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1979) 유현목감독의 마지막 걸작. 스포일러 있음.
실제로 공산주의를 겪었던 황해도 출신 유현목감독의
마지막 걸작이다. 육이오 때 이야기인데, 공산주의가 시골 한 마을을 장악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그린 것이다.
오늘날 기억되는지 안 되는지 아리송한 대배우 황정순과 김신재 두 주연의 열연이 핵심이다. (1960년대 수많은 걸작들에서 열연을 하고 활동기간도 수십년에 이르는 황정순은 그야말로 대배우들 중 대배우 반열에 들 만하다. 나이 든 황정순만 기억하는 사람들은 온화하고 푸근한 어머니같은 황정순만 기억할 지 몰라도, 원래 그녀는 독기 어리고 광기 어린 파워풀한 연기를 주로 했던 배우다.)
이대근의 순박한 듯하면서도 엄청나게 파워풀한 연기가 유명하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625 때, 황정순은 아들 강우석과 함께 피난하여 시골 사돈집으로 온다. 황정순의 딸이 이 집 큰며느리다.
황정순을 반갑게 맞아주는 이가
딸의 시어머니 김신재다. 걱정 말고 있고 싶은 만큼 있다가 가라고 말해준다. 노인들끼리 친구하며 지내자고 한다.
김신재의 큰 아들이 황정순 사위이고, 둘째아들이 이대근이다. 사위야 당연히 자기 장모이니 극진히 모시지만, 사돈인 이대근 또한 황정순 집안을 살뜰히 돌봐준다. 순박하고 듬직한 이대근은 사려깊기도 하다.
여기까지만 보면, 훈훈한 홈드라마같지만, 사실은 처절한 비극이다.
이 시골마을에도 공산주의자들이 들어온다. 강우석은 숲에 숨는다. 사돈인 이대근이 집과 숲을 왔다갔다 하며 강우석을 돌본다.
공산군들은 처음에는 이간질과 울컥으로 사람들을 선동한다. 처음부터 지주들을 죽창으로 찌르지는 않는다.
지주들을 붙잡아놓고 쌀뜨물을 배터져라 억지로 먹이면서 코메디쇼 비슷한 것을 한다. 마을사람들은 고소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해서 모여서 구경하며 낄낄 웃는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사람들의 죄의식을 완화시키려는 속셈이다.
공산군들은 "재밌지? 너희들이 나와서 해봐라."하고 부추긴다.
하란다고 해서 눈치없이 나와서 나대는 사람이 이대근이다. 무슨 놀이라도 되는 듯 나와서 지주들을 골리던 이대근은
곧 후회하게 된다. 처음에는 놀이나 장난처럼 지주들을 괴롭히던 공산군들은 점점 더 살벌하게 분위기를 끌고 나간다. 마을사람들은 공포를 느끼며 흩어진다. 이대근은 졸지에 완장을 차고 마을사람들을 위협하면서 마을을 공산주의식으로 재편해나가는 데 앞장서게 된다. 이대근은 자기가 가진 권력에 취하기도 하고, 공산주의자 활동을 하다가 보니 공산주의에 빠져들게 된다. 그는 서서히 자기 사돈의 가슴에도 죽창을 찌를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해 간다.
보다 못한 강석우가 사돈 이대근에게 "너, 이러다 죽는다"하고 말린다. 이대근은 자기가 잘 알아서 처신할 것이라고 말을 끊는다.
이 부분이 가장 자연스럽고 파워풀한 부분이다. 유현목감독의 실제 경험을 그린 것이기 때문이리라.
점점 더 냉혹한 인간으로 변화해 가는 이대근의 연기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면서 아주 인상적이다. (수많은 액션영화와 에로영화에 나오면서 인기와 돈을 벌기는 했겠지만, 배우로서는 큰 손해였을 것이다. 변강쇠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기배우였다. 그가 주연한,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심봤다, 장마 등은 이견의 여지가 없는 걸작들이다.)
화목하게 지내던 황정순과 김신재가문에 이제 갈등이 생기기 시작한다.
공산주의가 싫어서 남하한 황정순가족과 공산주의자 아들을 두게 된 김신재가문이 갈등이 안 생길 리 없다.
하지만, 이 부분부터가 좀 뻔해진다. 이념 때문에 두 개로 분열된 한 가족 - 너무 식상한 상징이다. "왜 하나의 가족이 이념 때문에 둘로 갈라져야 하는가?" -> 이것도 식상한 질문이다. 공산주의를 실제 경험한 유현목감독의
생생한 묘사가 아니었다면, 이대근이 열연을 했어도 이 영화는 죽은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국군이 이 마을에 들어온다. 공산주의자들은 빨치산이 되어 산으로 도망가기 전에, 자기 숙청을 마지막으로 한다. 이대근은 자기가 성심성의껏 돌봐주던 강석우가 숨은 곳을 고발한다. 하지만, 강석우가 바보가 아니다. 이대근이 믿을 수 없는 인간이 되어간다는 사실을 매일매일 봐오면서 눈치 못챌 리 있겠는가? 벌써 다른 곳으로 도망갔다.
이대근은 자기 사상성을 증명하기 위해 지주들을 죽창으로 쳐 죽인다, 그리고, 빨치산이 되어 산으로 도망간다.
"이념으로 분리된 어느 가족의 비극"이라고 포장하기에는 이대근의 죄는 너무 잔인무도하다.
유현목감독이 딱히 이대근은 나쁜 놈하는 식으로 그리지 않고, 팩트만 담담히 보여주는 데도, 관객들은 이렇게 느낀다.
그래서, 김신재가 "내 아들 이대근은 국군의 총탄도 다 피해갈 거다"하고 악을 쓰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할머니가 참 이기적이구나. 이대근이 몇명이나 잔인하게 죽였는데도, 죄의식 하나 없네.'하고 느끼게 된다.
영화 중반부에 접어들면서, 진짜주인공은 황정순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사실상 이 영화를 혼자 떠받친다.
강석우는 국군에 입대하고 이대근은 빨치산이 되어 둘이 총격전을 벌이게 된다.
황정순은 "뿔갱이 다 죽어라"하고 소리치고 김신재는 "내 아들은 총탄도 다 피해갈 거여"하고 맞받아친다.
(장모와 어머니가 살벌하게 부딪치자, 죽을 고역인 것은 사위다. 성실한 사위는 어떻게든 둘 모두 잘 모시려고 노력한다.)
두 대배우들의 불꽃 튀는 열연이 사실상 이 영화를 걸작으로 만드는 가장 중요한 일등공신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영화를 유니크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
영화가 현실적인 것이라기보다 신비하고 무속적인 분위기로 흘러간다. 영화 자체가 마치 쟝르가 바뀐 것처럼
스타일 자체가 무속영화 비슷한 것이 된다.
황정순과 김신재가 너무 걱정하고 너무 발악을 하다가보니, 신기가 생기게 되었나 보다 하고 생각할 정도다.
공포영화스러운 장면도 나온다. 하지만, 영화는 놀랍게도 완전한 하나로 계속 이어진다.
이부분은 이 쟝르 저부분은 저 쟝르하는 식으로 산산히 분리되지 않는다. 하나의 깊은 주제를 끈질기게 붙잡아서
파워풀하게 속도감있게 밀어붙이는 유현목감독의 역량 덕분이다. 그리고, 대배우 황정순과 김신재의 열연도......
김신재는 믿을 것이 없다 부니, 무속신앙에 기댄다. 무당이 어느날 어느시각에 이대근이 돌아올 것이라고 말하자,
김신재는 그 시각에 음식을 푸짐하게 차려놓고 이대근이 오길 기다린다.
그런데, 그 시각에 대문을 넘어온 것은 커다란 구렁이였다. 너무나 뜻밖의 반전이라서 관객들은 충격을 받게 된다.
지금까지 영화가 무속신앙쟝르로 바뀐 것같다고 생각했는데, 이 장면이 바로 클라이맥스다. 대가인 유현목감독이
안 그래도 충격적인 이 장면을 아주 등골 서늘한 명장면으로 만든다. 기둥에 기어올라간 구렁이는 또아리를 틀고
움직이지 않는다. 김신재는 이장면을 보고 기절한다.
황정순은 옛날사람이라 무속신앙에 대해 잘 안다. 그녀는 향을 피우면서, 구렁이에게 달래듯 위로하듯 말을 건넨다.
그리고, 구렁이를 인도하듯 잘 가라고 하면서 천천히 앞장서 움직인다. 구렁이는 그제서야 움직이기 시작해서, 집 바깥으로 나가 버린다. 황정순이 잘 인도해서, 죽은 이대근이 편안히 저숭세계로 건너갔다는 것이다.
혼절상태에서 깨어난 김신재는 아들 이대근을 편히 저승세계로 모신 황정순에게 감사를 표하고, 둘은 다시 친구가 된다.
사실, 냉정하면서도 동시에 격렬한 사상대립이 "무속신앙"하나로 해소되고, 가족이 대동단결한다 하는 내용은 좀 억지 같다. 무속신앙이 아직은 상식이었던 시절, 전근대적인 한 가정에서는 그것이 충분했을 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 사회 한 국가가 사상대립을 이렇게 해소할 수 있겠는가? 이 영화에서도 결국 이 영화 마지막은 황정순과 김신재의 개인적인 화해다. 하지만,둘 간의 개인적인 화해를 사회적인 것으로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무속신앙 자체에 대한 심정적 공감이 없는 현대관객들에게는, 이 장면이 어처구니 없게 느껴질 수도 있다. 구렁이가 넘어왔는데, 어떻게 그것이 이대근이라고 알 수 있지?
이 영화는 무속신앙에 대한 심정적 공감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던 1979년에 엄청난 울림을 가졌던 영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대근 황정순 김신재의 열연이 의심의 여지 없는 대가급이었다는 사실, 유현목감독의 대가급 연출이 폭풍같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정 이 영화의 메세지에 공감이 가지 않는다면,
이 영화를 아주 잘 만든 걸작 엑소시즘영화로 생각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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