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의 무희 (1933) 원작의 처참한 파괴. 스포일러 있음.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동경대 재학 중 이즈반도를 정처없이 떠돌며 겪었던 경험을 적은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다.
설국이라는 소설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것은 먼 훗날 이야기고, 이때는 그냥
대학교 1학년 학생이다. 아직은 청춘의 소용돌이가 격랑을 만들어 내는 질풍노도의 시절이다.
이즈반도는 일본에서도 하와이 비슷한 곳이다. 야자나무가 있고 청록빛 바다가 있고 나무들이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올라 마치 브로콜리처럼 보이는 산봉우리들이 그득하다. 기후도 온화하다. 일본의 다른 지역들이 쏟아지는 눈발에 기차가 지연될 때에도, 이곳의 벚나무들은 새하얗고 분홍빛 벚꽃을 피운다. 매화꽃들도 찬란하다.
특이하게도, 이즈반도의 마을들은 화려하거나 번쩍거리는 휴양지의 번성함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조금 가난하고 낡은 집들이 드문드문하고 웬지 쓸쓸해 보인다. 우러러보이는 산등성이며 가파른 길 위에 걸쳐 매달려 있는 집들이 참 외롭게 보인다.
100년 전 대학교 1학년 학생이 혼자 이곳을 방황하였다니 로맨틱하게도 들린다. 물론 고급온천장들을 순례한 것은 아니고, 외진 산길이나 폭포, 항구 등을 다녔다. 그는 길에서 가무단을 만난다. 가난한 섬에서 뭍으로 나온 일가족이다. 그 가무단에 가오루라는 아름다운 소녀가 있었다. 그는 가오루와 함께 여행을 한다. 그는 처음에 아름다운 가오루의 모습에 설레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다음, 어느 온천에서 목욕하고 있던 가오루가 그를 보고 반가와서 벌거벗고 달려오는 모습에 그는 깜짝 놀란다.
화장을 해서 성숙해 보였지, 아직 애기였던 것이다. 남자 앞에서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워할 줄도 모르는 애기였다.
그 이후 가와바타는 가오루에 대해 순수한 마음만을 갖는다. 애틋하고 순수하고 따스한 감정 - 그 밖에는 없다. 가와바타는 가오루의 이후 삶에 대해 불쌍하게 여긴다. 늘 떠돌아 다니며 가무를 파는 불안정하고 박해받는 삶 - 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소녀에게 주어진 운명이다. 하지만, 가오루는 가와바타에게 소녀다운 애정을 품기 시작한다. 엘리트 중의 엘리트에다가 높은 신분의 청년. 그러면서도 젠체하지 않고 따스하고 다정다감하다. 가족들은 가오루가 가와바타와 가까와지는 것이 두렵다. 신분 차이가 어마어마하니까.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보다가 상처만 받는다. 가와바타는 시모다항에서 배를 타고 떠나고, 가오루는 첫사랑을 보내는 소녀답게 눈물을 흘리며 운다.
너무나 깨끗하고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고, 영화화한다면 환상적인 영화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나도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특히 여배우가 전설 중의 전설인 다나카 키누요였다면 말이다.
거기에다가 영화가 만들어진 연도가 1936년 - 소설이 출간된 1926년으로부터 딱 10년 뒤다.
하지만, 굉장히 실망이다.
다나카 키누요는 전설적인 여배우기는 하지만, 14세 소녀와는 거리가 멀다. 벌써 영화는 소설과 거리가 멀어진다.
요염한 여자무희가 중년의 느끼한 남자 대학생(?)에게 사랑을 느낀다는 영화가 되었다.
이것만 해도 충격인데, 영화는 스토리를 막 파괴해 버린다.
가오루 일가가 마을사람들에게 억울하게 욕을 당하고 있는데, 느끼하게 생긴 중년 아저씨가 대학생복을 입고 끼어들어 그들을 구한다. 이 정의의 사나이가 바로 가와바타란다. 대학생 가와바타를 굳세고 강건하고 정의감을 가진 남자로 만든다. 가오루를 데려다가 자기 아들과 결혼시켜 호강하게 해주겠다는 부잣집 아저씨도 나오고,
정처없이 떠돌면서 어느 하나에 집중하지 못하는 가오루의 철없는 오빠도 나오고,
가와바타는 가오루의 신분상승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 떠다는 등
원작은 아주 무시하고 전혀 다른 신파조 영화를 만든다.
그나마 스토리가 재미라도 있으면 모르겠는데, 지루하고 억지스럽다.
1930년대 일본영화계 최고의 스타였다던 다나카 기누요를 데려다가 이런 영화밖에 못 만들었던가?
영화 속에서 긴장을 자아낸다든가 감정의 고조를 일으키는 그런 것도 없다. 영화 전반적으로 그냥 밋밋하다.
단 하나 위안이 있다면, 이 영화에 등장하는 가오루와 가와바타가
소설 속 당시 대학교 1학년이었던 가와바타와 가오루에 가장 비슷할 것이다. 영화가 만들어진 연도와 가와바타가 이즈반도를 여행했던 시기가 별로 멀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고 머릿속에 그리는 그런 환상적인 공간은 아니지만, 소박하고 평온하면서도 비극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시골 고즈녁한 풍경이 마음에 와 닿는다.
노스탤지어를 강하게 자극하는 아련한 분위기가
이 영화에 있다. 하지만, 이것 하나를 위해 이 영화를 보라고 하기에는 좀......
이즈반도는 그 후 많이 바뀌었지만, 가와바타가 방황하였던 외진 산길도 폭포도 터널도 모두 그대로 있다. 여전히 고즈녁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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