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 짓는 늙은이 (1970) 스포일러 있음.
황순원 원작 소설로 아주 유명한 작품이라서 영화화하는 데 큰 부담감이 있었을 듯하다. 더군다나 이 어려움을 가중시킨 것이
황순원 원작이 단편소설이라는 것이다. 단편소설은 완결된 서사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아주 강렬하게 인생의 한 장면만 보여주어도
훌륭한 단편소설이 된다. 황순원은 간결하고 서정적인 문체로 유명한데, 그의 소설 성공에 이 문체가 기여하는 바 크다.
이것을 어떻게 영화로 옮기느냐 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걸작 단편소설을 장편 영화 한 편으로 옮기는 것은
그냥 등장인물 몇 명 추가하고 에피소드를 더 만들어서 집어넣는 것 갖고는 안된다. 의미적 서사적 틀 자체를 장편영화에 맞게
새롭게 짜야한다.
원작소설은 아주 간결하고 서정적으로 독 짓는 송영감의 몰락과 죽음을 그렸다. 송영감은 늙고 노쇠해서 아이에게 제대로
무언가를 해 줄 형편이 안된다. 시간이 갈수록 그는 이것을 깨닫는다. 결국 아이를 입양 보내고 그는 독 짓는 가마에 기어들어가
불을 피워 최후를 맞는다. 원작소설은 뭔가 절절한 슬픔을 강조하지 않는다. 마치 늦가을이 서서히 겨울로 향하는 것처럼
송영감의 비극과 최후도 그런 식으로 담담하고 서정적으로 묘사될 뿐이다. 이것은 송영감이 겪어야 하는 비극을 특별한 것처럼
그리지 않고, 그냥 우리 모두의 삶이 거치는 한 계절 변화처럼 그렸다. 어릴 적에는 송영감이 겪는 그 끔찍한 자살이 정말
소름끼쳤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우리가 그런 삶의 단계에 막상 이르렀을 때에도 끔찍하게 싫을까? 아니면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는
것을 자연의 섭리처럼 받아들이듯이, 우리도 그렇게 죽음을 받아들이게 될까? 원작소설은 이런 내용이지만
영화화하기에는 서사 대신 분위기와 정서적 함축성에 많이 기대고 있다. 영화화하기 위해서는 서사가 강화되고 서사로 주는
감동이 구축되어야 한다. 사실 이 영화는 이 어려운 작업을 훌륭하게 해냈다.
일제시대가 끝나고 징용에 갔다가 간신히 살아온 당손은 뭘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 그는 독을 짓던 아버지가 자살한 가마터에
와서 하룻밤을 보낸다. 가마터는 버려져서 아무도 없다. 그는 이 가마터에 기어들어와 불 붙여서 스스로 타죽은 아버지를 회상한다.
아버지 황해는 시골에서 유명한 독 짓는 사람이었다. 뭐 청자 백자같은 예술품을 굽는 그런 장인이 아니라, 장독을 짓는 사람이었다.
어찌어찌하다가 육십이 되었는데도 총각이었다. 인생이 특별히 즐거운 것도 없었지만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아왔다.
그런 아버지에게도 뒤늦게 인연이 찾아온다. 갈 곳 없는 젊은 여인 윤정희를 도와주다가 결국 결혼까지 이르게 된다.
참하고 착하고 무언가 사연 있는 여인이다. 나이 많고 수수하지만 행복하게 사는 자기에게 딱인 여자다. 거기에다가
뒤늦게 아들 당손까지 생긴다. 무엇이 부러울까? 그는 행복하다. 윤정희도 아들과 함께 행복하지만 무언가 언뜻언뜻 그늘이 비친다.
황해는 이것을 묻기가 겁난다.
그런데 조수 남궁원이 들어온다. 그는 윤정희와 무언가 아는 사이 같다. 황해 앞에서는 조심하지만
윤정희와 단둘이 있으려 하며 자꾸 무언가 윤정희에게 설득 겸 애원하려 한다. 알고 보니 윤정희와 첫인연이었던 남자가 남궁원이다.
윤정희는 흔들린다. 남편과 아이를 내버리고 진정 사랑하는 남자를 따라갈 것인가?
평범한 이야기고 황해같은 처지에 놓였던 사람들은 부지기수일 것이다. 이것을 지극히 처절하고 슬픈 이야기로 만들어낸 것은
대가급 배우들과 감독의 능력이다. 아내가 도망가자 황해는 더 이상 예전같지 않다. 갑자기 늙어버린다.
그는 아들 당손을 위해서라도 힘을 내려 한다. 하지만 노화는 어쩔 수 없다. 독 짓는 일은 계속 실패하고 경제적으로 궁핍해진다.
황해는 정말 처절하게 노력을 한다. 어린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다. 그래도 자기가 만든 독은
구워지는 과정에서 계속 실패한다. 어느순간 깨닫는다. 자기는 이제 늙어 독을 짓는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다.
그렇게 지키고 싶어하던 아들 당손은 이제 어떻게 되나? 자기가 죽은 다음 어떻게 되려나? 황해는 당손을 다른 집에 양자로 보낸다.
아들을 보낸 다음, 황해는 혼자 빈 집에 앉는다. 세간살이는 다 허름해졌고 아내도 아들도 없고
가마터에는 실패한 독들만 쌓여있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는 혼자 처절하게 통곡한다.
그는 가마터에 불을 지핀 다음 그 속으로 들어간다.
이 영화는 문예영화이지만 1960년대 영화들과 다르게 굉장히 감정적이고 격정적이다. 황해의 비극을 담담하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격정적으로 그린다. 대배우 황해의 대표작이다. 원작에서 독 짓는 노인의 비극을 그린 방식과는 정반대다.
굉장히 설득력 있게 독 짓는 늙은이의 비극과 몰락을 그렸다. 사실 아내를 잃는 것보다 더 뼈 저리게 슬픈 것이 아들을
남의 자식으로 보내는 거다.
그리고 장면은 다시 젊은 당손이 빈 가마터에 앉아 아버지를 회상하는 장면으로 돌아온다. 사실 아버지가 죽기 전 처했던 상황이나
지금 자기 상황이나 비슷하다. 그래서 당손은 자기 아버지를 이해한다. 그는 가마터 부근에서 한 거지 노파가 죽어가는 것을 발견한다.
바로 도망갔던 자기 어머니다. 남편과 아들에게 죽을 죄를 진 어머니이지만
평생 후회하면서 가마터 부근에서 거지로 살았으니 벌을 넘치도록 받은 셈이다. 당손은 어머니를 용서하고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죽는다.
당손은 어쩌면 자기가 여기 온 것이
아버지의 영혼이 어머니를 만나 용서하고 화해하라고 한 것을 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이 영화에서 덧붙은 서사구조인데
굉장히 효과적으로 작동한다. 사실 이것이 효과적으로 작동하게 된 데에는 윤정희, 김희라 두 대가급 배우들의 열연이 컸다.
당손 역을 연기한 김희라는 이 영화가 데뷔작인데도 벌써 원숙하게 역할을 연기한다. 김희라는 대배우 김승호의 아들이다.
김희라는 벌써 그 카리스마에서 황해, 허장강, 윤정희 등 대배우에게 밀리지 않는다.
아주 깔끔하게, 독 짓는 늙은이 원작에 서사구조를 덧붙였다. 마치 이 방면 모범답안 같다. 이런 종류의 신파를 강조하는 영화는
구질구질해지기 쉬운데 이 영화는 격정적이면서도 깔끔하다.
물론 나는 좀 더 절제된 1950년대 문예영화들 -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오발탄, 갯마을 등이 더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영화 독 짓는 늙은이도 우리나라 문예영화에 손 꼽힐 걸작이다.
대배우들인 황해, 윤정희, 허장강, 김희라 등이 열연을 펼친다. 이 영화의 성공에 이들 대배우들이 끼치는 영향이 아주 크다.
오늘날에는 오늘날의 비극이 있어야 한다. 동시대에 살아 숨쉬는 비극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1960년대가 동시대였던 그 당시의 비극"을 경험할 수 있다. 그것도 아주 감동적으로.
상단의 흑백 홍보 이미지에서 오스카 상 같은 실루엣이 보이네요.
수십년 지나 후배 영화인이 진짜 오스카를 휩쓸 줄 과연 기대했을까요?
이런 선배 작품들이 있었기에 가능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