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itches of Salem (1957) 아서 밀러의 크루서블 영화화. 사르트르의 터치. 스포일러 있음.
아서 밀러의 크루서블은 1990년대에 영화화되어 대차게 비난받은 일 있다.
알고 보니 이미 프랑스에서 1950년대에 영화화된 바 있었다.
시몬느 시뇨레 그리고 이브 몽탕 등 대배우들이 주연한
영화다. 분위기는 잉마르 베리만 식의 아주 무겁고 어두운 느낌이다.
각본은 아서 밀러의 원작을 사르트르가 손봤다고 한다. 각본도 훨씬 더 좋아진 것 같다.
아주 잘 만든 영화다.
존 프락터라는 중산층 농민은 터프가이에다가 리더쉽도 있어서
주변 농민들의 신망을 산다.
부자들에게도 지지 않고, 마을의 권력자 목사에게도 들이받아서, 조금 미운 털도 박힌 사람이다.
교회에 가서도,
악마의 무서움만 강조하는 목사에게
"신을 만나러 왔는데, 악마만 이야기하느냐?"하고 소리치며 교회를 뛰쳐나온다.
존 프락터를 중심으로 해서 반골정신이 있는 마을사람들 몇몇이 있다.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존 프락터는 보통 인간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약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고,
비열하기도 하고, 용감하기도 하다. 이런 그가 인간으로서 숭고함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이 영화의 주제다.
사르트르적인 주제다. 원래 아서 밀러의 극본은 당시 매카시열풍을 조롱하기 위한 정치적인 것이었다고 한다.
이 영화는, 아서 밀러 원작의 정신에서 벗어나 사르트르적인 것에 가깝다.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는 전형적인 청교도다. 남편을 사랑하면서도 감정 표현을 하기를 주저한다.
남편이 자기를 사랑하냐고 물어도,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당신에게 헌신할 것이다" 같은 식으로 말한다.
존 프락터는 이런 아내에게 질린다. 그래서, 아비게일이라는 어린 하녀를 건드린다. 존 프락터는 몰랐다.
이런 소녀는 사랑에 목숨을 건다.
존 프락터를 죽이고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를 죽이고 자기 또한 죽는 일이라도
이런 소녀는 주저 않고 한다.
존 프락터는 한번 더 실수한다. 자꾸 달라붙는 아비게일을 집에서 난폭하게 쫓아낸다.
"내 육체가 널 원했던 것이지, 내가 널 원했던 것이 아니다"하는 식으로 말하면서......
아비게일은 무시무시한 말을 남기고 떠난다. "사실은 날 원하면서 아내 때문에 그러는 거죠? 잠시만 기다려요.
당신 손 더럽히지 않고 내가 해결해 줄께요."
이후 벌어지는 사건에 책임이 없는 사람은 이 중 하나도 없다.
원작이 아서 밀러의 연극이라서 영화가 연극적이고 밀도가 아주 높다.
그런 영화 있지 않은가? 1분 1초도 낭비하지 않고, 꽉꽉 채운 것같은 영화 말이다. 이 영화가 그렇다.
사건 중심이라기보다 캐릭터들 위주로 영화가 구축된다.
남편을 사랑하면서도 그것을 표현하는 것을 죄악시하는 교육을 받고 자라난 엘리자베스는
괴로워한다. 역설적으로, 남편이 바람을 피우면서 그녀의 사랑은 청교도적 억압으로부터 해방된다.
그녀는 자유롭게 분노와 실망을 터뜨리게 된다. 존 프락터의 불륜은 역설적으로,
그들이 얼마나 서로 사랑하고 있냐 하는 것을 보여주는 계기가 된다. 이를 계기로, 존 프락터도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도 아비게일도 모두 벌거벗은 그대로의 인간이 된다.
세일럼에서 어느 소녀들이 숲에서 불 피우고 마녀의식을 행하다가 붙잡힌다. 별 생각 없이 한,
요즘으로 치면 공포 체험같은 장난이다. 아비게일은, 존 프락터의 아내에게
저주를 내려 죽이고자 여기 참가한다. 아무리 존 프락터의 아내 엘리자베스를 죽이려고 해도,
어린 소녀가 할 수 있는 일이 뭐 있겠는가? 이런 귀여운 일이 다다.
하지만, 혐오스러운 청교도적인 엄숙주의와 잔인함이 아비게일에게 마을 전체를 피로 물들일 파워를 주게 된다.
숲에서 마녀의식을 행하다가 아버지에게 붙잡힌 어린 소녀는 겁에 질리다가 발작을 일으키게 된다.
아버지는 놀란다. 이것은 악마에게 홀려 그런 것이다. 무슨 일이 생기면 일단 악마부터 생각하게 만드는
청교도적 마을분위기가 이렇게 만든다.
자식을 여덟 낳았는데 그 중 여섯이 낳자마자 죽은 여인은,
이 분노를 여기에다가 쏟는다. "봤죠? 악마는 우리 주변에 있었어요. 내 자식들이 죽은 것도 다 악마 때문이예요!"
아이들이 죽은 것은 모두 네 자궁이 저주받아서 그런 거라고, 평소 아내를 구박해왔던
남편도 여기 가세한다. 목사는 이 사건을 계기로 자기가 권력을 잡고,
마을 내에 "청교도를 세우는" 피의 숙청을 하려 한다. 정직하고 공익을 앞세우는 부지사는,
마을을 빨리 안정시켜야겠다는 생각에 마녀재판을 서둘러 밀고나간다. 부지사는 증거에 따라 공정하게 재판을
하려고 하지만, 그 증거라는 것이 이미 광기의 결과물이다. (법이니 사회질서니 법적 공정함이니 하는 것들이,
인간의 광기에 얼마나 취약한가? 영화 마지막에 살아남은 아내 엘리자베스는,
"인간적 용서"만이 이 사태를 종결지을 수 있다고 말한다. "심판"으로는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없다.)
청교도적인 사회에 순응하는 대다수 마을사람들은,
여기 휩쓸려 마녀재판에 동조한다. 아비게일은 이 마녀재판의 주인공으로서,
누가 악마숭배자로 자기들을 유혹했는가 지목하는 역할을 한다. 그녀의 손가락짓 하나로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원래 아서 밀러는 매카시열풍을 풍자하려는 의도로 극본을 썼다고 한다.
내 생각에 사르트르의 버젼이 훨씬 더 드라마틱하고 주제가 분명하다.
아비게일은 존 프락터의 아내를 죽이려는 분명한 목적을 갖고 있다. 존 프락터의 아내는, 자기가 마녀로 지목되어
결국 죽임을 당하리라는 눈치채게 된다. 마지막으로 딸을 안으려고 하니, 어린 딸도 무서워 도망친다.
괜히 아내를 편들다가는, 존 프락터도 악마숭배자로 끌려들어갈 분위기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내가 죽는 것을 그냥 볼 수는 없지 않은가?
존 프락터는 마녀재판에 나가서 아내를 변호하고, 마녀재판은 결국 광기와 어리석음의 소산임을
질타한다. 그러자, 사람들은,
마녀재판이 광기의 소산임을 인정하는 대신, 존 프락터를 악마숭배자로 몬다.
존 프락터는 아내를 살리려고,
자기가 아비게일과 불륜관계에 있었으며 그것이 아비게일이 아내를 마녀로 지목한 원인이 되었다고
만천하에 고백한다. 아내는 재판정에 끌려나와 이것이 사실이냐고 추궁당한다.
실제 이런 일이 있었다고 말하기만 하면, 아내는 풀려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존 프락터는 파렴치범으로 사회적 사형선고를 받는다.
아내는 자기가 죽고 말지 남편을 파렴치범으로 만들 수 없다. 그래서, 그런 일은 없었다고 말한다.
죽음에 직면해서야 사람들은 그들의 본질을 드러낸다.
존 프락터는 감옥에서 사형집행을 기다리며 메말라간다. 그도 사람이다. 용감하게 아내를 위해
목숨을 걸기는 했지만, 막상 죽음을 기다리려니 무섭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여기에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왜 그는 두려운가?
삶이 끝나는 지점이 두려운 것이 아니다.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가치 -
그것에 대한 확신이 없기에 두려운 것이다. 그 확신이 없기에, 미신에 기대고 폭력에 굴복하는 것이다.
존 프락터가 감옥에서 애타게 바라는 것은 "널 살려줄께"가 아니다. "너는 가치 있는 인간이다.
네게는 폭력에 굴복하지 않고 올바른 일을 할 수 있는 힘이 있다"하는 말이다.
아내는 감옥에 찾아와 존 프락터가 원하는 말을 해 준다.
그는 그 말을 듣고 죽을 결심을 한다.
"나는 인간으로서의 내 가치를 확신하기에, 사회적 악에 대항해서 사회적 가치를 세우고,
신에게 더 가까와질 수 있었다"하는 말을 남긴다.
자기 한몸 사형을 당함으로써,
이 마녀사냥이 광기의 소산임을 모든 사람들에게 천명하는
숭고한 희생자가 되는 것이 그의 선택이다.
그가 교수대에 매달리면서,
존 프락터를 중심으로 해서 청교도적이고 미신적인 마을에 대항하던
합리적인 사람들이 힘을 얻는다. 그리고, 미신적인 광기의 사회를 전복한다.
아서 밀러의 원작과는 달리, 인간 본질과 실존에 대해 심각하게 다루는
영화가 되었다.
잉마르 베리만 느낌도 나고, 사르트르 본인의 입으로 사르트르의 철학에 대해 풀어놓는
영화라서 자연스럽게 깊이가 있다.
대배우 시몬느 시뇨레의 묵직한 연기도 좋지만,
활력 있고 감정적인 이브 몽탕의 연기가 아주 훌륭하다.
나중에 세일럼재판에서 인간성을 대변하는 영웅이 되지만,
영화 처음에는,
불륜을 저지르고 여자들을 채찍질하고 자기 합리화를 하고
삐딱한 성격의 마초로 나온다.
요즘 세상에도 일깨움을 줄만한 작품이네요. 인간의 본질을 파악한 작품은 시대를 초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