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 (2006) 걸작 멜로드라마. 스포일러 있음.
이병헌이 나온 영화들 중 걸작이 이 영화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사실 이 영화는 찍다가 만 것이나 다름없다.
내 기억으로는 이병헌이 이 영화 찍으면서 사회문제가 된 적 있다.
이 영화를 찍으면서 몸소 택시기사 운전하는 연습을 했다고 뉴스에 나와서
기사면허도 없는 사람이 택시를 몰았다고 비난의 소리가 컸다. 그래서 이병헌이 사과하고
택시기사하는 장면을 들어낸 것으로 기억이 난다. (정확히 이 영화에 대한 것인지 기억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래서 이 영화 마지막은 후닥닥 끝나는 감이 좀 있다.
하지만 길게 끌면서 신파조가 되지 않고 깔끔하게 끝낸 것이 결과적으로 나았다는 생각도 든다.
결국 이런 사건이 없었더라면 감독과 배우들이 어떻게 엔딩을 만들어냈을까 하는 문제는 상상의 영역으로 들어간 셈이다.
멜로드라마의 정석이라고 할만한 작품이다. 우리나라 멜로드라마의 최고작은 신상옥 감독, 최은희 김진규 주연의 1950년대 작
동심초라고 생각하지만, 다섯손가락 안에 꼽을 만한 작품이 이 작품이다.
대중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노교수 이병헌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다.
이병헌은 웬일인지 그 대중적 인기에도 불구하고 인터뷰를 하거나 자기를 드러내는 일에 굉장히 부정적이다.
이런 이병헌을 인터뷰한다면 대단한 히트를 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야심찬 프로젝트는 젊은 기자만이 생각해내고 추진할 수 있다.
젊은 여기자는 이병헌에게 찾아가서 인터뷰를 요청한다. 예상대로 이병헌은 난색을 표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발생한다. 여기자는 어디선가 얻은 측백나무잎을 무심히 들고 있었다. 이병헌은 이 잎을 보더니 금방
변한다.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이제 여기자의 취재는 이병헌과 측백나무 잎의 관계를 캐내는 데 집중된다.
그리고 여기자는 취재를 하면서 젊은 이병헌의 과거로 여행을 떠난다.
각본이 아주 훌륭한데, 이병헌과 수애의 사랑이야기는 실은 아주 오래 전에 일어났던 것이다. 그래서 노스탤지어와 아련함을 준다.
그들의 사랑이 아주 간절하고 깊음에도 불구하고 "한번 헤어져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이병헌과 수애가 만나 사랑하게 된 시기는 군사정권시대다. 영화는 이병헌과 수애를 가로막는 존재가 군사정권이었음을
상기시키며, 사상의 억압 비인간성이 인간을 파괴했던 시기에 대해 비판한다. 그냥 무늬만 형식적으로 이런 정치적 시대적
요소를 넣었다는 것이 아니라, 위의 주제는 이 영화를 중요하게 지탱하는 주제가 된다.
이병헌은 순수하고 착한 청년으로 등장한다. 아버지가 군사정권의 고위직에 있지만,
남들에게 이를 과시하지 않고 겸손하게 그들과 어울린다. 아버지가 군사정권에 있는 것을 싫어하지만
그렇다고 반항하지도 않는다. 사실 이상하다. 작품은 시대성을 그렇게 강조하면서도 주인공 이병헌은 몰시대적인 인물로
만들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이 영화의 주제다. 이병헌은 수애와 순수한 사랑을 하지만
그들의 몰시대성은 시대의 벽이라는 것이 단단히 부딪친다. 그들은 순수한 사랑이라면 이 시대의 벽이라는 것도
초월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굉장히 냉혹한 이 벽 앞에서 그들의 사랑은 간단히 좌초된다.
대학생이던 이병헌은 농활을 가서 마을에서 따돌림을 받던 처녀 수애를 만난다. 수애는 공산주의자였던 아버지 때문에
마을에서 왕따를 당하며 낡은 집에서 혼자 살고 있다. 말하자면 멜로드라마에 잘 등장하는
혼자 외롭게 살아가는 신비한 소녀다. 젊고 순수했던 시기, 이병헌은 수애에게 끌리고 다가간다. 자기 처지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자기 삶에서 밀어내는 데 익숙해져 있던 수애는 이병헌과 거리를 두려한다.
하지만 이병헌이나 수애나 성격상 열정적이고 절대 바뀌지 않을 사랑을 한다.
이 과정을 굉장히 아름답고 아련하고 풋풋하게 그려냈다. 장면 장면이 명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달밤에 졸졸 흐르는 냇물 위에서 달빛을 받으며 수애와 이병헌이 처음으로 포옹하는 장면은 아주 아름답고 깨끗하다.
수애의 아름다움을 아주 신비하게 그려냈는데, 이것은 외면의 아름다움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투명함도 이야기하는 것이다.
수애는 이병헌을 따라 고향을 떠난다. 말이 그렇지 태어나 줄곧 거기에서만 자란 수애가
모든 익숙한 것을 버리고 미지의 세계로 떠날 결심을 하는 것이 쉬울 리 없다. 조용하게만 보이던 수애의 내면에도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하지만 이병헌과 수애는 결국 군사정권에 의해 고문을 받게 된다. 수애의 출신성분이 문제가 된 것이다.
이 병헌은 고문에 못이겨 수애를 배신할 뻔한 것에 자괴감을 느끼게 된다. 그는 자기들의 깨끗한 사랑을 더럽힌 것처럼 부끄럽고
수애에게 미안하다. 수애는 괴로와하는 이병헌을 보며, 그들이 함께 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예감한다.
그래서 몰래 이병헌을 떠난다.
영화는 이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사실 그들의 일생에서 이 에피소드는 몇달 동안 일어난 일이다.
이 몇달 동안 일어난 일 때문에 평생을 서로 그리워하며 살았다는 것이 그들의 삶이다. 심지 깊은 수애가 이병헌을 만날 일은 없다.
하지만 이병헌이 자기에 대해 걱정할까 봐, 수애는 대신 측백나무잎을 따서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그들이 농촌에서 사용한
그들만의 신호였다. 그리고 이 측백나무 잎들은 돌다 돌다, 늙어 죽음을 앞둔 이병헌에게 닿는다.
영화 마지막은 클라이맥스이자 아주 감동적이다. 측백나무잎을 받은 사람들을 거슬러 올라가, 여기자와 이병헌은
어느 바닷가 학교로 간다. 이병헌은, 수애가 힘든 삶을 살았을까 봐 굉장히 걱정한다. 그는 학교 운동장에 발을 딛자 마자
이곳이 수애가 있던 곳임을 느낀다. 수애는 이미 죽은 뒤였다. 운동장 한 켠에는 그녀가 키우던 측백나무가 서 있다.
수애는 아주 조용하고 깨끗하게 그 학교에서 평생을 보내고 갔다. 이병헌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수애의 모습을
측백나무에서 보고 눈물 흘리는 장면은 정말 명연기 명연출이다.
멜로드라마는 이렇게 관객들의 감정을 강하게 울리는 장면이 있어야 한다. 이 영화가 훌륭한 점은, 긴 영화 장면들을
이 클라이맥스를 향해 아주 치밀하게 쌓아올려갔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병헌과 수애의 연기는 그들의 최고걸작 연기에 들어간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추천인 8
댓글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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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죠. 그리고 마침내 그 사랑을 찾는 순간 감동까지 똑같네요. 신파조가 안 좋은 의미로 요즘 많이 쓰이지만 원래는 아주 고급스러운 영화였죠.
수애가 좋아했던 팝송만 기억에 넘네요.
요즘은 짙은 페이소스가 묻어나는 멜로가 부족하죠.
8월의 크리스마스, 클래식, 행복, 등등...
오히려 요즘 이런 진한 멜로는 드라마들에서 많이 나오더군요.
Ost 유툽 영상으로만 봤음에도 김 광석님 애절한 노래와 어우러져 소름 돋았어요..!
이별 장면을 보면서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슬픔을 느낀,
어쩌면 인생영화라고 할 세 편이 있으니
하나가, [잉글리쉬 페이션트]
둘이, [콘스탄트 가드너]
셋이, [그해 여름]입니다.
살아서 이룰 수 없는 사랑
죽어서 이루고자 하는,
마침내 생사를 초월한 사랑이
삶에 애달복달하는 한 인간의
비루한 숨통을 콱, 조여오는
무지막지한 그 슬픔이라니...
경험해 보지 않고선 모릅니다.
젊은 시절과 다름없이 아름다운 수애의 환상을 보면서 눈물 흘리는 장면은 아주 명장면이지요.
이 영화 넘 좋아합니다
이병헌의 눈빛 연기... +_+
언급하신 수애의 모습은 정말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