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悪は存在しない, 2023) / 하마구치 류스케
<카메라 범신론, 혹은 카메라 룩스>
저 멀리서 총소리가 들린다. 하나를 데리러 가야한다는 사실을 타쿠미는 깨닫는다. 그는 급하게 차를 몰아 돌봄 교실에 도착하지만 하나는 항상 타쿠미가 늦게 온다는 것을 알고 이미 출발한 참이다. 그는 다시 차를 돌려 하나를 찾으러 간다. 이 시퀀스 후반부 차가 보육원의 도착했을 시점부터 카메라는 차의 시점쇼트으로 진행된다. 일반적으로 차 안의 인물의 시점쇼트으로 활용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차 자체'의 시점샷으로 진행되는 이상한 시점쇼트이다. 돌봄 교실에서 하나를 찾으러 가는 장면에서의 시점쇼트은 더욱 기이하다. 자동차의 후면에서 뒤를 바라보는 시점으로 촬영해 자동차의 진행방향이 앞으로 나아갈 때 소실점을 기준으로 풍경이 점차 흡수되는 느낌이 든다. 혹은 반대로 풍경이 확장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상한 시점쇼트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하나를 만나 그녀와 함께 걷는 장면, 혹은 하나를 찾기 위해 혼자 산을 걷는 장면의 트래킹 쇼트 역시 타쿠미와 나란히 걷는 누군가의 시점쇼트처럼 보인다. 타쿠미가 우동집 주인 카즈오와 와사비를 채집하는 과정, 그리고 타쿠미와 그를 설득하기 위해 찾아온 글램핑 사업 관계자 타카하시, 마즈유와 같이 걷는 시퀀스에서는 어린 사슴의 사체의 시점에서 그들이 보여진다. 생물, 무생물, 이미 생명을 잃어 영혼이 빠져나간 생물에까지 하마구치 류스케는 시점을 부여한다. 모두가 모두를 바라본다. 이 응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시선은 기본적으로 주체성을 의미한다. 나는 내 의지로 내가 원하는 어떤 것을 선별하여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시선의 힘은 주체 내에서 구현된다. 영화의 스크린은 특정 주제에 천착하여 카메라를 통해 선별된 이미지를 투사함으로써 대상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발전되어 왔다. 카메라의 시선과 관객의 시선은 동일시되며 피사체를 바라보고 분석하고 해체해 의미를 축출한다. 어두운 방에서 하나의 빛을 포착함으로써 카메라 옵스큐라가 된다. 그러나 하마구치 류스케의 카메라는 정반대로 작동한다.
응시는 주체 외부에서 무작위적으로 구현된다. 그로써 구체는 어디에서 나를 바라볼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낀다. 주체성은 강화되기보다 오히려 해체되고 연약해진다. 응시의 편재성, 어디에나 어떤 형태로든 존재할 수 있다는 것 떄문에 우리는 응시를 길들일 수 없다. 모든 방향에서 오는 빛을 우리가 길들일 수 없는 것처럼. 따라서 하마구치 류스케의 카메라는 카메라 옵스큐라가 아니라 카메라 룩스다.
<사슴은 어디로 가야하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바꿔말하면 선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은 사슴을 사냥하는 맹수를 악으로, 맹수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사슴을 선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선과 악을 구별하는 가치 판단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타쿠미의 말처럼 균형이다. 그는 자신들이 외지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개척자이므로 자연을 파괴하기도 했을 것이고, 그에 따라 어떤 부분은 감당해야 했을 것이다. 자연이라는 현지인을 상대로 '제대로 이야기 하는 방법'을 3세대에 걸쳐 터특했을 것이다. 사슴길과 사슴의 물터를 침범하지 않는 방법으로, 물을 배수로가 아닌 물통으로 얻는 방법으로, 오갈피의 가시를 피해가는 방법으로. 따라서 그는 타카하시처럼 장작을 패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지 않는다. 그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굳은 살처럼 그는 착취에서 무감각해지는 것을 배웠을 것이다. 상상력을 더해보자면, 타쿠미는 어쩌면 사슴 사냥꾼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슴이 인간을 공격하냐는 마즈유의 질문에 타쿠미는 일반적으로 사슴은 인간을 피한다고 대답한다. 다만 한 가지 경우, 사냥꾼의 총알이 사슴을 빗맞혔을 경우 사슴이 인간을 공격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그렇게 아내를 잃었을지도 모른다. 그 후에 그는 심부름꾼이 됐다. 사람과 자연 양쪽을 오가며 균형을 유지하는 심부름꾼.
타쿠미가 타카하시를 죽인 이유는 그가 들뜬 사람이기 때문이다. 장작 패기에 성공에서 희열을 느끼는 사람이고, 빗겨맞은 총상으로 위험한 사슴 앞에 선 하나를 구하기위해 달려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나는 상처입은 사슴 앞에서 모자를 벗었다. 타쿠미가 설명회에서 제대로 하면 협력할 수 있다고 말할 때 그랬던 것처럼. 그것이 타카하시가 배우지 못한 타쿠미와 하나의 언어이다. 그것은 선의 언어가 아니라 공생의 언어이다. 옳고 그름을 구분하지 않고 당신이 나를 존중한다면 나도 당신을 존중하겠다는, 원주민의 언어이다. 사슴의 길 대신 울타리를 만드는 이들은 이 언어를 배우지 못할 것이다. 오직 사슴이 어디로 가야하는지 물을 줄 아는 사람만이 이 언어를 배울 수 있다.
깊이 있는 리뷰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