘승자의 이득’이 되는 순간을 시각화한 것이다.
시즌 1에서는 참가자의 제안을 통한 투표로 게임이 중단될 경우, 상금이 탈락자의 유족에게 돌아간다는 규칙이었다(즉 최종 우승자만이 상금을 손에 넣을 수 있음). 하지만 시즌 2에서는 만약 중단될 경우, 그 시점의 상금은 살아남은 참가자들이 나눠 갖게 된다. 여기서 “한 게임이 끝날 때마다 투표한다.”라는 새로운 규칙이 작동한다.
참가자들은 전광판에 표시되는 ‘1인당 받을 상금 액수’를 주의 깊게 살피고, ‘좀 더 탈락자(사망자)가 늘어나야 원하는 상금을 얻을 수 있겠구나’ 등을 계산하면서 게임을 계속할지, 혹은 중단할지를 투표한다. 투표 후에는 자신이 어느 쪽에 투표했는지를 명시하는 패치를 가슴에 붙임으로써, 참가자들은 ‘계속파(◯)’, ‘중단파(×)’를 쉽게 의식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저놈들 때문에 내가 피해를 본다’라면서 적대감을 갖게 된다.
‘단체복’과 ‘번호’로 인해 적극적으로 ‘적의 죽음’에 가담
여기서 ‘단체복’과 ‘번호’의 또 다른 효과가 더해진다. 이름과 개성(즉 개인이라는 것)을 빼앗긴 참가자들 입장에서, 다른 참가자들은 ‘번호’나 ‘장기말’ 같은 존재가 되어, 자신과 같은 ‘살아있는 인간’으로 의식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로 인해 가뜩이나 ‘죽음’이 일상화된 폐쇄된 공간에서, 참가자들이 적극적으로 ‘적의 죽음’에 가담할 여지가 생긴다. 상금액 증가=사망자 증가를 원하는 ◯파는 게임 밖에서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을 고려하게 되고, 이에 공포를 느낀 ×파는 ‘선제공격’을 생각하게 된다.
“게임인 이상 어차피 모든 게 ‘제로섬’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즌 2의 4번째 에피소드 ‘여섯 개의 다리’에서 따돌림 당하던 약자 팀의 게임을 참가자들이 한마음으로 응원하는 모습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승리=자신의 패배’가 아닌 게임에서 ‘누군가의 승리’를 시기하거나, 혹은 ‘누군가의 패배’를 바라는(혹은 획책하는) 인간은 그렇게 많지 않다.
게임 주최 측이 자주 이용하는 ‘기회의 평등’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당일에 바이든 전 대통령이 추진해온 '다양성, 형평성, 포용성'(DEI) 관련 정책을 “위법적이고 부도덕하며 차별적인 프로그램”, “위험하고 굴욕적이며 부도덕한 인종 및 성별에 따른 우대 조치” 등으로 규정하고 전부 폐지한다는 행정 명령에 서명했다. 그리고 다음날 21일에는 그러한 “위법적 차별을 없애고 능력에 따른 기회를 회복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말만 들으면 지극히 민주적이고 정당하다고 느껴진다는 게 문제인데, <오징어 게임>에서도 그와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게임 주최 측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하는 것이 바로 “기회의 평등”이다.
하지만 <오징어 게임>에서 외국인이 ‘한국의 전통 놀이’로 대결하는 것과 완력, 지력을 요구하는 게임에서 여성이나 노인이 건장한 장년층 남자와 싸우는 것이 과연 “평등”하다고 할 수 있을까? 팀 게임에서, 사회에서 따돌림 당할 법한 사람들이 동료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것은 부당하지 않은가? 스스로 아무리 애써도 소용없는 것을 ‘실력이 없다’라고 판단하는 것을 공정하다고 할 수 있나? 애써도 소용없는 것의 원인인 세대를 넘어 계승되는 계급과 빈부의 차이, 성별, 국적, 출신지 등에 따른 차별이 명백히 존재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과 그것을 무시한 채 주어지는 ‘기회의 평등’과 ‘실력 대결’을 과연 진정한 “평등”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러한 불합리가 전제된 세상에서, 제한된 길밖에 선택할 수 없는 사람들의 선택이 과연 자유의지에 의한 자기 결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선택한 네 잘못이다.”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민주주의를 방해하는 행위는 용납하지 않습니다.”
◯파(게임 계속파) 중 한 사람이 중얼거렸던 “게임이 무섭지만 지금 밖에 나가면 더 무서운 것이 있어.”라고 한 말이 인상적이다. 그들은 꼭 게임이 계속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렇게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문제를 주장하며 저항하면 “민주주의를 방해하는 행위는 용납하지 않습니다.”라며 총을 겨눈다.
더욱더 불합리한 점은 그런 약육강식의 살육전이 벌어지는 곳이 ‘지하’ 세계라는 점이다. 완벽하게 안전한 곳에서 그것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천상계 인간들이 있다. 지하 사람들은 그러한 시스템 전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한다.
전 세계적으로 격차가 확대되는 요즘 시대, 그 원인으로 지목되는 신자유주의적 가치관을 <오징어 게임>은 통렬하게 비판한다. 과거 회사 측의 정리 해고로 촉발된 유혈 노동쟁의(2009년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낸 쌍용자동차 농성 투쟁을 암시)를 경험했던 주인공 성기훈은 승자의 이면에 있는 455명의 ‘생죽음’을 목격하고, 시즌 2에서 게임을 끝내기로 결심한다.
이를 위해 ‘당연하다는 듯이’ 강요되는 규칙을 거부하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시스템을 파괴하려 한다. 그렇게 시작된 성기훈의 싸움은 어떤 결말을 맞게 될까? 희망과 절망을 품은 <오징어 게임> 시즌 3가 그릴 결말이 기대된다.
아츠미 시호
TV 드라마 각본가를 거쳐 작가로 변신. 여성지, 남성지, 주간지, 문화지 등 일반 잡지, 기업 홍보지 등에서 영화를 중심으로 문화계 전반의 인터뷰, 기고 등을 담당. yahoo!, 어서, mimolle, ELLE 디지털 Ginger 등에 다수 연재. 부산영화제를 20년간 현지 취재하는 등 한국 영화, 한국 드라마 등에 관해 기고, 인터뷰 취재 등도 다수. 저서 ‘어른도 빠져드는 한국 드라마 추천 50선’을 발매 중..
gol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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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의 의견에 반박, 비아냥, 조롱 금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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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쾌한 해설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