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틱] 왜 우리는 부상자를 포기하지 않을까
영화는 언제 어떻게 조난됐는지 보여주지 않습니다.
이미 조난 상황에 익숙해진 그는 무감동한 얼굴로 시계의 알람에 맞춰 일어나고 먹고 구조신호를 보내고 지형을 탐사하고 돌무덤에 한 차례 인사를 보냅니다.
기계적인 생을 이어오던 중 헬기 추락을 목격한 날, 그에게는 새로운 신호탄 두 개와 약간의 물자와 지도, 부상자 한 명이 생겼습니다. 부상자는 그와 말도 통하지 않고 영화 대부분을 눈을 감은채 미동없이 보냅니다. 조난자 오버가드는 부상자의 이름을 남기기 위해 애써 면허증의 글자를 그려내지만 그가 따라 그린(쓴 게 아님) 문자는 이름이 아니라 면허증이라는 글자입니다.
역설적이게도 그는 말도 통하지 않고 이름도 모르는 부상자를 돌보며 적극적인 생의 움직임을 보여주고 부상자를 위해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보금자리를 벗어나 막연한 희망을 붙잡으며 생존 아니면 죽음의 길로 가려 합니다. 쉬운 길이 눈앞에 있지만 부상자를 포기하지 못 해 결국 몇 배나 더 걸리는 먼 길을 돌아갑니다.
왜 그는 부상자를 포기하지 않을까요?
오버가드는 이미 함께 비행기를 타고 온 이를 북극에 묻었습니다.
머리카락으로 보아 오랜 시간은 아니겠으나(잘라낸 거 일수도 있고) 그는 이미 대화 없이, 자신 외에 숨을 내뱉는 이 없는 긴 시간을 보내왔습니다. 오로지 자신이 먹을 물고기와 그 물고기를 노리는 천적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내 것이 아닌 누군가가 만들어 내는 숨과 박동, 그 소음이야말로 긴 시간 정적에 갇혀 있을 그에게 다시금 살아있는 것이 무엇인지, 인간다움을 일깨우는 알람이었을 겁니다. 대화가 없어도 그저 존재함으로써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주지시키는
거대한 자연에 비할 때 인간은 생존에 유리하지 않습니다. 임신 기간은 길고, 성장하기까지(적어도 자기 발로 뛰고 의사소통을 하는데까지) 수 년이 걸립니다. 추위로부터 보호할 털도 적을 물리칠 발톱도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집단을 만들고 홀로 살아남는 것이 아닌 이타적인 존재로서 약자다움을 포용하는 사회성을 무기로 생존해왔습니다. 한 사람은 북극곰에게 잡아 먹히지만 두 어 사람은 곰을 잡을 수 있지요(물론 영화는 조금 다른 방식이긴 하지만).
오버가드가 부상자를 구하지 않고 그에게 나누어줄 음식과 물자를 독식하고 산을 넘었다면 어쩌면 그는 기지에 무사히 도착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적막 속에 던져진 그가 끝까지 갈 수 있었을지, 추락한 헬기를 찾아 올 이들을 기다릴 수 있었을지
교도소 최고 형벌이 독방 구금인 것을 생각해본다면, 보금자리로 돌아가 막연한 희망이 오기를 기다리며 다시 원래의 루틴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요
아트북 뒷표지에 3d 이미지가 있는데 진짜 오오 했습니다 ㅎ
그거로 렌티큘러포스터 같은 걸 만들어도 좋을 거 같습니다.
영화에 나오는 북극곰 친구 실제로는 엄청 애교많고 장난 치기 좋아하는 곰이라고 들었는데 아트북에 그 친구 이야기는 안 나오는군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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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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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영화적으론 같이 가는게 더 영화적이면서 감동적이긴 했지만요.^^
저도 보면서 잠깐 업어서 끈으로 묶고 넘으면 안 되나? 했지만 다른 생각이 눈에 안 들어왔을 거 같아요.
그걸 다 뛰어넘어 가야할 동기를 주는 존재의 등장이었던 거 같아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