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케타가와 스스무 x 스기이 기사부로 대담
본 칼럼에서 애칭 '깃짱'으로 몇 번이나 화제에 오른 스기이 기사부로 감독님이 등장하셨습니다. 스기이 감독은 <은하철도의 밤> <구스코부도리의 전기(부도리의 꿈)> <나인> <터치> <폭풍우 치는 밤에> 등 많은 작품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케타가와 스스무 씨에게 있어서 무시 프로 시대의 선배, 그룹 택 창설 멤버인 동료이기도 합니다.
60년 이상 친분을 쌓아온 두 사람의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고, 무시 프로 시절의 귀중한 에피소드와 2010년 타계한 그룹 택 대표 타시로 아츠미 씨의 추억 등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아케타카와 씨는 1963년에 무시 프로에 입사하여 제작진행을 처음 맡은 것이 <철완 아톰>의 스기이 씨의 연출 회였다고 하죠(※편집자 주: 취재 후 하라구치 마사히로 씨가 작성한 아케타카와 씨의 작품 목록에서 63년 9월 17일 방송 38화 '미친 소행성의 권'을 확인했다.).
스기이: 그랬었지. 기억이 안 나네요.
아케타가와: 깃짱은 아니지만, 콘티를 좀처럼 그려주지 않는 사람의 집까지 찾아가서 빨리 그려주세요, 이런 식으로 했어요.
스기이: 저는 토에이에서 무시 프로에 온 사람인데, 이상한 표현이지만 당시 무시 프로에서 저와 사카모토(유사쿠) 씨, 야마모토(에이이치) 씨는 특별하게 대접받았어요. 이 세 사람이 데즈카(오사무) 선생님 밑에서 애니메이션부를 만든 멤버였으니까요. 특히 저 같은 경우는 제멋대로라고 해야 하나,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주시는 느낌이었습니다.
매주 방송되는 TV 애니메이션 제작은 매우 힘들었고, 특히 마감 직전에는 '마의 1주일'이라고 불릴 정도로 거의 잠을 못 잘 정도로 바빴습니다. 제작 책임자인 야마모토 씨와 사카모토 씨의 부담감은 상당했을 겁니다. 몇 번이나 더 이상 안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순간이 있었는데, 두 사람이 무시 프로의 전무인 아나미(카오루) 씨에게 '이제 <아톰>은 그만하자'고 직언을 하러 갔다가 아나미 씨로부터 "여기서 하느냐 그만두느냐는 하늘과 땅 차이다"라는 설교를 듣고 '그럼 해보자'고 한 적도 있었어요. 저 자신은 현장형이었기 때문에 <아톰>을 계속해야 한다거나 회사를 유지해야 한다거나 하는 부담감은 없었고, 어쨌든 그림만 그리면 된다는 생각이었지만요. 아케 씨(※아케타가와 씨의 애칭) 같은 제작자들도 힘들었을 것 같아요. 당시에는 모든 것을 사내에서 하고 있었고,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해야 했으니까요.
아케타가와: 바쁠 때는 한 달에 절반 정도는 무시 프로에서 잤었어요. 일이 너무 힘들어서 스트레스로 알콜 중독이 된 연출가도 있는데, 술을 마시면 그림을 그려주지만, 술을 마시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스기이: 아케 씨가 말한 알코올 중독이 된 연출가는 그림을 맛깔나게 잘 그리는 사람인데, 저는 그 분의 그림을 좋아했어요. 어쨌든 무언가로 스트레스를 풀지 않으면 술을 마시기 때문에 그의 집에 가서 함께 유화를 그리자고 권유한 적도 있었어요.
매주 30분짜리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은 정말 힘들어서, 제 기억으로는 저와 린 타로를 제외한 대부분의 연출가들이 한 번쯤은 쓰러진 적이 있었어요. 우리가 쓰러지지 않은 이유는 아르바이트로 만화를 그렸기 때문에 만화 그림을 그릴 수 있었기 때문이죠. 당시 애니메이션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은 미대를 나온 사람들이 많았고, 회화의 그림과 데즈카 선생님 같은 만화의 그림은 전혀 달랐어요. 우리는 데즈카 선생님의 그림을 잘 그렸기 때문에 빨리 그릴 수 있었어요.
얼마 전에도 아케 씨와 이야기를 나눴는데, 최근 여러 사람과 이야기하다 보면 지금은 내년 작품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되니 드디어 애니메이션계도 스케줄이 좋아진 건가 싶어서......
아케타가와: 말도 안 돼요(웃음)
스기이: 아케 씨네는 여전히 힘들다고요(웃음).
--무시 프로에 음향부가 생긴 배경을 당시 스기이 씨는 어떻게 보셨나요?
스기이: 예전부터 토에이에서는 감독이나 연출이 음향 디렉션을 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제작과 음향을 분업하는 지금의 음향 감독이나 음향 디렉터 제도는 처음엔 애니메이션계에는 없었어요.
무시 프로의 동료이자 훗날 우리와 함께 그룹 택을 설립하게 되는 타시로(아츠미) 씨가 데즈카 선생님에게 직접 호소하여 음향 부분을 분리하여 별도의 팀으로 만들게 된 게 시작입니다. 타시로 씨는 매주 방송되는 TV 애니메이션에서 연출가가 매번 스튜디오에 가서 사운드 디렉팅을 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으니, 연출가와 애니메이터가 러쉬, 즉 소리가 없는 그림까지만 완성하면 나머지는 음향부가 배우나 음악가 등의 일을 모두 맡겠다고 테즈카 선생님께 말씀드렸어요. 뮤지컬에 연출가와 별도로 음악감독이 있는 것처럼 분업화하자는 발상입니다.
또 당시 연출을 하는 사람 중에 음악을 아는 사람이 매우 적었다는 배경도 있습니다. <아톰> 초창기에는 연출가가 음향의 오노(마츠오) 씨에게 '이 컷 분할에서 어디에 소리를 넣으면 되느냐'고 기초적인 부분에서 혼이 나기도 했으니까요. 타시로 씨는 대학에서 밴드를 했기 때문에 악보도 읽을 수 있었어요. 무시 프로의 음향부가 지금으로 이어지는 애니메이션 음향 세계의 시작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아요.
아케타가와: 칼럼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철완 아톰> 시절에는 후지TV의 벳쇼(타카하루)라는 분이 애프터 레코딩 디렉팅을 맡았어요. <철완 아톰> 시절의 타시로 씨는 벳쇼 씨를 도와 아오이 스튜디오에 대본을 전달하는 등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스기이: 우리 세대는 비교적 다양한 것에 도전할 수 있는 세대였어요. 지금 사람들은 기초가 다져진 상태에서 감독이나 음향감독이 되었지만, 우리 때는 좋든 나쁘든 엉망진창이었으니까요.
아케타가와: 모든 것이 완성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이제부터 만들어 가는 느낌이었죠.
스기이: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얼마나 빨리 자기 자리를 만들 수 있느냐가 승패를 가르는 부분도 있었죠. 저에 대해 말하자면, 야마모토 씨가 <밀림의 왕자 레오>를 만든다면 저는 <오공의 대모험>으로 다른 것을 만들자고 생각했어요. 린 타로는 린 타로대로, 스기이나 야마모토가 하지 않는 것을 하겠다고 <사부와 이치 토리모노히카>를 한다는 식의 경쟁은 비교적 치열했습니다.
무시 프로에 음향부가 생긴 후, 타시로 씨와 아케 씨는 계속 콤비였죠. 저와 타시로 씨는 재즈를 좋아하고 오디오 마니아였기 때문에 타시로 씨는 자주 저희 집에 와서 고토 유닛이나 아르텍 스피커 이야기를 하는 등 취미 생활을 함께 했어요. 아케 씨와 타시로 씨는 회사 동료로서 타시로 씨의 오디오 취미에는 별로 관여하지 않았죠. 쿨한 사이였나요?
아케타가와: 아뇨, 아뇨(웃음).
스기이: 쇼가쓰 연휴를 반납하고 규슈를 차로 한 바퀴 돌면서 아동복지시설을 돌아다녔을 때는 3명이 함께 갔었죠. 스도(쇼조)씨라는 촬영 담당자도 포함해서 4명이서 갔는데, 그때는 잘했다고 생각해요. 타시로 씨가 제게 와서 쇼가쓰에 집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아톰>을 보여주는 투어를 하고 싶다고 권유했고, 그때는 이미 아케 씨도 멤버로 들어갔어요.
저는 그 투어에 가기 이틀 전에 운전면허를 따서 얼마 안 되었는데, 세 사람 모두 운전을 잘했어요. 아케 씨는 특히 능숙해서 내려가는 산길이나 일반 도로를 달리는 것도 어려운데 '구부러진 길로 갈 거야'라고 말하면서 쏜살같이 내려갔어요. 갓 면허를 딴 제가 운전할 차례가 되었을 때는 냉정하게 운전하게 했고, 어쨌든 운전이 힘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만큼 투어를 마치고 돌아오니 운전이 단숨에 능숙해졌어요.
아케타가와: 깃짱은 아톰 그림을 그릴 수 있어서 아이들이 무척 좋아했죠?
스기이: 큰 종이를 붙이고 만화 대회랍시고 와 하고 그렸죠. <아톰>의 16밀리 필름과 영사기, 스폰서로부터 받은 과자를 차에 잔뜩 싣고 갔으니 아이들에겐 좋았던 것 같아요. 우리는 차에서 잠을 자는 등 제대로 된 호텔에 묵지 않는 강행군으로, 아마 구마모토에 갔을 때 하루만이라도 호화롭게 지내려고 호텔에 1인1실로 묵었던 기억이 나네요. 타시로 씨는 물론 아이들을 위해서도 그랬겠지만, 그렇게 해서 모두 함께 규슈를 한 바퀴 돌고 싶었던 것 같아요.
--1967년 스기이 씨는 아트프레시를 설립하고 무시 프로를 떠나게 됩니다.
스기이: 아트프레시는, 무시 프로에 있던 타카기의 앗짱(※타카기 아츠시씨)이 데자키 오사무짱과 함께 <빅 X> 일을 취하고, 자택 위에 만든 작은 스튜디오에서 하고 있던 것이 시작입니다. 나는 처음, 사카모토씨로부터 "경쟁 상대인 도쿄무비의 일을 무시 프로의 급료를 받으면서 하는 것은 안되죠. 깃짱의 소개였지만, 앗짱에게 그만 두게 하려고 하는데"라고 물었고, 그건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해서 앗짱에게 <빅X> 일을 그만두게 하기 위해 그의 모습을 보러 갔습니다.
그렇게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독립 프로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나도 무시 프로 그만둘 테니 같이 하자'고 해서 아트프레시라는 이름을 타카키 아츠시가 지어준 거죠. 설득하는 쪽인 저까지 그쪽으로 가버려서 무시 프로는 난리가 났고, 그만둔 스기이에게 더 이상 일을 시키지 말라는 목소리도 있었다고 하는데, 저는 그 뒤에도 무시 프로에서 계속 일을 하고 있었어요.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배신자 스기이에게 일을 맡기는 것은 이상하다는 목소리가 나왔을 때 데즈카 선생님이 “깃짱에게는 일을 맡겨 주세요.”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아케타가와: 무시 프로 안에서는 떠들썩했지만, 저는 솔직히 부럽다고 생각했어요. 아트프레시 멤버들은 엘리트 집단이었으니까요.
스기이: 아트프레시는 애니메이션계 최초의 독립 프로였다고 생각하는데, 독립 프로는 항상 풍전등화와 같아서 보장된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언제 회사가 망해도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사람들만 모으려고 애니메이터 요시카와 소지, 오쿠다 세이지, 우다가와 카즈히코, 그리고 제작에 후쿠시마(노부유키) 씨 등 실력 있는 사람들만 7명이 모였어요. 데자키 오사무짱도 당시부터 실력자였으니까요.
아케타가와: 당시 비틀즈 컷이 유행이었는데, 깃짱이 그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어서 멋있다고 생각했던 게 기억에 남아요. 깃짱이 아트프레시에 간 뒤로는 그냥 놀러 다니는 사이가 되었죠. 다 같이 야구나 볼링도 하고, 경주장에서 미니카 같은 작은 자동차를 몰고 달리기 놀이도 했던 기억이 나네요. 재즈 콘서트에 함께 가기도 하고, 레코드 가게에 가기도 했죠?
스기이: 제가 <도로로>를 하고 있을 때, 회사를 만들고 싶은데 깃짱도 함께 하지 않겠냐고 타시로 씨가 집에 찾아왔어요. 음향 회사라면 저는 상관없는 게 아니냐고 했더니, 타시로 씨는 음향도 하겠지만 장래에는 뮤지컬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회사로 만들고 싶고, 거기에는 연출가가 있으니 함께 하자고 하더군요. 그 시점에서 토미타 이사오 씨와 아케 씨에게도 연락이 와서 뮤지컬 애니메이션을 하는 건 재미있으니 좋겠다고 생각해 아트프레시를 나와서 그룹 택 설립에 합류하게 되었어요.
--아케타가와 씨의 칼럼을 읽다 보면 가끔씩 타시로 씨의 이름이 등장하는데요. 스기이 씨가 보기에 타시로 씨는 어떤 분이었나요?
스기이: 타시로 씨라는 사람은 뭐랄까, 취미 생활을 하는 사람이었어요. 요트도 하고, 음향 면에서도 말년에는 오래된 축음기를 수집하기도 했어요. 음향 디렉터로서는 매우 뛰어난 분이지만, 경영자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택도 <만화 일본 옛날이야기>나 <터치>가 대박을 치거나 NHK 일을 하게 되는 등 좋은 시절도 꽤 있었어요.
제가 타시로 씨와 작품 만들기가 수월했던 것은 타시로 씨가 취미로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하고 싶다고 제멋대로 말해도 '괜찮지 않느냐'고 말해 주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리고 역시 음향의 기술적인 부분이나 영화의 음악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영상의 표정이 달라진다는 것, 그러한 연출에 있어서도 타시로 씨는 잘 알고 계셨어요. 배우와의 소통도 정말 잘 하셨어요. 저와 타시로 씨와 의견이 달라서 싸운 적도 있었지만, 음향 감독으로서 좋은 감각을 가지고 있었죠. 아케 씨도 그런 면에서는 공부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아케타가와: 그건 정말 많이 배웠어요. 음향 일을 시작했을 때는 타시로 씨의 방식을 계속 보고 따라하기만 했어요.
스기이: 타시로 씨는 음향 감독으로서는 애니메이션계에서 최고였다고 생각합니다. 센스가 좋고, 다소 도전적인 일을 하고 싶어해서 가끔 실패할 때도 있지만, ‘어, 그거면 돼’ 같은 것도 주저하지 않고 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런 취미를 가진 사람이라는 점이 저와 잘 맞았던 것 같고, 여러 면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사람이었죠.
저는 매직캡슐이 여기까지 훌륭하게 잘 해올 수 있었던 것은 아케 씨가 <밀림의 왕자 레오>를 했던 설정 제작 출신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큽니다. 전체를 보고 꼼꼼하게 회사 운영과 경영을 하고 계시죠. 반면 타시로 씨는 근본이 취미인 사람이고, 음향 감독으로서는 훌륭하지만, 타시로 씨가 사장을 하지 않았다면 택이 망하지 않았을 거라는 의견도 많았으니까요. 다만 타시로 씨는 병에 걸리기 전 건강할 때부터 '택은 나 한 세대만 해도 괜찮다'고 계속 말씀하셨어요. 다른 사람에게 회사를 물려줄 생각도 없고, 후계자를 키울 생각도 없는 것 같았어요. 저는 그런 건 상관없어서 ‘아,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지만요.
아케타가와: 하지만 제가 보기에 타시로 씨가 곤란한 일이 생기거나 넘어졌을 때 상담 상대는 항상 깃짱이었어요.
스기이: 그렇죠.
아케타가와: 깃짱의 조언 덕분에 택이 다시 일어섰다거나, 새로운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만 들었던 것 같아요.
스기이: 무시 프로의 파산으로 택의 경영이 위태로워졌을 때, '우주전함 야마토'의 니시자키(요시타니 요시노부)씨에게 인수당할 뻔한 적이 있었어요. 니시자키 씨도 우메프로 출신으로, 그가 가지고 있던 요트를 다시로 씨가 사준 적도 있는 등, 두 사람은 꽤 친분이 있었어요. 그래서 다시로 씨가 니시자키 씨가 사겠다는 이야기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 같아서 저는 “그만두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말했어요. 니시자키 씨와 손을 잡으면 그에게서 택을 뺏기게 될 거라고요. 그런 짓을 할 거면 차라리 택이 거래하는 은행에 가서 '부도날 것 같아서 위험하니 협조해 줄 수 있겠느냐'고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타시로 씨는 그런 이야기에는 은행이 응하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어차피 위험하니까 일단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더니 결국 은행이 상담에 응해줘서 도움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아케타가와: 은행에는 타시로 씨가 아니라 공인회계사 공부를 하고 있는 제 대학 후배가 갔던 것 같습니다. 그 후배에게는 매직캡슐의 경영에 대한 조언도 계속 받아왔고, 최근까지 임원이기도 했습니다.
스기이: 아케 씨도 잘 알고 계시겠지만, 타시로 씨는 그런 때 판단이 너무 빠르죠. 그 자신은 자기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회사가 없어져도 상관없었을 테지만, 회사 경영자로서 그 판단이 옳은 것인지 의문이 들 때도 있었어요. 그런 의미에서도 그는 취미가 있는 사람이었죠.
--스기이 감독이 2006년 교토세이카대학 만화학부 애니메이션학과의 전임교수로 취임하게 된 것은 어떤 경위가 있었나요?
스기이: 제안을 받았을 때, 저는 전문학교가 계속 해 온 일을 이제 와서 대학이 해도 어쩔 수 없지 않겠느냐고 생각해서 처음에는 거절했었죠. 그러다가 다시 연락이 와서 꼭 애니메이션학과를 독립적으로 만들고 싶다, 커리큘럼부터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전문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애니메이션 만드는 법을 가르치는 것에는 관심이 없으니, 근본적인 '애니메이션이란 무엇인가'라는 커리큘럼으로 하면 좋곘다고 생각해서 수락했습니다. 그때 바로 아케 씨를 초대하게 된 건, 아케 씨가 교육을 잘한다고 예전부터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 무렵 이미 토에이에서 가르치고 계셨죠?
아케타가와: 네, 가르치고 있었어요.
스기이: 애니메이션 업계에는 사람을 잘 가르치는 사람과 개인 기술을 잘하는 사람 두 종류가 있는데, 장인정신으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사람을 잘 가르치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스튜디오에서 학교 같은 것을 만들어도 대부분 실패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가르치는 사람이 잘 못하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했어요. 저 자신은 운 좋게도 처음이 동화였기 때문에 오오츠카 야스오 씨로부터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노하우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었고,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것부터 심리학 등도 공부할 수 있었어요.
그런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대학에서 4년간 애니메이션을 공부할 수 있다면 전문학교의 연장선상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미래에 애니메이션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수업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대학의 방향성으로만 생각한 거죠. 애니메이션이 디지털과 AI로 나아가는 시대에 대응할 수 있도록, 그 너머에 있는 애니메이션이란 무엇인가에 대응할 수 있는 학생을 길러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학생들에게 자주 이야기했던 것은, 졸업하고 애니메이션 일을 하게 된 지 3년 후, 스스로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 대학 공부가 도움이 될 거라고 말했어요. 그러니 지금은 어쨌든 대학에서 공부하자고요. 그런 생각으로 커리큘럼을 만들 때, 저는 음향이 전문 분야가 아니기 때문에 예전부터 잘 아는 친구이자 이미 다른 곳에서도 가르치고 있는 아케 씨에게 부탁했습니다.
아케타가와: 교토세이카대학은 고맙게도 음향 수업을 위해 녹음과 더빙, 믹싱을 할 수 있는 훌륭한 스튜디오를 만들어 주셨어요. 그 스튜디오를 이용해 1년 동안 천천히 시간을 들여 작품의 사운드를 완성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험은 다른 곳에서는 쉽게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특임 교수로서 매주 일요일에 교토에 가서 월요일에는 대학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업을 했습니다. 학생들의 질문에 답하는 등 특별한 일이 있으면 1박을 더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체로 월요일 저녁이나 밤에는 신칸센을 타고 도쿄로 돌아가는 생활을 했습니다.
스기이: 아케 씨는 매직캡슐의 경영자로서 꽤 바빴기 때문에 전업이 아닌 형태로 부탁하게 되었어요. 그것과는 별개로, 교토하면 아케 씨라는 이미지가 제 안에 있었어요. 아케 씨의 삼촌이 교토의 번화가로 유명한 가미시치켄(上七軒)의 회장을 맡고 계셨는데, 저희는 젊은 시절 삼촌 댁에서 신세를 진 적이 있었어요. 오키야를 운영하고 있어서 마이코 씨가 두 명 정도 더 거주하고 있었어요. 아케 씨를 포함해 몇 명이 놀러 가서 이틀 정도 묵게 해 주셨어요.
아케타가와: 토미타 이사오, 오오타 요시코 씨도 함께 있었군요. <도로로>를 위해 지온인의 종소리를 녹음하러 가려고 토미타 씨의 크라운을 타고 모두 함께 갔어요.
스기이: 데즈카 오사무 선생님의 <양지의 나무>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 제가 감독을 맡았을 때, 주인공인 (이부야) 만지로가 오키야에서 깨어나는 장면으로 시작한 것은 그때의 경험이 바탕이 되었고, 그 오키야의 모델은 아케 씨 삼촌의 집이었어요. 관광객으로서 밖에서 보는 것과 안에서 보는 것은 전혀 달라서 그때의 경험은 귀중한 것이었습니다. 그 후 제가 혼자서 아케씨 삼촌을 찾아간 적도 있어서 교토는 저에게 친숙한 장소가 되었어요. 그런 경험도 있고, 교토라면 아케 씨가 반드시 맡아 주실 거라고 생각한 부분도 있었어요.
--감독과 음향감독으로서 두 분은 각자의 일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신가요?
아케타가와: 자주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저희 음향 쪽의 작업은 우선 감독이 있어야 합니다. 감독이 이런 것을 만들고 싶다는 것이 있고, 그것을 어떻게 부풀려서 소리로 표현할 수 있는 소재를 제공하며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의 주된 업무이기 때문입니다. 영상이 없는 한, 우리가 스스로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동적인 형태로 하고 있는 부분이 있어요. 오늘도 깃짱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저 스스로의 아이디어나 기획으로 무언가를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아요.
스기이: 타시로 씨도 비슷한 말을 자주 하셨고, 그래서 음향감독을 그만두고 프로듀서 업무로 전환한 부분이 있는데, 저는 근본적으로 그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은 사운드가 들어가야 비로소 1인분이고, 아케 씨 같은 분들의 작업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니까요.
저는 직접 영화를 만들면서 사물의 질감은 SE, 정서는 음악, 캐릭터성은 배우의 연기가 만들어낸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어느 순간부터 의식하게 되었어요. 이런 소리 부분들을 음향 분들이 만들어주셔야 비로소 한 편의 영화가 완성되는 거죠.
예를 들어 유리컵이 깨지는 장면이 있다고 가정했을 때, 영상만으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지만, 거기에 유리컵이 깨지는 소리가 들어가면 만화 그림인데도 유리로 보이는 거죠. 음악이나 배우의 연기도 마찬가지고, 애니메이션에서 음향은 굉장히 중요해요. 실사의 경우 기본적으로 생물을 카메라가 찍는 것이기 때문에, 보이는 영상의 질감은 3차원의 인간이 익숙하게 보는 것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애니메이션의 경우는 근본적으로 달라서 우리가 자연스럽게 보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죠. 그렇지만 감정이입을 시켜야 하는데,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음향이에요.
저는 학생들에게 소리가 들어가지 않은 애니메이션을 한 번 보라고 자주 이야기해요. 애니메이션의 실체는 러쉬이고, 러쉬는 영화가 아닙니다. 거기에 소리가 들어가야 비로소 입체적인 영상 세계라는 것이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애니메이션의 음향이라는 것은 특별한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케타가와: 애니메이션의 음향이 실사와는 다르다는 이야기는 저도 자주 하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깃짱의 이야기를 듣고 제가 예전부터 생각한 것이 있는데, 애니메이션은 스톱모션이잖아요. 보는 사람은 그림이 움직인다는 것을 알고 보는데, 소리는 스톱모션으로 해도 아무 것도 전달되지 않잖아요. 즉, 소리를 어떻게 시각화할 것인가 하는 것인데, 이것이 영상과 소리의 큰 표현 방법의 차이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스기이: 지금 이야기하면서 잠깐 생각났는데, 아케 씨와 함께 작업한 것 중에 잊을 수 없는 것은 택에서 만든 <노즈미 위치스>(※1992년에 발매된 OVA)라는 복싱 애니메이션의 글러브 소리입니다. 이 소리를 어떻게 표현할지, 소리의 레벨을 포함해서 아케 씨와 많이 다투었죠. 아케 씨는 이쪽이 좋다고 하고, 저는 그것으로는 안 된다고 서로 양보하지 않았어요(웃음).
아케타가와: 기억이 안 나네요(웃음)
스기이: 마지막에는 음향에 관해서는 아케 씨가 감독님이니까 그걸로 됐지만, 저는 불만이 있다는 식으로 말했던 것 같아요. 그런 식으로 감독과 음향감독은 음악의 타이밍 등을 포함해서, 이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항상 일치하는가 하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아요.
아케타가와: 제가 깃짱과 함께 일하면서 기억에 남는 것은 <氷の国のミースケ>(1970년 발표된 단편 애니메이션) 녹음 작업입니다. 요시다 히데코 씨의 내레이션에 대한 디렉팅이 좀처럼 잘 안 풀렸을 때, 깃짱이 딱 와서 한두 마디를 던져줘서 그녀가 이해해 준 적이 있는데, ‘아, 이런 표현 방법도 있구나’ 하고 공부하게 되었어요.
--이야기는 끝이 없지만, 마지막으로 한 마디씩 듣고 마무리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케타가와: 깃짱과는 가끔 전화도 하고, 회사로 놀러와서 자주 이야기를 나누는데, 오늘은 '어, 그런 일이 있었구나'라고 놀랄 때가 많았어요.
스기이: 평소에는 일 이야기는 잘 안 하잖아요. 타시로 씨의 묘소에 참배하러 갈까, 밥이라도 먹으러 갈까, 그런 이야기만 하니까. 하지만 무슨 일이 있으면 역시 아케 씨라는 생각이 제 마음 한구석에 있는 것 같아요. 오랜 인연으로 마음이 통하고, 서로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배터리라는 뜻은 아니고, 서로 공부하는 관계로 여기까지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원문
https://anime.eiga.com/news/column/aketagawa_oto/122952/
https://anime.eiga.com/news/column/aketagawa_oto/122953/
아케타가와 스스무는 <리본의 기사> <보노보노> <맨발의 겐> <AKIRA> <은하영웅전설> 등의 음향감독을 했었습니다.
추천인 2
댓글 2
댓글 쓰기정치,종교 관련 언급 절대 금지입니다
상대방의 의견에 반박, 비아냥, 조롱 금지입니다
영화는 개인의 취향이니, 상대방의 취향을 존중하세요
자세한 익무 규칙은 여길 클릭하세요
아키라 사운드는... 정말 시대를 한참 앞서가서, 지금 들어도 무시무시합니다.
어지간한 요즘 애니는 쨉도 안 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