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학개론 (2012) 첫사랑. 스포일러 있음.
잘 만든 영화는 아니다.
"35살의 건축가 승민에게 15년 전 첫사랑이었던 서연이 나타나고 일상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런 내용은 너무
고리타분하다. 그리고, 서연의 낡은 집을 재건축하러 제주도로 따라간 승민과 서연 사이에 옛감정이
되살아나고, 승민은 현재 약혼녀에게 죄의식을 느낀다 하는 내용도 충분히 예상가능한 줄거리다.
액자식구성으로 군데군데 둘 간 과거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보여주는 것도 전형적이고 예상가능하다.
무언가 새로운 변주 새로운 창조를 불어넣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사실 개봉 당시부터 있었던 비난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멜로드라마로 역사에 남았다. 그것은 이 영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생생하게
첫사랑의 안타까움을 담았기 때문이다. 가장 아름답고 인생이 파릇파릇하게 느껴질 시기의 첫사랑 -
이것이 이 영화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노스탤지어, 영원히 잃어버릴 운명의 아름다움, 삶의 꽃봉우리가 처음으로
환한 세상을 향해 열리려는 순간의 빛남, 슬픔같은 것들이 이 영화에 생생하게 담겨 있다.
감독이 의도해서 이런 것들을 이 영화에 담았을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계산되고 의도되지 않았기에.
안타깝게 자연스럽게 그 화면 속에서 빛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여주인공 배수지가 이 영화 성공의 가장 큰 원인이다. 가수였지 배우가 아니었다.
그래서 능란한 연기를 못한다. 어딘지 어색하고 자신없고 미숙하고 하지만
풋풋한 사춘기적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능숙한 연기의 잘 알려진 미녀배우가 이 역을 연기했다면 오히려
이 영화는 전형적인 멜로드라마가 되었을 것이다. 배수지 일생에 한번만 할 수 있는 연기고 배역이다.
대학교 일학년 승민은 배수지의 이런 것에 빠져든다. 승민의 시점에서 배수지가 보여지기 때문에
그녀에 대해 분석하지도 이해시키려 하지도 않는다. "그저 아름답고 청순하고 파릇파릇하고 눈부시고
내게 왔다."
하지만 이것은 미숙한 첫사랑이다. 승민은, 서연이 그렇게 암시를 주었어도, 서연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마침내 패배를 선언하고 떠나 버린다. 서연은 명확하게 승민에게 신호를 주지 못하고 그냥 머뭇머뭇 사랑만 하다가 승민이 떠나버리자 슬퍼한다. 둘은 표면적으로는 소통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서
둘은 일생에 단한번만 나눌 수 있는 감정의 소통을 한다. 성숙한 사람은, 이 감정의 소통을 이해하고 파악한다.
하지만 미숙한 승민과 서연은, 이것을 파악하지 못한다. 어딘가 안타깝고 아프고 슬프지만,
둘은 불통한다고 생각한다. 관객들은 둘 모두를 본다. 그래서, 안타까움과 저릿한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끼게 되는 것이다.
첫사랑 장면은 액자 속 영화이고, 본영화는 현재다. 영화 속 주인공은 성숙한 사람으로 액자 속 과거를 바라보며 회상하는 사람이다. 바로 관객인 여러분처럼, 주인공도 여러분이 액자 속 영화에 대해 느끼는 것을 똑같이 느낀다. 차이점이라면, 주인공에게는 영화 속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이야기다.
35살의 승민은 건축가로 시작해서 이제 막 인생의 전성기를 맞이하려는 시점이다.
서연은 의사와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위자료를 받아 나와서 고향인 제주도로 돌아갈 생각이다. 치매에 걸리신 아버지를 모셔야 한다. 인생의 빛나는 순간이 닫히는 시점이다. 둘의 인생은 극명하게 갈린다. 둘이 계속 만나면서 옛불꽃이 서서히 되살아나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첫사랑이 무언가? 지금 다시 되살아나도 그것은 이미 첫사랑이 아니다. 첫사랑이 추잡하게 현재로 이어지는 불륜이다. 둘은 그럴 수 없다. 둘 모두 안타깝게 과거의 첫사랑을 회상하며 맴돈다.
35살의 승민은 서연을 만나 과거에 대해 별로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행동한다. 털털하고 매너가 매끄럽고 남을 배려하고 - 딱 세련된 사회생활하는 사람이다. 서연은 그에게서 무엇을 기대하지는 않지만, 과거 자기가 가장 눈부셨던 순간을 함께 했던 사람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슬프다. 하지만, 승민이 유학을 떠나고 택배가 하나 배달되어 온다.
그 안에는, 15년 전 자기가 승민에게 주었던 cd 플레이어가 들어있었다. 그것을 트니, 15년 전 함께 들었던 노래가 흘러나온다. 승민도 결국 15년 동안 그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간직해 왔던 것이다. 승민이 떠나고
이 첫사랑은 진짜로 이제 영원히 과거의 것이 된다. 첫사랑은 안타깝게 닿을 수 없는 것으로 완성된다. 혼자 남은 서연은 안타깝고 서글픈 미소를 짓는다. 35살의 승민과 서연을 연기한 엄채웅과 한가인은
능숙한 배우들이다. 35살 승민과 서연에게는 이런 능숙한 배우들이 맞는다. 그래야 한다.
이것이 영화 건축학개론이다. 투박하지만 아주 효과적으로 첫사랑의 아련함 아름다움 슬픔을 포착해낸다.
아주 강한 감정적 울림이다.
이 영화가 그렇게 아름다운 멜로드라마로 지금까지 평가받는 이유는 아마도 "당신에게도 첫사랑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포스터 캣치프레이즈 그대로다.
추천인 4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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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화의 ost 전람회의 기억의습작은 정말 명곡이죠
무려 한가인과 수지가 나오는데 말이죠..
엄마한테 차라리 옛날 영화인 러브 오브 시베리아가 더 슬픈거 같다고 말씀드렸는데 ㅋㅋ
벌써 11년 전 영화네요. 수지의 커리어에 결정적 역할을 한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