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존 오브 인터레스트(zone of interest, 2023) / 조나단 글레이저
1. 카메라와 사운드
카메라는 오직 유대인들로부터 몰수한 수용소 인근 토지인 interessengebeit만 응시한다. 사각형 틀 안쪽을 제외하고 모든 밖을 외부화시키는 카메라의 기능을 가장 적절하게 활용하겠다는 듯, 혹은 interessengebeit 외의 지역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카메라는 의식적으로 장벽 너머를 삭제한다. 카메라는 나치의 시각적, 인식적 동조자이며, 주거지역을 내부화함으로써 안전하게 보호하려는 목적을 가지는 것처럼 보인다. 정성을 다해 가꾼 아름다운 정원 앞에서, 안정적인 가족의 화목 앞에서, 적절한 체계를 갖춘 가족 구성원의 위계 앞에서 카메라는 더럽고 추한 것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아름다운 것만을 비추며 탐미적 시선을 고집한다. 주거지역 밖 수용소에 나간 루돌프 회스를 촬영한 장면에서 외부로 시선을 돌리지 않고 필사적으로 회스의 얼굴만을 촬영하는 장면은 카메라의 객관성이 상실됐음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시일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수용소와 주거지역을 경계짓는 물질적인 장벽과 카메라의 시각적, 심리적 보호를 받으며 자신의 청결함을 과시한다.
반면 사운드는 끊임없이 외부에서 내부를 침투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잠에 들기까지, 아니 잠이 든 새벽에도 24시간 내내 사운드는 주거지역 밖에서 안으로 침입한다. 적어도 주거지역 안에서 사운드는 시선(카메라)보다 우월적 위상을 가진 소리의 편재를 입증한다. 카메라가 지금 - 여기만을 전시한다면 사운드는 어느 시점에도 어떤 곳에서도 존재한다. 그 우월적 위상을 통해 사운드는 지속적으로 주거지역을 포위한다. 카메라가 안과 밖을, 청결함과 더러움을, 행복과 불행을 애써 구분지어놓을 때 사운드는 그 경계를 침입하고 뒤섞고 흐리게 해 종국에는 경계를 삭제해버린다.
들뢰즈의 오르샹 이론에 따르면, 수용소에서 들려오는 죽음의 소리는 상대적 오프-사운드(off-sound)이다. 영화 세계 안에 존재하는 그 소리는 폐쇄적인 체계 안에서 작동하며 영화 내 인물, 공간, 시간과 공명한다. 일상적인 장면 - 등교 준비, 사교계 부인들의 티타임, 취침 전 부부의 대화 - 사이에 들려오는 소각로의 작동음, 비명소리, 나치군의 강압적인 명령 등의 소리는 심리적 불안감을 유발시키지만 영화 내부 세계 안에서 디에게시스적으로만 작동한다. 반면에 절대적 오프-사운드는 '형용할 수 없지만 불안감을 조성하는 현존을 지시한다. 또한 물질과 공간보다는 시간과 정신을 더 많이 지시한다.' 예컨대 영화의 초반 암전 상태에서 등장한 사운드와 중반 지점에서 암전 상태에서 붉은 색으로 반전되는 화면에서 등장한 사운드는 절대적 오프-사운드에 해당한다. 그 사운드는 디에게시스 내부에 기원을 두고 있지 않으며 특정 사건이나 인물을 지시하지도 않는다. 형체가 없는 추상적 소리는 구체적 정념을 불러 일으킨다. 높은 음의 소리는 희생자의 비명을, 낮은 음의 소리는 육중한 살상 기계가 작동하는 소리를 연상하게 하고 관객들은 어렵지 않게 이것들을 대응시킬 수 있다. 역사상 존재했던, 지금 현재 진행 중인 모든 집단 살상들은 비명과 기계음이라는 공통분모에 의해 상기된다. 상대적 오프-사운드가 디에게시스적 세계의 안과 밖(거주지역과 수용소)의 경계를 지우는 역할을 했다면 절대적 오프-사운드는 영화와 현실, 과거와 현재, 이미지와 실재의 경계를 지운다.
2. 내거티브와 포지티브
앞서 말한 내용 중 카메라는 나치의 시각적, 인식적 동조자라는 문장은 사실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절반만 사실이다. 극 중간 회스가 딸에게 동화를 읽어주는 장면에서 삽입되는 네거티브 이미지들이 그 반증이다. 아직 현상되지 않은 음화된 이미지는 불완전한 이미지인 동시에 잠재적인 이미지다. 또한 아직 어떠한 처리공정도 거치지 않은 반전된 상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날것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이 이미지는 카메라의 무의식이다. 그러므로 당연하게 이 이미지는 회스가 딸에게 동화를 읽어줄 때, 즉 이제 막 설잠에 들어 무의식이 가장 활발한 때에 등장한다. 왜 유대인을 돕는 행위는 은밀하게 무의식적인 이미지에만 의해 노출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디에게시스적 세계를 구체적으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자아는 초자아, 에고, 이드로 구성된다. 초자아는 나를 둘러싼 세계가 강요하는 규범에 의해 형성된다. 예컨대 우리가 도덕이라 부르는 것들, 사회 구성원들에 의해 금기하도록 강제된 약속들이 그러한데,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세계는 그것이 반전되어 있다. 살인을 금지하는 대신 (유대인의) 살상의 효율성을 고민하고, 도둑질이 금지되어 있는 대신 (유대인의) 물건들을 훔쳐 나눠갖는다. 따라서 이 세계는 유대인에 대한 억압을 반대하거나, 그들을 돕는 행위 등이 초자아로 구성된다. 현실에서 억압된 것들이 꿈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처럼, 유대인을 돕는 행위는 반전된 이미지를 통해 꿈 - 이미지로 등장한다.
회스가 딸에게 읽어주는 동화는 헨델과 그레텔의 일부이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과지 부스러기를 흘리는 장면과 마녀의 유혹을 떨쳐버리고 마녀를 솥에 넣어 화형시키는 장면. 꿈 - 이미지는 이 텍스트에도 반전된 이미지이다. 소녀가 유대인들을 위해 사과를 놓는 것은 결과적으로 유대인들에게 죽음으로 가는 길로 인도할 것이다. 또한 이 세계에서는 마녀가 대신 헨델과 그레텔이 화형당할 것이다. 이 음화된 이미지는 현상되지 않은 채 영원히 네거티브 상태로 남을 것이다.
3. 역사 - 이미지
크리스 마커는 <태양없이>에서 푸티지를 사용하며 이렇게 말했다. "만일 사람들이 이 사진에서 행복을 보지 못한다면 최소한 그들은 검은색이라도 보겠지요."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는 문장이 이렇게 수정되어야 한다. "만일 사람들이 이 이미지에서 절망을 보지 못한다면 최소한 그들은 검은색이라도 보겠지요."
이 영화에서 푸티지는 세 번 등장한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앞서 말한 3분 가량 노출되는 검은 화면과 영화 중반에 검은 화면에서 붉은 화면으로 반전되는 이미지가 그것이다. 이것이 푸티지인 이유는 관객들이 아직 절망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혹은 아직 전개되지 않는 이야기에 앞서 들어선 이미지가 검은 화면보다 더 적절하게 절망을 표현하지 못해서 일 수도 있다. 절망을 보지 못한다면 봐야하는 최소한의 이미지가 검은색이기 때문에.
세 번째 푸티지는 회스의 시선과 함께 나타난다. 아우슈비츠로 다시 복귀한다는 소식을 아내에게 전한 회스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나선다. 그는 갑작스런 메스꺼움을 느끼고 헛구역질을 한다. 층을 내려올 때마다 헛구역질을 하던 회스는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어 복도 끝을 응시한다. 이 때 푸티지가 인서트 된다. 현재 시점으로 보여지는 아우슈비츠는 다크 투어리즘의 전시관이 되어 있다. 끝이 보이지 않을만큼 거대한 죽음이 유리관 안에 전시되어 있다. 전시관의 직원들은 유리와 바닥을 닦는다. 많은 사람들이 더 분명하게 보도록. '청소'는 현대에 와서야 그 의미를 되찾는다. 회스가 본 이미지가 이것일까? 그의 구토감은 이 이미지에 기원할까?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푸티지가 파편화되는 방식이다. 크리스 마커는 우리의 기억은 현재의 지각과 관련되어 선택되고, 연대기적 순서나 맥락과는 상관없는 파편적인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파편화가 기억의 작용을 재현하는 하나의 방식이 된다고 언급했다. 시선 - 푸티지 - 시선으로 엮인 이 시퀀스는 갑작스러운 소격 효과로 인해 관객들로 하여금 개인적 기억의 범위를 넘어 집단적 기억으로 공유하게끔 만든다. 이 푸티지는 질로 폰테코르보의 카포에서 철조망을 붙잡는 유대인, 스티븐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에 등장하는 빨간 옷을 입은 소녀와 함께 아우슈비츠를 기억하는 역사-이미지로 자리 잡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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