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애드 아스트라]
블로그 원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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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있습니다!)
1. 서론
나는 어렸을 때 부모님과 함께 영화관 가는 걸 무척 좋아했다. 평일엔 일하시기 바빴던 아버지는 주말마다 나와 동생을 이곳저곳에 데리고 가셨다. 그 때 자주 찾아가던 곳이 바로 영화관이었다. 보통은 온 가족이 다함께 영화를 관람했지만, 가끔씩 아버지와 단 둘이서 영화관을 가기도 했다.
2. 아빠, 오늘은 왜 안 졸아?
평일에 쌓인 피로 탓이었을까. 아버지는 영화관만 가면 꾸벅꾸벅 졸곤 하셨다. 영화를 보다 고개를 돌려보면 아버지께서 매번 주무시고 계셨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딱 한 번, 아버지께서 한 번도 졸지 않고 영화를 끝까지 집중해서 감상하신 적이 있었다. 아버지와 단 둘이 ‘애드 아스트라’를 보러 영화관에 간 날. 그 날 따라 아버지는 유독 쌩쌩하셨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스크린을 뚫어져라 쳐다보시던 아버지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당시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는데, 처음보는 아버지의 모습이 신기했던 나머지 영화를 보는 중간중간 아버지를 힐끔힐끔 쳐다봤었다. 영화를 보고 난 뒤, 내 머릿속에는 영화에 대한 생각 대신 한 가지 질문만이 맴돌았다. “왜 오늘은 아빠가 졸지 않았던걸까?”
3. AD ASTRA, 그가 있을 별을 향하여
답은 그 날 내가 아버지와 함께 봤던 SF 영화, ‘애드 아스트라’에 있었다. 알고보니 아버지가 애드 아스트라의 주인공 ‘로이‘와 같은 결핍을 공유하고 있던 것이다. 그 결핍은 ‘가족을 떠난 아버지’였다. 작중 로이의 아버지는 태양계 어딘가에 있을 지적 생명체를 찾는 임무 중 실종된 우주비행사였다. 어렸을 때 아버지를 잃은 로이는 아버지 없는 유년기를 보내고, 이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우주비행사가 된다. 그렇게 로이는 20년동안 아버지를 죽은 사람으로 여긴 채 감정이 메마른 워커홀릭으로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로이는 아버지가 해왕성에 살아계신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된다. 로이는 생각할 틈도 없이 아버지를 찾으러가는 임무에 투입되고, 우여곡절 끝에 해왕성에 도착한다.
마침내 그토록 그리웠던 아버지와 재회하는 로이. 그러나 20년만에 재회한 아버지는 어째서인지 로이를 반기지 않는다. 로이가 이제 그만 지구로 돌아가자고 말하자, 아버지는 로이의 20년을 부정하는 충격적인 진실을 고백한다. 사실 아버지는 지구에서의 삶에 지쳐 임무를 핑계로 우주로 도피하길 택했던 것. 결국 아버지는 로이를 버린 거나 마찬가지였다. 가슴 아픈 진실을 듣고 눈물을 흘리는 로이. 그럼에도 로이는 우주선에 남겠따는 아버지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설득한다. 아버지는 마지못해 로이와 함께 우주선을 빠져나오지만, 얼마가지 않아 로이와 연결된 생명줄(안전로프)를 끊어버린다. 필사적으로 아버지를 붙잡는 로이.아버지는 로이에게 나지막이 말한다. “보내줘, 로이.” 결국 로이는 아버지를 놓아주고, 아버지는 끝이 보이지 않는 암흑 속으로 사라진다. 홀로 남은 로이의 소리 없는 절규만이 광활한 우주에 울려퍼진다.
4. 아버지의 이야기
이렇듯 로이의 결핍은 ‘자신이 어렸을 때 가족을 떠난 아버지와의 애증어린 관계’였다. 나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가 중학생이었을 때 아버지의 아버지, 즉 나의 친할아버지가 집을 나갔다. 사업 실패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과 부부 갈등이 화근이었다. 돈을 벌어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아버지를 떠난 할아버지. 그 후, 아버지는 다시는 친할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아버지 없는 유년기를 보낸 나의 아버지는 청소년기 내내 방황하셨다. 직접 겪어보지 않아 감히 그 때 아버지의 심정을 가늠할 수 없지만, 아마 할아버지가 죽도록 미운 동시에 무척이나 그리우셨으리라. 이후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아버지는 3수 후 미대에 입학하셨고, 여러 직장을 거치다 어머니를 만나 30대 초반에 결혼하셨다.
그렇게 아버지는 결혼 후 나와 동생을 낳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된다. 바로 친할아버지가 살아계셨다는 것. 우리 집 우편으로 도착한 보험 관련 서류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5. 비로소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 순간
그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아버지의 기분이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나는 아버지 밑에서 더할나위 없이 사랑받으며 자랐기 때문이다. 이런 나에게 ‘애드 아스트라’는 아버지가 겪은 일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해준 뜻깊은 영화였다.
애드 아스트라를 처음 봤던 그 날, 집에 돌아온 나는 어머니께 아버지의 행동을 말씀드렸다. “엄마, 오늘은 아빠가 한 번도 안 졸았어요! 근데 아빠가 왜 안 졸았는진 잘 모르겠어요.” 그러자 어머니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관계에 대해 진솔하게 이야기해주셨다. 나는 이전에도 친할머니댁에 갈 때마다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거라고 짐작하곤 했다. 어머니께서 그 이야기를 해주신 것도 처음은 아니었지만, 아버지의 사연을 명확히 이해하게 된 것은 그 날이 처음이었다. 어린아이다운 호기심이 생겨서였을까.그 날 이후로, 나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설명하기 힘든 관계에 큰 관심을 갖게되었다. 그 뒤로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면 종종 아버지의 불우했던 청소년,청년기와 할아버지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질문을 하면 사연이 아무리 길어도 늘 정성스럽게 이야기해주셨고, 내가 질문하지 않아도 아버지께서 먼저 말해주실 때도 있었다. 그렇게 아버지가 직접 말씀해주시는 사연을 자세히 듣고나니 아버지와 한 발자국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결국 애드 아스트라 덕분에 13살이라는 어린 나이부터 아버지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 셈이다. 만약 그 날 내가 아버지와 함께 애드 아스트라를 보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까지 아버지의 결핍과 그로부터 비롯된 행동들을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6. 아버지의 우주를 들여다보며
나는 아버지께서 이해할 수 없는 말이나 행동을 하실 떄마다 애드 아스트라의 ‘로이’를 떠올렸다. 임무가 난관에 부딪힌 후반부, 로이는 감정적으로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고 충동적으로 행동하기도 한다. 이 때 감정이 메마른 로이는 좀처럼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다. 때문에 겉으로만 봐선 그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이처럼 영화 내내 도무지 속마음을 알 수 없는 인물로 묘사되는 로이. 그의 본심은 오로지 내적 독백을 통해서만 드러난다. ‘아버지가 로이였다면, 지금 아버지는 마음속으로 어떤 독백을 하고 계신걸까?’ 이 질문을 머릿속에서 천천히 곱씹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아버지의 본심에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었다.
지금도 나는 가끔씩 생각날 때마다 애드 아스트라를 다시 찾아본다. 거대한 우주 한 가운데서, 홀로 아버지를 찾아헤매는 로이를 보고 있노라면 ‘아버지도 아버지의 우주에서 외로이 부유하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끝내 생명줄을 놓아버린 할아버지를, 암흑 속으로 사라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쓸쓸히 지켜보면서.
아버지는 우리 집안의 가장으로서 늘 강인한 모습을 유지하려하셨다. 그러나 나는 이제서야 들을 수 있었다. 그토록 굳건해 보이는 아버지의 내면 깊숙한 우주에서, 홀로 떠나간 할아버지를 부르짖는 아버지의 소리없는 흐느낌을. 그것은 감히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상처이자, 무슨 짓을 해도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었다.
7. 글을 마치며
어느덧 애드 아스트라를 처음 본 지도 6년이 되었다. 위에 써놓은 말만 보면 내가 아버지를 완벽히 이해한 사람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난 여전히 아버지가 이해되지 않을 때가 너무 많다. 아버지도 아버지이기 전에 한 명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무심코 잊고 아버지를 함부로 판단할 때도 많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고, 나도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사실이다.
앞으로도 아버지를 이해하기 힘든 순간에 직면할 때면 애드 아스트라의 로이를 떠올리면서, 그리고 애드 아스트라를 다시 한 번 감상하면서 아버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겠다. 아버지께서 어떤 말을 하건, 어떤 행동을 하건 사랑하는 나의 아빠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으니 말이다.
영화과지망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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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리뷰 잘봤습니다

내 방에서 아무 생각 없이 읽다가
자세를 고쳐잡고 소리 내서 또박또박 읽었습니다.
이렇게 진정성 있는 글을 읽는 건 참 오랜만이네요.
저도 부모님이랑 그렇게 같이 영화를 보고 싶은데,
이제는 두 분 다 나이가 많으셔서 그런지
극장에 모시고 가면 도중에 주무실 때가 많더라고요. ;;;;
헉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ㅠㅜ 저도 요새는 부모님이랑 영화관을 자주 가지는 못해서 아쉽더라고요


그렇지만 저도 영화보구 여운이 지렸었습니다.
이때가 아마 원스어폰어타임인할리우드랑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