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소시스트' 윌리엄 프리드킨 감독 부고 기사 번역
버라이어티 기사 번역해봤습니다.
https://variety.com/2023/film/news/william-friedkin-dead-the-exorcist-1235689676/
<엑소시스트> 감독 윌리엄 프리드킨, 87세 나이로 사망
오스카상 수상작인 <프렌치 커넥션>과 블록버스터 <엑소시스트>로 잘 알려진 윌리엄 프리드킨 감독이 월요일 LA에서 사망했다. 향년 87세.
프리드킨의 아내 셰리 랜싱의 친구인 채프먼 대학교의 학장 스티븐 갤러웨이가 프리드킨 감독의 사망을 확인해줬다.
키퍼 서덜랜드가 주연을 맡은 프리드킨 감독의 마지막 영화 <케인호 반란 군법 회의>(The Caine Mutiny Court-Martial)가 베니스 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일 예정이다.
프리드킨은 피터 보그다노비치,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할 애슈비 등과 함께 1970년대에 정력적이고 과감한 새로운 세대의 영화감독들 중 A급으로 발돋움했다. 프리드킨은 텔레비전, 특히 다큐멘터리 영화에서의 경험과 최첨단 편집 스타일을 결합하여 자신의 전문 분야인 공포 및 형사 스릴러 장르에 큰 활력을 불어넣었다.
<프렌치 커넥션>(1971)은 놀랍도록 빠른 속도감과 도덕적으로 모호한 이야기를 다큐멘터리 스타일로 촬영했으며 영화사상 가장 유명한 자동차 추격전 시퀀스 중 하나를 담았다. <프렌치 커넥션>은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진 해크먼) 등 여러 오스카상을 수상했으며, 이후 수년 동안 영화와 TV 형사 장르의 시금석이 되었다.
<프렌치 커넥션>의 비평적 영광 이후 1973년 개봉한 <엑소시스트>는 전 세계적으로 5억 달러라는 놀라운 수익을 거두며 <대부>와 함께 영화계의 블록버스터 시대를 열었다. 악마에 빙의된 어린 소녀에 관한 윌리엄 피터 블래티의 소설을 각색한 <엑소시스트>는, <프렌치 커넥션>이 형사 스릴러 장르에 끼친 영향만큼이나 공포 장르에 큰 영향을 끼친 묵직한 스타일리시 스릴러였다. 이 작품으로 프리드킨은 두 번째로 오스카 감독상 후보에 올랐다.
프리드킨은 시카고의 TV 방송국 WGN의 우편실에서 경력을 시작하여 TV 프로그램과 다큐멘터리를 연출하는 감독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그는 사형수의 갱생을 다룬 1962년 다큐멘터리 'The People vs. Paul Crump'를 비롯해 초창기에 약 2,000편의 TV 프로그램을 연출했다고 한다. 그 작품으로 샌프란시스코 영화제에서 골든 게이트상을 수상했고, WBKB에서 다큐멘터리 부문을 이끌게 되었으며, 이후 프로듀서 데이비드 L. 울퍼 밑에서 다큐멘터리 감독직을 맡게 됐다.
1960년대 중반, 프리드킨은 다큐멘터리를 뒤로하고 장편 영화 제작에 뛰어들었다. <알프레드 히치콕 프레젠트>의 한 에피소드를 연출한 프리드킨은, 1967년 소니와 셰어가 주연을 맡은 팝 음악 이야기 <Good Times>의 감독으로 고용되면서 본격적인 경력을 쌓게 된다.
<Good Times>는 동시대 리처드 레스터 영화와 같은 최첨단 스타일로 주목을 받았다. 이 영화의 성공에 힘입어 프리드킨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벌레스크의 세계를 다룬 작품인 <The Night They Raided Minsky’s>의 감독으로 기용되어, 카메라 워크와 편집을 통해 신선하고 현대적인 느낌을 불어넣었다. 이어서 그는 해롤드 핀터 연극을 각색한 <The Birthday Party>와 맷 크롤리 원작 <The Boys in the Band>의 영화판을 연출했다.
두 작품 모두 1971년 <프렌치 커넥션>을 연출하면서 프리드킨이 앞으로 선보일 작품의 시작에 불과했고, 1973년 묵직하게 스타일리쉬한 공포 영화 <엑소시스트>는 프리드킨에게 또 다른 출발점이 되었다.
하지만 <엑소시스트>는 그의 마지막 히트작이 되었다. 앙리조르주 클루조의 영화 <공포의 보수>(1953)을 도전적으로 리메이크한 <소서러>를 1977년에 선보일 때까지 그는 다른 영화를 연출하지 않았다. <소서러>는 제작비를 초과했고, 그 당시에는 실망스럽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서 가치를 인정받았다. 프리드킨은 이후 스릴러 <브링크 도난 사건>, 논란이 많았던 <크루징>, 1983년 코미디 <세기의 거래>를 연출했다.
1980년대 초 프리드킨과 블래티는 <엑소시스트 3> 프로젝트에 파트너로 함께 참여했지만, 프리드킨은 창작상 견해 차이로 손을 뗐다.
1985년에는 흥행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호평을 받은 스릴러 영화 <리브 앤 다이>를 통해 흥미로운 스타일리스트 감독으로서의 능력을 입증했다.
이후 프리드킨은 <납골당의 미스터리>, <환상특급>, <스페이스 퀘스트>, <C.A.T. Squad> 같은 TV 시리즈 작업들을 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2000년에는 밀리터리 영화 <룰스 오브 인게이지먼트>를 연출해 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1991년 스튜디오 대표 셰리 랜싱과 결혼하면서 다시 한 번 장편 영화를 정기적으로 연출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그는 케이블 TV용 <12인의 성난 사람들>을 리메이크해 호평을 받았고, 다큐멘터리 <Howard Hawks: American Artist>를 연출했다. 추가 장면이 포함된 <엑소시스트> 재개봉판은 미국에서 4천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2000년대 들어 프리드킨은 토미 리 존스와 베니치오 델 토로 주연의 2003년 스릴러 영화 <헌티드>, 2007년에는 트레이시 레츠의 연극을 원작으로, 애슐리 쥬드와 해리 코닉 주니어가 출연한 공포영화 <버그>를 연출했다.
2011년에는 트레이시 레츠의 연극 원작, 매튜 매커너히와 에밀 허쉬가 주연을 맡은 <킬러 조>를 완성했다. 논란이 된 이 범죄 영화는 2012년 미국에서 제한적으로 개봉했는데, 제작비 1,100만 달러를 들였던 것에 비해 전 세계 흥행 수입은 400만 달러에 그쳤다. 프리드킨은 또한 TV 시리즈 <CSI>의 두 에피소드를 연출했다.
시카고에서 태어난 프리드킨은 Senn 고등학교에 다녔는데, 학업에 열중하지는 않았지만 프로 농구 선수가 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키가 180cm 이상 자라지 않아서 저널리즘으로 진로를 바꿨다.
수년간 다큐멘터리 분야에서 일했던 그는 2003년 <A Decade Under the Influence>와 <Pure Cinema: Through the Eyes of the Master.> 같은 영화와 영화감독에 관한 여러 다큐멘터리에 여러 해 동안 출연했다.
그는 뉴스 캐스터 켈리 랭과 배우 레슬리 앤 다운, 잔느 모로와 결혼하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4번째 부인 셰리 랜싱과 두 명의 아들이 있다.
gol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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