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 사카모토 준지 특별 대담

▪︎ 첫 인사
사카모토 준지
한국에서 <오키쿠와 세계>를 개봉했을 때, 봉준호 감독님이 무대 인사를 해주셨고 그 덕분에 흥행에도 큰 도움이 됐어요.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봉준호
이렇게 다시 만나게 돼서 정말 기쁩니다. 제 영화가 일본에서 공개될 때마다 “형님이 어떻게 봐주셨을까..” 상상하면서 늘 긴장하게 돼요. (일본어로) 긴쵸데스(웃음)
사카모토 준지
저도 똑같은 마음이에요. 제 영화를 보고 긴 감상도 보내주시고, 일본 감독들과는 또 다른 시선으로 작품을 바라봐주셔서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봉준호
<어나더 월드>나 <세상의 오키쿠> 때도 편지를 보내거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죠. 그 작품들은 마치 깊게 우려낸 차처럼 몸 안에 스며드는 영화였어요. 그래서 저도 감상을 전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 것 같아요. 그런데 제 영화는 과연 그렇게 깊은 맛이 날까, 문득 스스로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사카모토 준지
아유 또 그렇게 겸손을.. (웃음)
▪︎ <미키 17>을 본 사카모토 감독의 감상
사카모토 준지
봉 감독님의 시선은 늘 사회적 지위 없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향해 있죠. <미키 17>도 마찬가지였어요. 아무리 죽어도 다시 살아나야 하는 존재, 그런 숙명을 짊어진 주인공을 동화처럼 경쾌하고 귀엽게 그렸다고 느꼈어요.
특히 로버트 패틴슨의 연기가 정말 인상 깊었어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표정 하나로 사회적 모순과 감정의 깊이를 보여주더라고요. 엔딩 크레딧에서 스태프 명단을 보는데, 괜히 눈물이 나올 뻔했어요. 봉 감독님이 데뷔할 때부터 알고 지냈기에, 겉으로는 유쾌하지만 얼마나 치열하게 자신을 몰아붙이는 분인지 알고 있어서요. 일종의 부모 마음이랄까..그 감정이 올라오더라고요.
봉준호
<살인의 추억>이나 <마더>를 찍을 때는 모든 스태프 이름을 외우고 있었어요. 그런데 <설국열차>, <옥자>부터 스태프 규모가 어마어마해져서, <미키 17>도 그랬지만 이제는 이름을 다 알 수가 없어요. 그 안에서 오는 막연함, 외로움도 느꼈고요. 그래도 점차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다시 <살인의 추억> 정도 규모의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늘 가지고 있어요.
▪︎ ‘봉준호 감독은 발명가’라는 사카모토 감독의 시선
사카모토 준지
봉 감독님은 항상 새로운 걸 발명하려고 하는 분이에요. 기존 영화는 물론이고 그림책, 만화에서 영향을 받으면서도 자기만의 발명으로 연결시키죠. 비유하자면 혼자 산업혁명을 일으키려는 사람 같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건강은 괜찮으신지, 항상 걱정됩니다.
봉준호
조금만 더 하면 안식년을 보내고 싶긴 해요. 그런데 지금 만들고 있는 애니메이션이 꽤 강도 높은 작업이라..아마 2027년쯤엔 쉬지 않을까 싶어요. 그땐 감독님 댁 근처 어슬렁거릴지도 모르죠. 우동집 앞에서 마주칠 수도 있고요 (웃음). (일본어로) 사누키 우동..돈코츠 라멘.. (웃음)
▪︎ <미키 17>은 일본 관객에게 가장 잘 맞는 영화?
사카모토 준지
이 영화는 일본인이 가장 잘 즐길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해요. 한국에서 흥행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어릴 때부터 다양한 픽션—특히 만화 문화에 익숙한 일본 관객에게 정말 어울리는 작품이에요. 테즈카 오사무, 오토모 카츠히로, 츠게 요시하루, 후지코 후지오 같은 작가들 덕분에 메이저와 언더그라운드를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감성이 있는 거죠.
▪︎ 미술 디자인에 관한 질문
사카모토 준지
영화는 결국 ‘그림’과 ‘소리’로 만들어지는 거라고 생각해요. 특히 이번 작품의 미술 디자인이 굉장히 아날로그적이고 레트로해서 인상적이었어요. 전부 감독님의 아이디어였나요?
봉준호
미술감독은 피오나 크롬비였어요.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과 함께 작업한 분인데, 영화의 70%가 우주선 내부라서 그 공간 설계가 중요했죠.
제가 처음부터 요청한 건 ‘세련된 미래형 우주선’이 아니라, 낡은 화물선이나 청소가 안 된 공장처럼 보였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어요. 우리가 호텔에 가면 화려한 공간 뒤, ‘관계자 출입 금지’ 뒤편엔 파이프가 드러난 험한 통로가 있잖아요. 저는 그 뒷공간 같은 우주선을 그리고 싶었어요.
사카모토 준지
저는 미술팀 출신이라서 그런 걸 유심히 봐요. 미키 방 문에 있는 손잡이 자국, 정말 좋았어요. 저는 그런 흔적이 너무 좋아요.
봉준호
그걸 봐주시다니..(웃음)
사카모토 준지
가난한 집 세트를 짤 때면 일부러 창문을 깨진 걸로 설정해서 테이프 흔적을 남긴다거나..그런 흔적을 담아내는 걸 아직도 계속하고 있거든요. 감독님 영화도 그런 섬세함이 잘 느껴져서 바로 알아차렸어요.
봉준호
그 흔적을 좋아해요. 벽에 걸었던 액자 자국처럼, 사람의 삶이 배어 있는 공간을 그리고 싶었어요. 사실 커다란 쥐를 실제로 들여와서 우주선 통로를 뛰게 하려 했거든요. 그런데 코로나 시기라 제작팀에서 난색을 보여서 무산됐어요.
SF 영화 최초로 우주선 안에서 쥐가 뛰어다니는 장면을 찍고 싶었는데 말이죠.
사카모토 준지
예전에 서울에서 그 얘기 들었어요. “우주선에 쥐가 돌아다니는 영화야”라고..그게 결국 코로나 때문에 무산된 거군요.
봉준호
촬영은 런던에서 했는데, 영국 쥐는 정말 커요. 거의 토끼 수준이라 골목에서 마주치고 기가 죽기도 했어요 (웃음).
▪︎ 클론과 희생에 대한 윤리
사카모토 준지
<미키 17>은 “한 사람 정도 희생하면 되잖아”라는 생각에서 출발한 이야기잖아요. 그게 무서웠어요. 하나쯤은 괜찮겠지, 그런 생각이 사회적으로 묵인되는 구조 말이에요. “죽는 기분이 어때?”라고 묻는 대사는 웃기지만, 사실은 지금 현실과 닿아 있는 질문이었어요.
봉준호
맞아요. 위험하고 더럽고 고된 일을 한 사람에게 떠넘기고, “계약했으니까”, “그게 네 일이니까”라며 책임을 회피하죠.
반면 크리퍼들은 공동체의 새끼 한 마리가 위험에 처하면 모두가 나서서 구하려고 뛰어나오잖아요. 인간 세계와 크리퍼 세계를 대조시키고 싶었어요.
한 사람을 반복해서 희생시키며 안락한 위치에 머무르는 인간들과 하나를 위해 모두가 나서는 존재 중 누가 더 고귀한가..그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사카모토 준지
봉 감독 영화는 항상 선악을 단순화하지 않고, 이름 없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죠. 이번에도 정말 재미있게 봤고, 끝나고 나면 ‘진짜 해피엔딩’은 아니었다는 잔상이 오래 남았어요.
봉준호
미키는 계속 죽는 것이 직업인 인물이죠. 죽음을 결말로 삼는 게 무의미하게 느껴졌어요. 그는 선량한 청년이니까, 그런 인물이 파괴되는 건 보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런 결말을 택하게 된 거예요.
대담이 들을수록 훈훈하네요 ^^ 미키 17 일본에서 흥행 잘되었는지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