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은 후기 / 영화 <행복의 나라> - 아쉽고 안타까운.
<행복의 나라>는 10.26 사건의 주동자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수행비서관 박흥주 대령 재판을 모티브로 한 영화다. 박흥주 대령은 사건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단심제 군법 재판에 회부된다. 이를 변호하고자 하는 가상의 인물 변호사 정인후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연기는 잘했으나.
영화 초반은 정인후 변호사 캐릭터를 설명하는 장면들로 구성된다. 정인후 변호사는 억울한 사람들을 변호해 주는 스타일의 변호사는 아니다. 재판을 이겨서 이득을 챙기려고 하는 변호사의 모습에 가깝다. 그는 재판은 옳고 그른 것을 갈라내기 위함이 아니라 이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군더더기 없는 시원한 캐릭터 설명이다.
정인후에겐 자신의 성향과 다른 아버지가 있다. 아버지는 운동권을 도와줬다는 이유로 수감당했다. 그런 아버지를 두고, 정인후는 자기만 올곧으며 바른 사람이라고 비꼬듯 말한다. 이는 아버지의 태도는 존중하나 그렇게 따라 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에서 나온 말일지도 모르겠다.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나 정직하고 올바른 아버지가 답답하게 느껴져서 그런 말을 했을 수도 있다. 어느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부자 관계로 보인다.
운동권을 돕다가 수감된 아버지가 있어 그런지 정인후는 군인들에 대한 불신과 혐오의 정서를 가지고 있다. 전두환과 대면 장면에서 이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런 감정을 가지게 된 구체적인 이유는 없다. 운동권을 돕다가 수감된 아버지. 군인들에게 끌려가 폭행을 당하는 장면이 있긴 하지만 그것만으로 저 감정을 설명하기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당시의 일반인들이 가졌던 보편적인 감정을 투영한 것일 수도 있겠다.
이런 서사를 지닌 변호사 정인후는 자신의 유명세 키우기 위한 기회로 생각해 박태주 대령 재판에 뛰어든다. 캐릭터 특징에 부합하는 부분이라 납득이 어렵진 않다. 하지만, 영화 중후반부터 재판에 임하는 정인후의 태도가 달라진다. 박태주 대령을 살려내고자 한다. 재판에 임하는 정인후의 태도가 이렇게 바뀐 구체적인 설명이나 개연성은 확인하기 어려웠다.
군인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있기 때문에 박태주 대령 재판에 뛰어들어 신군부를 향해 싸우고자 하는 것이라면, 만 번 양보해서 납득하려고 시도는 해볼 수 있겠다. 끌려가서 군인들한테 폭행도 당했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납득해 보려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군인에 대한 불신이 이유라면 군인인 박태주 대령의 잘못도 따지는 입장이 되어야 하는 게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정인후가 박태주 대령을 재판에서 살려야 할 명분이 도대체 뭘까 생각하게 된다. 재판 결과에 따라 자신의 안위에도 큰 변화가 있을 수 있는 일에 전력으로 뛰어드는 그럴듯한 이유가 있는 게 자연스러우니까.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찾을 수 없었다. 영화는 정인후에게 그럴만한 서사를 부여하거나 개연성을 작게나마 줬어야 한다.
운동권을 도운 일로 수감 중이던 아버지가 건강 악화로 사망한 일. 군인들에게 끌려가 폭행을 당한 일. 재판장에서 판사들이 보인 불공정한 모습이 있긴 하다. 하지만, 이러한 사건들을 이유로 생각하기엔 부족함이 넘친다. <행복의 나라>는 재판에 대한 정인후의 개연성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영화가 삐걱거리기 시작하는 부분이다.
과유불급
<행복의 나라>는 실제 사건을 재구성한 영화다. 판타지적 장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판타지도 판타지 나름이다. 듣도 보도 못한 인물과 사건이 등장하는 반지의 제왕과 같은 판타지가 있는 반면. <광해, 왕이 된 남자>처럼 상상력을 동원해 있었을 법한 일을 판타지로 풀어낸 영화가 있다. 광해는 실록에서 사라진 15일 동안 있었을 법한 일을 상상력으로 채운 영화다. <행복의 나라>도 16일간의 박흥주 대령 재판을 재구성한 영화로서 있을 법한 일을 풀어낸 판타지 영화로 볼 수 있다.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사극이지만 판타지 서사와 이병헌의 코믹을 사용하면서도 장르적 특성을 훼손하지 않은 잘 만든 영화였다. <행복의 나라>도 광해와 비슷한 장르 구성을 보인다. 시대극이면서 판타지적 장면들이 있다. 여기에 조정석을 이용한 코믹까지. 다만, 이번 작품에서 추창민 감독의 연출은 좋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변호사 정인후가 골프장에서 전두환을 대면한 장면이 그렇다. 속 시원한 말을 하는 장면은 캐릭터의 서사와 극의 특성을 모조리 저버리는 연출이었다. 앞서 말했듯, 정인후가 전두환에게 그런 말을 할 정도로 서사가 쌓인 캐릭터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상상력으로 있을 법한 일을 보여줬어야 했는데 변호사 혼자서 전두환을 독대하는 장면은 있을 법한 일이라고 하기 어렵다. 족보 없는 판타지로 봐야 한다. 선을 넘어도 많이 넘었다.
그 당시 전두환을 독대할 인물은 노태우 정도 아니었겠나. 아무리 생각해도 변호사가 그 시절 최고 권력을 독대하는 건 지나친 판타지다. 감독의 의도가 듬뿍 들어간 장면이라 감독의 선택을 비난할 순 없다. 감독의 메시지도 뭔지 알겠다. 다만, 세련된 방식의 연출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장면들로 인해 영화의 김이 빠진 게 안타깝다.
이런 상황에 조정석의 코미디가 더해지며 영화가 지향하는 분위기가 대체 어떤 것인지 헷갈리게 한다. 변호사 정인후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껴안는 장면이나. 로키를 오마주 한 건지 뭔지 알 수 없는 잽을 날리는 장면. 그리고 정승화 총장에게 증인 신청을 부탁하기 위해 길에서 뻗치면서 기다리는 장면. 이 모든 장면의 연출이 아쉽고 올드했다.
이와 달리 코미디를 적절하게 녹여낸 성공한 시대극 영화가 있다. 바로 <서울의 봄>이다. 블랙코미디적 연출이 적재적소에 쓰였다. 국방부장관이 한미연합사에 가서 "I am fine thank you and you"하는 장면. 국방부장관이 벽장에 숨어 있다 들키는 모습. 똥별들이 육본 벙커를 버리고 이태신 장군이 있는 곳으로 허둥지둥 이동하는 모습이 그랬다. 이 장면들은 앞으로만 내달리는 영화의 호흡을 잠깐 달래주며, 씁쓸한 웃음을 짓게 만든다. 이와 동시에 영화와 캐릭터의 특징을 보충하면서 서사와 분위기를 헤치지 않았다.
<행복의 나라>가 보여준 코믹한 장면은 블랙코미디와 거리가 멀다. 단순히 웃음을 위한 웃음으로 보였다. 영화의 분위기까지 흐리며 굳이 넣어야 하는 장면인가 하는 생각만 자아나게 할 뿐이었다. 차라리, <서울의 봄>처럼 블랙코미디적 요소를 제대로 도입했다면 영화가 달라졌을 텐데 말이다.
영화 <행복의 나라>에 장점은 없나?
장점이 있긴 하다. 일반적으로 10.26 하면 김재규만 떠올리기 일쑤다, 이 영화는 김재규 이외에 어떤 인물이 있었는지, 사건 이후 어떤 일이 있었는지 관심을 가지게 할 계기를 만든다는 장점을 지녔다. 조정석과 이선균 그리고 유재명의 연기도 그 자체로 훌륭했다. 담담한 이선균의 연기를 오랜만이자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다. 유재명의 전두환은 황정민이 <서울의 봄>에서 연기한 전두환과 다른 압도적인 맛이 있었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오점인 전두환을 직접적으로 다룬 영화라는 점에서 박수 쳐주고 싶다. <그때 그 사람들>, <남산의 부장들>에서는 박정희를 다루지만 전두환 캐릭터를 직접적으로 등장시킨 영화는 작년 겨울에 개봉한 <서울의 봄>이 유일했다. <행복의 나라>가 전두환을 등장시킨 두 번째 영화가 되었다. 히틀러와 나치를 다룬 영화는 정말 많은데도 불구하고, 전두환을 직접적으로 등장시키는 영화는 이제야 두 편 만들어졌다. 이 점에서 이 영화의 등장 자체가 반갑다.
*이정재 감독의 헌트에서도 전두환 캐릭터가 등장은 하지만 몇몇 장면에 잠깐 나오는 수준이라 직접적으로 다뤘다고 보기는 어려워 제외한다.
마지막으로, 골프장 일부 장면의 연출이 좋았다. 앞서 과한 판타지 장면이라고 비판했지만, 정인후가 골프장 물웅덩이에 들어가서 골프공을 찾는 장면은 마음에 들었다. 물웅덩이에 잠긴 수많은 골프공들이 전두환이 죽인 수많은 영혼들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 웅덩이에 들어가 있는 정인후도 결국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기도 했고. 골프장 전체 장면을 보면 과한 판타지로서 좋은 연출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웅덩이 장면은 잠깐이지만 훌륭한 연출이었다고 생각한다.
숨은 주인공, 이선균.
<행복의 나라>는 장점과 단점이 명확한 영화다. 배우들의 좋은 연기를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루는 인물들에 비하면 주제 의식이나 연출이 아쉬워지는 영화다. 이 작품이 배우 이선균의 유작이라는 점도 먹먹해진다. 박태주 대령이 땀 흘리며 어두운 골목길로 혼자 달려가는 모습, 긴 시간 법정에 있는 모습, 마지막 인사하는 모습을 보면 실제 이선균의 마지막이 떠오른다. 이런 부분을 생각하면, 조정석의 영화라기보단 이선균의 영화로 느껴지기도 한다. 실제 이선균이 영화에 등장하는 느낌이랄까.
*이선균이 연기한 박태주 대령의 수감번호는 1240이다. <행복의 나라> 상영시간은 124분. 이선균을 극장에서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선균에게 더욱 눈이 가는 영화기도 하다.
다음은 영화 마지막에 나오는 문구다.
"우리는 이선균과 함께했음을 기억합니다."
해변의캎흐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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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만의 캐릭터 해석... 특히 전두환 등은 좋았지만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