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피 디 오리지널 (2022) 걸작. 스포일러 있음.
이 영화와 가장 비슷한 영화를 꼽자면 마틴 스콜세지감독의 좋은 친구들이다.
좋은 친구들은 마틴 스콜제지감독 최대걸작으로까지 언급되는 작품이다.
이 영화 뜨거운 피도 충분히 우리나라 갱영화 수위에 오를 만한 작품이다.
구암포라는 작은 항구도시의 조폭 행동대장 정우에게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갱영화다.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마음에 든 것은 탄탄한 각본이다.
원작이 문학동네에서 출판된 소설이라고 하는데, 기존 느와르물의 각본과는 수준이 다르다.
기존영화들을 짜깁기해서 자극적이고 비현실적인 액션물을 만드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굉장히 밀도 높은 각본이 예술의 경지다.
조폭의 자잘한 일상을 보여주다가 이것을 중첩시키며 거대한 조직 간 음모를 서서히 그려나간다.
그리고, 그 안에서 어떤 선택에 직면하게 되는 정우에게서 실존적이고 윤리적인 문제를 끄집어낸다.
이것의 수준이 아주 높다.
치밀함과 사실성 문학성에서 이 영화 뜨거운 피를 따라갈 갱영화는 우리나라에 없다.
마틴 스콜세지감독 영화 속에서 나오는, 이탈리아 마피아의 사회적 분석을 이 영화에서 볼 수 있을 줄 몰랐다. 마을 터주대감이자 돈을 펑펑 써서 마을 전체에 돈이 돌아가게 하는 통 큰 보스, 상인들에게서 10% 상납을 받는 조폭두목 - 손영감이다. 정우는 구암포의 토착조폭 손영감의 행동대장이다. 인맥과 인간관계로 돌아가는 이 폐쇄적인 사회에서 정우는 권력과 조직들 간 중계 및 조정역할을 한다. 나쁜 놈들은 맞지만, 손영감이나 정우는 가짜 참기름 만들기, 중국산 고추가루를 한국산으로 둔갑시키기 등 쪼잔한 범죄를 저지른다. 이 정도로도 손영감의 그 소박한 구암포 보스역할을 하기에는 충분하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심도 있게 토착형 조폭과 마을사람들을 묘사해서, 원작가가 무슨 경험이나 있나 생각이 들 정도다. 그는 땀냄새 나는 인간들을 그리고 싶었다고 하는데, 멋지게 달성하고 있다.
정우의 커리어는 아직 한참 남았기에 뭐라 할 수 없지만, 대표작으로 꼽아도 손색없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그는 멋들어진 캐릭터가 아니다. 영화 바람에서 본 기억때문인지 몰라도, 적당히 폭력적이고 적당히 타협적이고 적당히 윤리적이다. 그냥 조금 찌질한 시골 조폭 행동대장이다. 손영감 밑에서 가짜 고추가루 만들어 팔기 등 찌질한
짓을 하면서 자괴감을 느낀다. 손영감에게서 푼돈을 받아 생활한다. 명성에 비해 실속이 없다. 자기가 감옥에 갔을 때, 손영감이 도와주었던 때문에 은혜를 갚는다는 생각이다. 사랑도 존경도 미워하지도 않는다.
정우는 손영감 밑에서 토착형 조폭을 유지한다. 그 일을 위해 사람도 죽이고 폭력을 휘둘러 병신도 만들고 그런다.
정우는 착한 사람은 아니다. 죽여야 할 때는 무표정하게 죽인다. 하지만, 그 "죽여야 할 때"를 최소화시키려 노력한다.
같은 고아원 출신 창녀 인숙과는 수십년 지기 친구다. 지금은 동거 사실혼 비슷한 것을 한다.
결혼도 아니고, 애인도 아니고 그렇다. 인숙은 정우를 남편 비슷하지만 가까운 존재는 아닌 것으로 취급한다.
인숙에게는 아들이 있다. 아미라는 전과자 청년이다. 정우의 아들이다. 정우는 아들을 아들이라고 인정도 안 하지만,
버리지도 않는다. 인숙과 아미를 진심으로 돌본다. 정우는 이렇게 미적지근한 삶을 산다.
정우는 이런 삶을 어디까지 지속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자기가 어떤 선택을 내리길 주저한다.
이 영화에서 정우는 성인오락실 사업에 뛰어든다. 말하자면 성인도박이다. 정우는 구암포로 몰려드는 마약조직과 싸우고 성인오락실을 접수하려는 범죄조직과도 싸운다. 그는 무서운 것이 없고, 싸움도 잘 하고, 머리가 잘 돌아가서 조폭들과 협상도 잘 한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정우는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 때는 물러선다. 약해지고 좌절을 잘 한다.
그것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 무서운 조폭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를 무서워 않는다. 그를 몰아붙이면, 정우는
주저하다가 뒤로 물러선다.
어찌 보면, 영화 바람에서 찌질한 역의 업데이트 버젼이다. 정우의 잔인하고 폭력적인 활약과 동시에 그의 내면의 찌질함과 연약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는 중반부를 지나가면서 본격적으로 살벌해지기 시작한다.
구암포를 접수하려는 거대마약조직이 아주 치밀하게 계략을 짠 것이다. 마약을 배송할 항구가 막혀 버리자,
구암포를 손에 넣어 마약기지로 만들 셈이다. 손영감이야 어쩌겠는데,
가장 무서운 존재는 정우다. 그래서, 계략을 짜서 정우를 거미줄 안에 넣은 것이다.
지금까지 정우 하나를 두고 그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공모해서 그를 바보로 만들었다.
자기가 사랑하던 구암포가 마약기지가 되면 어떻게 될 지 손영감은 잘 안다. 어리숙하게 행동하면서도 속으로는 현명하고 깡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죽을 각오를 이미 한다. 정우도 손영감과 마찬가지로 마약조직이 구암포를 어찌 만들 지 잘 안다.
정우와 손영감은 거대마약조직에 맞서 역부족인 싸움을 벌이지만, 손영감은 식물인간 그리고
정우는 온몸에 자상을 입고 간신히 살아난다. 정우는 늘 하던 것을 한다. 포기하고 좌절하고 물러서는
것이다. 선택의 고비마다 선택을 못 내리는 그는 결국 상황을 최악의 최악으로 만든다.
이 영화 이야기의 밀도는 다른 갱영화들보다 월등하다. 아주 사실적으로 정우의 깡패활동을 그리면서도
동시에 윤리적 실존적 문제를 제기한다. 정우도 자기 자신을 잘 안다. 하지만,
손에 더러운 것을 묻히고 발버둥치면서 담벼락에 머리를 박는 그런 짓은 못한다.
하지만 그 마약조직이 자기 아들인 아미를 죽이자 이야기는 달라진다. 정우가 마약조직의 진입에 절망해 좌절하자,
아들이 죽었는데도 주저하는 정우에게 실망한 인숙은 구암포를 떠난다. 창녀가 될 지경에 이르러서도 고향
구암포는 떠나지 않았던 인숙이 자기를 떠나자, 정우는 인숙이 자기에게 돌아오지 않을 것을 깨닫는다.
그는 어떤 결심을 내린다.
정우의 열연만큼이나 영화 속 정우의 캐릭터는 아주 훌륭하다. 구암포 토착조폭 버젼의 햄릿이다.
구암포는 빼앗기고, 손영감은 식물인간이 되고, 마약조직이 구암포를 횡행하고, 아들은 살해당하고,
그런데도 정우는 좌절해서 그냥 방황할 뿐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경멸한다. 정우는 깨닫는다.
이제 온몸에 똥을 묻히고 절박한 심정으로 쇠벽에 머리를 부딪쳐야 한다.
(정우의 운명을 잘 보여주는 멋진 장면이, 아들 아미가 죽기 전 아버지라고 불러도 되냐고 묻는 장면이다.
아미도 정우가 자기 아버지인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미에게 아버지라고 말하기 주저하다가 결국 아미가 먼저
아버지라고 불러도 되냐고 묻게 만든 정우다. 정우는 아들아 하고 따뜻하게 말해주는 대신, 싱긋 웃으며 뭐 그러지
하고 대답한다.
그리고 아들이 살해당한다. 정우는 아들아 하고 울부짖지만,
이미 늦었다. 왜 그는 늘 돌봐주고 같이 지내면서도 진작에 아버지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것이 굉장히 섬세하게 구축이 되어서, 나중에 정우가 모든 것을 다 걸고 조폭두목을 난입 살해하는 장면이 십분 이해가 된다.)
정우가 난입하여 마약조직의 두목과 친구 등 원수들을 다 죽여 버리는 장면은 아주 난폭하고 박진감 넘친다.
하지만 통쾌한 활약이나 짜릿함은 보여주지 않는다. 정우는 모든것을 다 잃었는데, 이제 와 통쾌할 것이 무언가?
이제부터 거대 조폭조직과 십년이든 그 이상이든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정우는
더러운 진흙탕에 몸을 던진 것이다. 이제 앞으로 그의 앞에 남은 것은 피비린내뿐이다. 그리고, 영화는 막을 내린다.
그의 운명은 햄릿의 죽음이나 다를 바 없다.
연출도 아주 훌륭하다. 화려하지 않게 가라앉은 화면에, 실감나는 생활인들을 그리는 어프로치,
정우가 사람들을 죽여나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나가는 것도 마음에 든다. 푸줏간에서 칼로 고기를 자르듯,
무신경하고 아무렇지 않게 인간 하나가 사라진다. 인간 생명이 이렇게 연약한 것인가? 한번 칼로 치면 그냥 꺼져 버린다. 신세계에서 벌어지는 그 화려한 활극같은 것은 이 영화에 없다. 살인이 사무적이고 무감정에다가 금방 끝난다.
아주 사실적이다.
디 오리지널에서 극장개봉판에 20분을 더 덧붙였는데,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완벽하다. 여기에서 20분을 뺐었다니,
어디 뺄 부분이 있었다고...... 감독이 얼마나 속이 터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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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 한번 봐야겠네요.
글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