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무비의 제왕 로저 코먼 부고 기사 번역
버라이어티 기사 옮겨봤습니다.
오랜 경력과 업적의 전설적인 영화인이어서 내용이 좀 깁니다.
https://variety.com/2024/film/news/roger-corman-dead-producer-independent-b-movie-1235999591/
선구적인 독립 영화 제작자이자 B급 영화의 제왕, 로저 코먼, 98세 나이로 별세
수백 편의 저예산 영화를 감독 및 제작하고 잭 니콜슨, 마틴 스콜세지, 로버트 드 니로 같은 훗날의 스타를 발굴한 전설적인 B급 영화의 제왕 로저 코먼이 세상을 떠났다. 향년 98세였다.
코먼은 5월 9일 캘리포니아주 산타모니카에 있는 자택에서 가족들에게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고 유족들이 버라이어티에 알렸다.
유족들은 성명서에서 “그분의 영화는 혁명적이고 인습 타파적이었으며 한 시대의 정신을 담아냈습니다. 자신의 어떻게 기억되기를 원하냐는 물음에 그분은 ‘나는 그저 영화 제작자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라고 했다.
뉴월드픽처스, 콩코드/뉴호라이즌스 등 여러 형태로 존재했던 코먼의 제국은 여느 메이저 스튜디오 못지않게 활발했으며, 항상 수익성이 좋았다고 그는 자랑했다.
그는 공포, 액션, SF, 심지어 일부 가족 영화까지 빠른 속도의 저예산 장르 영화에 특화했으며, 그의 회사는 잭 니콜슨(흡혈 식물 대소동), 로버트 드 니로(바바라 허시의 공황 시대) 같은 배우들에서부터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디멘시아 13), 마틴 스콜세지(바바라 허시의 공황 시대) 같은 감독들까지 여러 주요 인재들의 실무 훈련장이 되었다.
2009년 11월 AMPAS의 첫 번째 거버너스 어워드 시상식에서 코먼이 아카데미상을 수상했을 때, 론 하워드는 주요 임원 및 크리에이티브 직책에 여성을 고용하고 큰 역할을 준 것에 경의를 표했고, 월터 모슬리는 코먼이 나이, 인종, 성별을 넘어 “문을 열어 준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코먼은 영화를 “진정한 현대 예술의 유일한 형태”라고 찬양했다. 하지만 그는 출연진과 제작진에게 임금을 줘야 한다는 것은 예술과 비즈니스 사이에서서 끊임없이 타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도 지적했다.
론 하워드는 또한 자신의 첫 연출작 <퍼니카>를 만들 때, (제작자) 코먼에게 영화의 낮은 제작비와 군중 씬의 엑스트라 부족에 대해 불평했지만, “이 영화를 잘 만들면 다시는 내 밑에서 일할 필요 없어!”라는 대답만 들었다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지구상의 영화 애호가들이 당신에게 감사한다.”라며 건배사를 바쳤다. 조나단 드미는 “정말 저렴한 비용으로 엄청난 가치를 부여했다.”며 코먼의 연기를 칭찬했다.
거의 반세기 넘게 코먼은 텔레비전의 등장으로 거의 사라진 B급 영화 시장을 인수했고, 거의 혼자서(코먼의 초기 감독/제작에 대부분의 자금을 지원한 아메리칸인터내셔널픽쳐스(AIP)의 샘 아코프와 함께) 그 시장을 지켜냈다. 그는 90대의 나이에 접어들어서도 500만 달러 이하의 B급 영화를 제작하여 비디오 및 TV용으로 선보였다.
그는 1960년대 후반에 감독직에서 물러난 후(80년대 중반에 <돌아온 프랑켄슈타인>로 잠시 복귀), 뉴월드픽쳐스를 설립하고,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외침과 속삭임> 같은 외국의 예술 영화를 수입했고, 업계에 그러한 희귀 영화를 효과적으로 마케팅하고 배급하는 방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난 코먼은 1940년 가족과 함께 LA로 이주했다. 그는 비벌리힐스 고등학교와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공학을 전공했다. 그는 캘리포니아에 왔을 때부터 영화에 푹 빠졌다고 고백했다. “그런 곳에서 자랐으니 영화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죠.”라고 말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참전과 교육(그는 옥스퍼드에서 한 학기 동안 영문학 공부를 하기도 했다)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스탠포드 졸업 후 그는 US일렉트릭모터스에서 단 4일간 일한 뒤, 20세기폭스사에서 심부름꾼으로 일하면서 영화 업계에 진출하려 했다. 옥스퍼드로 돌아왔을 때(그리고 파리에 잠시 머물렀을 때), 그는 자신이 “부랑자” 신세가 되었다고 했다. 그는 1951년부터 53년까지 온갖 잡일을 하면서 실업수당을 받았다. 그는 잠시 스크립트 리더로 일하기도 했지만, 자신이 각본을 더 잘 쓸 수 있다는 확신이 들자 <Highway Dragnet>의 각본을 써서 얼라이드아티스츠사에 4천 달러를 받고 팔았다.
<Highway Dragnet>의 1954년 개봉으로 벌어들인 돈과 가족, 친구들이 대준 돈으로 그는 <The Monster From the Ocean Floor>를 제작했고, 샘 아코프의 AIP로부터 선금을 받는 대가로 일련의 영화들을 제작하기로 합의했다.
1955~60년 동안 코먼은 AIP를 위해 30편 이상의 영화를 제작하거나 감독했는데, 모두 10만 달러 미만의 제작비로, 2주 안에 완성했다. 서부극(<Five Guns West>, <Gunslinger>), 공포 및 SF(<The Day the World Ended>(1956), <The Undead>(1957), 그리고 십대 타깃 영화 <Carnival Rock>, <Rock All Night> 등이었다.
비평적으로는 1958년 영화 <머신 건 켈리>가 나오고 나서야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 영화에 이어서 코먼은 20세기폭스 영화 <I Mobster>를 연출했다. 1960년 <흡혈 식물 대소동> 이후, 코먼은 아코프에게 더 야심찬 프로젝트들에 자금을 지원하라고 설득했다. 바로 코먼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들 중 한 사람인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일련의 영화들이었다.
1960년 <어셔가의 몰락>으로 시작된 이 공포 시리즈는 <리게아의 무덤>, <죽음의 가면> 등 8편의 저예산 히트작들을 탄생시켰다. 이 영화들은 보리스 칼로프, 빈센트 프라이스, 배질 래스본, 피터 로리의 경력을 되살렸고, 고전으로 자리잡았다.
같은 기간 동안 그는 엘런 버스틴, 잭 니콜슨, 로버트 드 니로 같은 (당시) 무명 배우들과 로버트 타운 같은 시나리오 작가, 마틴 스콜세지, 조나단 드미, 조 단테, 피터 보그다노비치 같은 신인 감독에게 데뷔 기회를 제공했다.
코먼이 유일하게 “메시지”를 담은 영화인 1962년 작품, 윌리엄 샤트너가 출연한 <침입자>는 인종차별을 다룬 작품이었다. 평가는 좋았지만 영화에 “Nigger”라는 단어가 사용됐다는 이유로 검열 통과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흥행이 좋지 못했다. 코먼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그렇게 뚜렷한 개인적 입장이 담긴 영화는 다시는 만들지 않겠다고 그때 결심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콜럼비아픽쳐스의 경영진들이 예산을 줄이려할 때도 그는 나름의 “대작” 영화에 도전하려 했다. AIP로 돌아온 그는 피터 폰다 주연으로 36만 달러의 제작비를 들여 <와일드 엔젤>를 만들었고, 2,500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렸다.
이후 LSD를 소재로 한 영화 <환각특급>을 비롯해서 젊은 층을 겨냥한 다른 히트작들을 내놨다. 하지만 1970년 <기관총 엄마>를 찍을 무렵부터 기력이 바닥나기 시작했고, <붉은 남작>를 끝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1970년 그는 뉴월드픽쳐스를 설립해, 아코프가 자금을 지원했던 종류의 영화들을 제작 및 배급했다. 설립 첫 해 연말에 <여감방 2>, <야간 간호원> 등을 개봉시켜 흑자를 기록했다. 이후 그는 <피라냐>, <퍼니카>, <죽음의 경주> 등의 영화를 제작했다.
예술 영화에 대한 그의 열망은 1972년 잉마르 베리만의 <외침과 속삭임>으로 시작되어, <가을 소나타>, <아델 H 이야기>, <아마코드>, <피츠카랄도>로 이어졌다. 그는 마케팅과 배급 기술을 혁신하여 더 다양한 상영관에서 영화를 개봉하여, 대도시 외의 관객들에게 이전에는 즐기지 못했던 해외 영화를 맛보게 했다.
1980년 당시 외국 영화 배급 수익은 뉴월드 연 매출 5,500만 달러의 5분의 1 수준이었다. 또한 <A Hero Ain’t Nothin’ but a Sandwich> 같은 가족 영화, 그리고 엇갈린 반응을 얻은 고예산 SF 영화(500만 달러) <우주의 7인> 같은 프로젝트도 추가했다.
1983년에는 뉴월드를 1,650만 달러에 매각하고 콩코드/뉴호라이즌스(CNH)를 설립했다. 그는 루이스 로사 감독과 같은 새로운 인재를 계속 발굴했고,버라이어티 선정 40년 연속 흑자 기록 제작자라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영화 시장은 변했고 그의 수익은 AIP나 초기 뉴월드 시절의 최고치에 도달하지 못했다. 다행히도 코먼 입장에서는 급성장하는 해외 시장이 사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성장세를 이어갔고, 새로운 홈 비디오 시장을 활용하기에 완벽한 시기에 CNH가 탄생했다. 방대한 콘텐츠를 보유한 그는 자신의 옛날 영화를 비디오로 출시하는 동시에 새로운 시장을 겨냥해 새로운 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완벽한 위치에 있었다.
1990년대 <돌아온 프랑켄슈타인>로 20년 만에 감독으로 복귀한 코먼은 장르 팬들을 실망시켰고 다시는 연출을 맡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홈비디오 전략이 재정적인 면에서 성공적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코먼은 2000년에 회사 이름을 뉴콩코드로 바꾸고 뉴콩코드 홈엔터테인먼트로 개편했다.
코먼은 1955년에 <분노의 질주>(The Fast and the Furious)라는 영화를 제작했는데, 프로듀서 닐 모리츠가 빈 디젤과 폴 워커가 주연을 맡을 자동차 소재 시리즈 영화를 제작하던 중, 그 영화를 발견했고, 자신의 영화 제목에 그 제목을 사용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코먼과 모리츠는 2001년 영화 <분노의 질주>의 제목 사용권과 코먼이 가진 영상 소스 사용권을 교환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또한 코먼은 쇼타임과 사이파이채널에 자신의 영화를 판매할 수 있는 새로운 판로를 찾았다. CNH는 유료 케이블 방송사를 위해 SF, 공포, 판타지 영화 시리즈인 <Roger Corman Presents>를 제작했다. 2001년 사이파이채널의 <블랙 스콜피온> 시리즈는 코먼의 가장 인기 있는 비디오 영화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코먼이 제작한 사이파이채널 영화로는 <다이노샤크>, <다이노크록 vs. 슈퍼게이터>, <샤크토퍼스> 등이 있다.
2005년 콩코드는 부에나비스타홈엔터테인먼트와 12년 계약을 체결, 400여 편의 코만 제작 영화에 대한 배급권을 부여했고, 2010년 코만은 샤우트팩토리와 계약을 체결하여 50편의 코만 제작 영화에 대한 북미 독점 홈비디오 판권을 부여했다.
그들은 ‘로저 코먼의 컬트 클래식’이라는 홈 엔터테인먼트 시리즈를 선보였는데, 그 첫 번째 작품은 <피라냐>, <심해의 공포>, <Up From the Depths>, <Demon of Paradise>였다.
1990년 코먼은 회고록 <나는 어떻게 할리우드에서 백 편의 영화를 만들고 한푼도 잃지 않았는가>를 출간했다.
그는 조나단 드미 감독의 <필라델피아>, 론 하워드의 <아폴로 13>,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의 <대부 2>, 조 단테의 <루니 툰: 백 인 액션> 등 자신이 데뷔시켜서 성공한 감독들의 작품에 카메오로 자주 출연했다.
1998년에는 칸 국제영화제에서 신설한 첫 프로듀서상을 수상했다.
2006년에는 미국 프로듀서 조합으로부터 데이비드 O. 셀즈닉 상을 받았다. 같은 해 그의 영화 <어셔가의 몰락>은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보존해야 할 중요한 영화들로 발표하는 국립영화등기부 선정 25편의 영화 중 하나가 되었다.
알렉스 스테이플턴의 2011년 장편 다큐멘터리 <로저 코먼의 세계>는 영화 제작자로서 코먼의 활동을 탐구했다. 지난해에 코먼은 영화 산업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LA 프레스 클럽으로부터 Distinguished Storyteller 상을 받았다.
코먼의 유족으로는 아내이자 프로듀서인 줄리 코먼과 딸 캐서린과 메리가 있다.
gol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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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분이셨군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가 없었더라면 당시 3류로 취급받던 SF 영화들이 지금처럼 발전할 수가 없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