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이지, 스투피드, 러브 - Crazy, Stupid, Love. (2011)
스티브 카렐, 플레이보이로 변신?
40대로 보이는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삶은 꽤 괜찮은 것 같다. 교외에 집도 있고, 직장도 나쁜 것 같지 않고, 아내와 아이들도 있다. 어느 날, 레스토랑에서 아내와 식사를 하고 있는데, 아내가 다른 남자가 생겼다고 말하면서, 이혼을 하고 싶단다. 과연 그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내가 운전하는 자동차에서 아무 말도 안 하던 그 남자는 달리는 차의 문을 열고 밖으로 떨어져 나간다. 그 행동은 아마도 그의 심리상태를 극명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이야기는 <Crazy Stupid Love>의 도입부문을 설명한 것이다. 이 영화는 Glenn Ficarra John Requa라는 두 명의 감독이 공동연출을 한 작품인데, 이들의 전작은 <필립모리스>였다. 주연으로는 스티브 카렐과 줄리안 무어가 나온다. 칼(스티브 카렐)과 에밀리(줄리안 무어)는 고등학교 때 만나서 결혼을 하고 25년 동안 결혼생활을 유지했다. 칼은 좀 무기력하게 보인다. 일단 패션 감각이 제로다. 허름한 양복에 운동화를 신고 다닌다. 에밀리는 직장 동료인 데이비드(케빈 베이컨)와 특별한 관계인데, 이 데이비드도 칼보다 대단하게 나아보이지는 않는다.
에밀리가 가지고 있는 결혼생활의 불만은 확실하지 않다. 아니 그것을 간단하게 말로 표현하기는 힘들 것이다. 십대에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길렀고 이제 마흔 넷이 되었다. 그 세월 속에서 켜켜이 쌓인 감정은 실로 복잡하고 오묘한 것이리라 짐작만 할 뿐이다.
칼은 집을 나와 조그만 아파트로 옮긴다. 그는 술집에 나가 아내에게 남자가 생겨 이혼했다고 사람들에게 떠벌린다. 그런 칼을 눈여겨보는 젊은 남자가 있다. 제이콥(라이언 고슬링)이라는 이 남자는 멋진 스타일의 소유자다. 술집에서 여자들을 꼬시는데, 안 넘어오는 여자가 없다. 제이콥은 칼에게 잃어버린 남성성을 재발견하게 해주겠다고 말한다. 그는 칼을 데리고 쇼핑센터로 가서 의상 스타일부터 일신시킨다. 바야흐로 때깔 좋은 남자가 된 칼. 그런데 과연 여자를 꼬실 수 있을까?
여자를 꼬시는 것은 그저 옷을 잘 입었다고 되는 게 아니다. 말솜씨도 있어야 하고, 매너도 좋아야 한다. 칼은 번번이 실패를 한다. 그러다 한 여자를 술집에서 만난다. 케이트(마리사 토메이)라는 여자는 누가 와서 자기를 좀 꼬셔주길 바라는 표정을 앉아 있다. 칼은 그 케이트를 데리고 자기의 아파트로 가서 섹스를 하는데 성공한다. 그 사건 이후로 자신감을 얻은 칼은 여자들을 꼬셔서 밖으로 나가는 작업을 아주 잘 수행한다.
물론 영화는 자신감 없던 한 남자가 젊은 컨설턴트를 만나 분위기를 일신하고 여자들을 꼬시는 삶을 이어간다는 내용만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런 PG-13 등급을 가진 할리우드 영화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 관객들은 대충 짐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어떤 과정으로, 즉 그 과정이 설득력이 있고 재미있느냐에 달려 있다. 이 영화는 사람이 변할 수 있는가를 질문한다. 칼은 술집에서 잘 나가는 남자가 되었고, 여자들을 꼬셔서 침대로 끌어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삶 자체를 변하게 만든 것은 아니다. 칼은 (당연하게) 아직 아내를 사랑한다. 아내인 에밀리 역시 남편과 헤어진 상태가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다시 남편과 재결합을 한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이런 감정의 머뭇거림을 해소시키는 존재는 13살이 된 그들의 아들이다.
칼과 에밀리는 남편과 아내이지만, 그들은 아이들의 부모이기도 하다. 자식에게 어떤 말을 할 것인가란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중학생인 로비(Jonah Bobo)는 베이비시터인 제시카(Analeigh Tipton)를 사랑한다. 그러니까 중학생이 네 살 연상의 고등학생을 사랑하는 것이다. 로비는 방에서 자위행위를 하는데, 제시카가 방문을 열었다가 그 광경을 본다. 로비는 나중에 나와서 제시카에게 말한다. 그런 광경을 보게 해서 미안하지만, 솔직히 말해 그걸 할 때 너를 생각하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영화 내내 로비는 제시카에게 애정표현을 한다. 사실 제시카는 아버지 나이 뻘인 칼을 짝사랑하고 있다. 이런 상황들은 물론 영화의 코믹함을 더하기 위해 가미된 설정들이다.
어쨌든, 아버지로서 칼은 아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아들의 사랑은 어리다고 무시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칼도 에밀리를 15살에 만났고 얼마 뒤에 결혼을 했다. 로비는 제시카를 소울 메이트라고 표현하는데, 칼 역시 에밀리를 소울 메이트라고 말한다. 아들에게 진실한 사랑이 있다면 그 사랑을 포기하면 안 된다고 아버지로서 말하는 칼. 즉, 이 영화는 부부 사이의 갈등이 부모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해소되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말하지만 이 과정은 전혀 심각하게 묘사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이 영화는 코미디이기 때문이다. 로스쿨을 갓 졸업한 칼의 딸로 엠마 스톤이 출연하는데, 별다른 인상을 주지는 못한다. 이 딸과 제이콥의 관계에 대한 설정은 곁다리로 끼워져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 영화는 재미있다. 그러나 아주 강한 인상을 주는 영화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쩔 수 없이 PG-13 등급의 코미디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또 줄리안 무어가 너무 정상적으로 나와서 그런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줄리안 무어도 어느 정도 퇴폐적이거나 정상적이지 않는 상황 속에 있어야 어울리지 않나 싶다. 엠마 스톤이 연기하는 한나는 자신의 삶이 PG-13 등급의 영화 같다고 한탄을 하는데, 이 대사는 무언가 의미심장하다. 왜 각본가와 감독은 이런 대사를 집어넣었을까? 이 영화의 제작자는 주연배우인 스티브 카렐인데, 혹시 그것은 제작자에 대한 불만의 표시가 아닐까? 이건 그냥 해보는 뻘 생각이니, 이해해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