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존 오브 인터레스트> 연출 의도 해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재현한 ‘행복한 가족’의 모습
당시 회스 가족의 일상은 지금도 남아 있는 실제 가족사진이 말해주고 있다. 아이들은 수영장과 정원에서 뛰어놀고, 부모는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다. 이러한 자료와 현존하는 건축물을 바탕으로 이 작품은 ‘행복한 가족’의 옛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참고로 회스가 살았던 실제 저택은 보존 상태가 좋지 않아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세트장 건설 등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촬영 팀은 수용소 근처의 폐가를 개조해 사용했다고 한다.
가족들의 단란한 모습만 본다면 이들도 세상의 많은 가족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곳이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하고 시체가 계속 불태워지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바로 옆이라는 점이다. 전쟁 후 회스가 처형되기 전에 쓴 수기에는 가족들이 수용소의 실상을 알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과연 홀로코스트 현장 바로 옆에 살면서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랐다는 것이 가능할까?
주의할 점은 가족들의 일상을 담은 이 작품의 장면에서 수용소 방향에서 비명이나 총소리 등, 분명 평범하지 않은 소리가 가끔씩 들린다는 점이다. 동시에 기계 소리도 들리는데, 이는 당시 수용소에서 나는 소리를 감추기 위해 오토바이 엔진 소리를 내며 ‘사운드 마스킹’을 했던 상황을 재현한 것으로, 당시에는 엔진에 시동 거는 일만 하는 인력이 고용되었다고 한다.
고정 카메라 촬영으로 끌어낸 객관성
이 작품은 회스와 가족의 모습을 미화하지 않고, 반대로 진부화하지 않고 평면적인 자세로 영상화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조명을 사용하지 않고 자연광으로 촬영했다. 게다가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를 이끌어내기 위해 몰래카메라처럼 촬영장 곳곳에 카메라를 설치하기도 했다. 배우들이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배역을 연기함으로써 모든 극적인 표현이 의도적으로 배제되어 관객들은 다른 영화 작품에 비해 보다 ‘객관적’으로 그들을 볼 수 있게 된다.
이 부분이 글레이저 감독다운 부분이다. 그는 <언더 더 스킨>(2013) 등 전작이 그랬던 것처럼 기존의 ‘영화적’이라는 관습에서 벗어나 소재에 맞는 표현 방식을 처음부터 신중하게 모색하는 등 지성과 도전정신을 가지고 있다.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도 작품이 적은 것은 이런 데에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열화상 카메라의 연출 의도와 ‘헨젤과 그레텔’
회스와 그의 아내 헤드비히는 크리스티안 프리델과 산드라 휠러가 맡았다. 둘 다 독일에서 풍부한 커리어를 쌓고 각종 상을 휩쓴 명배우들이다. 이 두 사람 또한 담담하게,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그려냄으로써 이 작품은 이런 방식으로만 표현할 수 있는 리얼리티의 표현과 관객의 능동적인 사고를 유도하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작위성을 희석시키려는 이 작품에서 이색적인 것은 군용 렌즈와 열을 가시화하는 열화상 카메라를 이용한 야간 촬영 장면이다. 여기서는 마음씨 착한 폴란드 소녀가 어둠 속에서 수용자들의 작업장에 사과 등 농작물을 숨겨 굶주린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모습이 비춰진다. 이 인물은 글레이저 감독이 이 영화를 준비하기 위해 현지에서 취재하던 중 만난 90대 여성의 어린 시절을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당시 폴란드의 비유태인인 소녀는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실제로 작업 현장에 식량을 놓아두었다. 그것은 너무도 비인간적인 환경 속에서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고귀한 행동이다. 어둠 속에서 그녀가 빛나고 있는 것처럼 비춰지는 연출에는 그런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또한 그 모습은 극 중 루돌프가 아이들에게 읽어주는 그림 동화 <헨젤과 그레텔>과 겹쳐진다. 주인공들이 빵 부스러기를 길잡이로 삼았던 것처럼 음식을 뿌리는 행위는 우화적이기까지 하다.
그 소녀가 우연히 작업 현장에서 발견한 손으로 쓴 악보를 피아노로 연주하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소리 없는 목소리로 자막으로 나오는 것은 실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조셉 울프의 시 ‘Sunbeams’다. 그는 수용소 안에서 여러 편의 시와 곡을 지어 적어두었던 인물로, 생존 후에도 나치의 범죄 행위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활동했다. 이처럼 광기와 폭력에 대한 저항의 의지가 이 작품의 장면에서 교차한다.
모호해지는 회스 부부와 관객의 경계
이처럼 신성하다고 할 수 있는 인간의 따뜻함과 헌신적인 정신을 그리는 반면, 인간의 잔인함과 무관심은 이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그려진다. 소름이 돋는 것은 저택의 지하 욕실에서 수용소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행복한 집’과 ‘살육 시설’은 인접했을 뿐만 아니라 연결된 공간이었던 것이다. 그 지하 통로를 이용해 회스가 성적으로 부적절한 행위를 했을 가능성을 영화는 암시하고 있다.
더욱 섬뜩한 것은 아내인 헤드비히가 이런 환경 속에서도 자신이 꿈꿔왔던 이상적인 삶을 얻었으니 계속 이곳에 살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묘사다. 이런 무신경한 태도에 많은 관객들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관객과 회스 부부는 그렇게 구분할 수 있을 만큼의 차이가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생각해보면, 우리도 살면서 많은 것을 놓치고, 많은 비극과 불합리에 대해 무관심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자국 정부가 전쟁행위를 하는 국가를 지원하거나 국내 기업이 군수산업에 가담하여 피해를 입히는 것에 대해 우리는 관심을 가지고 반대하고 있는지, 자살률이 높은 사회에서 누군가가 기차에 뛰어드는 것과 같은 인명사고가 발생해도 우리는 그것을 일상적인 일이라며 태연하게 행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민자나 외국인이 차별과 박해를 받는 것에 반대할 수 있는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는 회스 부부를 비정상적인 존재로 간주하고 자신과 분리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마지막 장면의 연출에서 읽을 수 있는 것
소장으로서 묵묵히 업무를 수행하며 조직에서 높은 평가를 받던 회스는 영화 말미에 갑자기 메스꺼움을 느끼게 된다. 그 이유는 명확하게 묘사되지는 않지만, 잔인한 행위를 계속 정당화하고 죄책감과는 무관한 태도를 취하던 그도 무의식의 영역에서는 그 죄의 깊이에 흔들려 정신 균형이 무너져 내렸을지도 모른다. 그 가능성을 암시함으로써 마침내 그와 관객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그리고 회스는 인류의 어리석음과 유대인의 피해를 세상에 알리는 박물관이 된 현재의 아우슈비츠의 모습을 잠시나마 환시처럼 목격하게 된다. 현대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사형당한 소장이 한 일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판단하고, ‘혐오감을 느끼는 것’을 당연한 태도로 볼 수 있다. 문제는 우리 자신과 우리를 둘러싼 사회의 비정상을 비정상으로 인식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미래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하고 있는 일도 역겨울 수 있다.
자신도 유대인인 글레이저 감독은 아카데미 국제 장편 영화상 수상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재 가자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관심을 갖고 토론과 행동을 촉구하는 그의 용기는 이 영화의 주제를 깊이 있게 이해하게 하고, 그 메시지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우리 영화는 최악의 상황에서 비인간화가 어떤 일을 일으키는지 보여준다. 지금 우리는 유대인 정체성과 홀로코스트가 수많은 무고한 사람을 전쟁으로 몰아넣은 점령에 이용되고 있음을 반대하는 사람으로서 이 자리에 섰다.
지난해 10월 7일, (하마스의 공격에 의한) 이스라엘 희생자든, 가자 지구에서 자행 중인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인한 희상자든, 모두 비인간화의 희생자인데 우리는 어떻게 저항해야 할까?
영화에서 실존 인물인 알렉산드라는 저항을 선택했다. 그의 삶과 저항 정신에 이 상을 바친다.
(출처: 일본 Movie Wal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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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각인된 배우네여ㅎㅎ추락의 해부에서도 나왔섰는데 인디아일과
토니에드만에서도 나왔고여~
보고 난후보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점수가 높아지는 영화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