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녀괴담 怪談雪女郎 (1968)
또 설녀냐 하는 소리가 나올만큼 영화화도 많이 되었고 친숙한 소재가 설녀다. 이 영화도 기본 전개는 똑같다.
어느 젊은 조각가가 스승과 함께 겨울산에 갔다가 오두막을 발견하고 노숙을 한다. 그런데 밤에 설녀가 나타나 스승을 죽이고 젊은 조각가를 죽이려다가 잘 생겼다는 이유로 살려준다. 자기를 본 것을 발설하지 말라는 약속을 받고서.
집에 돌아온 젊은 조각가는 이 약속을 지킨다. 그의 앞에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나고 결혼까지 이르게 된다.
그런데 어느날 조각가는 설녀를 본 것을 아내에게 무심코 말하게 되고, 아내는 설녀로 변해서 조각가를 떠나간다.
스토리를 다 아는 데도 이 영화는 재밌다. 일단 휘날리는 눈발의 묘사가 워낙 압도적이어서 극장 대형 스크린으로 보았더라면 감탄하며 보았을 것 같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미친 듯 눈발이 휘날리는데, 새하얀 설녀가 조그만 점으로 마치 무생물처럼 조용히 떠가는 영화 시작은 소름이 끼친다. 잔인해서 소름이 끼친다는 것이 아니라,
당시 인간들이 어쩔 수 없는 대자연의 그 원시적이고 공포스런 생명력이 느껴져서다. 사람들이 공포스럽게 느꼈던 설녀라는 전설 속 존재도 이런 공포스런 대자연의 상징이었으리라.
설녀가 등장하는 장면도 실로 잘 연출되어 있다.
젊은 조각가 미노가 스승과 노숙하는 오두막 문이 서서히 열리면서 무언가 새하얀 의미한 것이 둥둥 문 앞에 떠있다. 이것이 엉겨붙어 젊은 여인의 모습이 되고 이 여인은 둥실둥실 떠서 집안으로 들어온다. 상당히 공포스럽다. 이 역시 대형스크린으로 보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녀는 대자연의 공포를 상징하는 존재다. 원래 인간적인 감정이나 그런 것 없다. 고바야시 감독의 괴담에 나온 설녀는 이런 설녀의 특징을 잘 포착해낸다. 주인공 나카다이 타츠야의 아내가 된 설녀는 아이도 낳고 행복하게 잘 사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것은 설녀의 연기였다. 타츠야가 약속을 어기고 설녀 이야기를 발설하자, 금방 돌변해서 싸늘한 어조로 타츠야를 버린다. 설녀에겐 인간으로서의 면모가 없다. 하지만 이 영화의 설녀는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끔찍히 모든것을 바치고 아이에게는 자애로운 어머니다. 이 영화는 좋은 설녀영화이되, 어째 주인공이 설녀같지 않다.
인간처럼 변신하고 다가온 설녀와 결혼한 미노는 아이까지 낳고 행복하다. 그에게 아주 좋은 기회가 오기까지 한다. 대사찰 주지가 관세음보살상을 조각해달라고 의뢰하기까지 한 것이다. 그런데 미노는 조각을 하다가 어떤 난관에 부딪친다. 관음보살의 자애로운 얼굴을 도저히 조각할 수 없는 것이다. 만물 삼라만상을 자애롭게 안아줄 수 없는 초월적인
사랑과 자애 - 이것을 표현해야 하는데 쉬운 일인가?
미노가 설녀를 만났던 일을 발설하자 설녀는 미노를 죽이려하다가, 아이 울음소리를 듣고 미노를 살려준다. 여기까지는 다른 영화 그대로다. 하지만 미노는 예술가다. 아이 울음소리를 듣고 자길 죽이길 망설이는 설녀 표정에서, 자애와 용서의 표정을 본다. 그는 관세음보살상 얼굴에 어떤 표정을 새겨야 할 지 깨닫는다. 흠, 설녀 캐릭터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지만 자못 감동적이다. 설녀에게 죽을 뻔하고 가정이 깨지는 상황에 직면해서도 예술적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고민하다니 예술가는 어느 정도 광기가 있어야하는 존재인가......
앞부분의 설녀 묘사는 워낙 압도적이지만, 영화 대부분은 그냥 전설의 고향같은 느낌이 든다. 이것이 거장의 걸작영화였다면 무언가 완벽하고 관객들로 하여금 정신적 긴장을 가지고 접근해야만 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잘 만든 영화이기는 하지만, 관객들을 긴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편하게 이리로 와서 이야기 한편 듣게"하는 것 같다.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따스함같은 것이 바닥에 깔려 있다. 그것이 좋았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현모양처 설녀 - 남편이 약속을 어기자 괴로움에 가슴 쥐어뜯으며 산으로 가는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설녀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영화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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췟
저 시절 일본 영화들이 아우라가 있어요.
물론 그때는 우리가 많이 베끼던(?) 시절이니..그래도 이 영화상당히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