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처럼 다시 만나게 될 테니, <인사이드 르윈>
미세한 빛이 암실을 뚫고 들어온다. 이윽고 낡은 기타가 보인다. 질곡으로 점철된 세월이 처연한 음색 위를 흐르며 담담하게 마지막 생을 읊조린다. 그렇게 영화는 끝을 노래하며 시작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노래는 황량한 뉴욕 거리 아래로 고꾸라진다. 정처 없는 영혼을 마주하는 세상은 냉랭하다.
르윈이 기댈 곳은 오직 플롯을 가득 메우는 진한 포크송이다.
이렇게 <인사이드 르윈>은 꿈을 갈망하는 자를 옭아매는 겨울과 그 겨울이 남긴 희고도 무수한 발자국들을 조명한다. 코엔 형제는 그 발자국들 위에 르윈 데이비스라는 희로애락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영화는 줄곧 한 낭만이 삼키는 공기에 짙은 회색빛을 덧칠한다. 예술이 짊어질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비애와 좌절을 노래로 가득한 일상에 사정없이 펴 바르는 것이다.
이리저리 떠도는 삶은 비선형적인 불균형을 일으킨다. 불안한 일상 속에서 르윈에게 확신이란 단어는 없다. 그는 매일 다른 곳에 지친 몸을 눕히고 아쉬운 소리를 해야만 한다. 당연히 막연한 꿈에 색채를 입힐 여유도 없다. 성공은 함부로 회자될 수 없다. 그가 맞이할 내일이 너무나도 위태롭기 때문이다. 이토록 엄혹한 긴장감 속에서 르윈은 희미한 희망을 조심스레 꺼낸다.
하지만 영화는 이 희망을 단어 그대로 전달하는 우를 범하진 않는다. 언제나 르윈이 새기고픈 희망은 음악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추운 현실은 결코 그가 부르는 노래 곁을 떠나지 않는다. 이처럼 불안한 음악은 불확실한 삶과 이상적인 삶이 동일한 선 상에서 공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준다. 코엔 형제 특유의 니힐리즘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영화는 염세적인 시선을 견지하며 끝내 르윈을 거리 위로 내몰고 만다. 추위에 한껏 움츠린 몸은 꿈을 맹렬하게 침범하는 생존 본능을 실감케 한다. 그는 오늘도 몸을 뉘일 안식처를 찾아야만 한다.
르윈에게 현실은 늘 꿈보다 앞서 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 르윈은 한 고양이를 마주하게 된다. 이때부터 영화는 끊임없이 르윈에게 고양이를 대입한다. 둘 사이에 복잡다단한 감정을 형성해 방랑하는 자가 느끼는 심상을 세밀하게 직조하기 위해서다. 신세를 졌던 집이 키우는 고양이임에도 불구하고 집으로 돌려보내지 못하는 상황은 그에게 부채의식으로 다가온다. 르윈은 매일 많은 것들을 포기하지만 이 고양이만큼은 놓칠 수 없다는 듯이 동분서주한다. 고양이가 비루한 삶 속에서 놓칠 수 없는 가치로 치환되는 순간 한 대사가 장면을 가득 메운다.
르윈이 고양이죠?
물론 사소한 착각이다. 하지만 서로 이름이 뒤바뀌는 찰나로 인해 르윈과 고양이는 유사한 존재감을 공유한다. 거리 위를 서성이는 이들에게서 비슷한 연민이 느껴지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순간부터 르윈에게 고양이는 책임감이 된다. 한없이 자신을 짓누르는 부채감을 해소하기 위해서도 고양이는 반드시 원래 집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러나 영화는 그 소박한 책임마저도 쉽게 허용하지 않는다. 고양이가 르윈에게서 벗어난 것이다. 르윈은 필사적으로 고양이를 찾고자 노력한다. 그 절박한 얼굴에 나지막이 드리우는 상실감은 더욱 애잔하게 다가온다. 아마도 작은 빈틈조차 내주지 않는 야속한 세상 때문이 아닐까.
집고양이가 길고양이 처지에 놓이면서 영화는 본격적으로 거리 위 정서를 불러온다. 길거리에는 정형화된 질서가 없다. 즉흥적이고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시시각각 변할 따름이다. 르윈이 지내는 일상도 마찬가지다. 숱한 어려움이 닥치지만 그에게 대책은 없다. 사랑도 그러하다. 르윈은 진과 다이앤으로 하여금 임신과 낙태라는 아픔을 짊어지게 만든다. 그러면서도 고귀한 생명에 대한 재고보다도 당장 입을 코트가 없는 지금을 더 먼저 얘기하는 모습은 궁상맞기까지 하다. 경멸스러운 말투로 르윈을 대하는 진은 그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로 자리매김했는지를 보여준다. 지난 사랑에 구차하게 매달리며 여전히 르윈은 소파 위에 누워 있다. 다시 거리로 내몰릴 내일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그럼에도 르윈에게서 긍정적인 시선을 놓을 수 없는 이유는 그가 지닌 음악적 자존감 때문일 테다. 일례로 그가 신세를 졌던 골파인 교수 집에서 노래를 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죽은 동료인 마이크와 함께 부른 곡을 연주하다가 파트너 부분을 대신 부르는 교수 부인을 향해 르윈은 사정없이 소리를 지른다. 아픈 기억이 회상되면서 자신이 지니고 있던 자부심이 뭉개졌기 때문이다. 영화는 아무리 눈치를 보면서 연명하는 삶에게도 건드려선 안 되는 영역이 있음을 이 장면을 통해 고스란히 전달하고 있다. 르윈은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존하기 위해서 음악을 한다고 말한다. 그를 지탱하고 있는 가치가 수면 위에서 요동치는 순간 부인이 다시 모습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이건 우리 고양이가 아니야.
황당한 유머로 갈음한 대목이지만 영화는 이 문장 안에 중요한 이정표를 세웠다. 고양이라는 단어 위에 새겨진 르윈이 보이기 때문이다. 아직 르윈은 그 자신이 아니다.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라도 더 나아가야만 한다.
그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시카고에서 열리는 오디션에 참가한다. 하지만 별 소득을 얻지 못하고 돌아오게 된다. 심지어 돌아오는 길에 고양이를 차로 들이받기까지 한다. 우울한 일상 속에 다시 고양이가 끼어든 것이다. 당황스러운 가운데 죽은 고양이를 뒤로 하고 떠나는 르윈에게서 영화는 존재적 사멸이 느껴지게 만든다. 고양이는 르윈이 책임질 대상이자 존재감을 투영하는 대상이다. 그는 잘못된 고양이를 주워 책임을 다하지 못했고 고양이를 죽이기도 했다. 이렇게 영화는 일상에서 고양이를 지워가며 삶을 온전하게 지탱하지 못하는 르윈의 불안함을 가중시킨다. 그래도 그는 기타를 놓지 않는다. 어쨌든 그 기타 위에 삶이 있으니 말이다.
영화 처음과 마지막은 순환된다는 느낌을 준다. 유사한 장면들을 비틀어 배치하면서 헤어 나올 수 없이 반복되는 고뇌와 불안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미 르윈에게 절망은 일상이 됐다. 그가 마지막에 부르는 'Hang Me, Oh Hang Me'가 모든 심정을 대변한다. 그는 매달아 끝내고 싶은 삶이지만 마냥 놓을 수도 없는 삶이라는 역설을 안고 매일 절망과 기타 사이를 전전한다. 그런 그에게 영화는 잔인하게도 매서운 주먹을 내리꽂는다. 바닥에 엎어진 그에게 세상은 마냥 뒤집힌 곳이다. 하지만 르윈은 이내 일어서서 일전에 걸었던 평범한 거리로 나아간다. 그리곤 이렇게 뇌까린다.
Au revoir
다시 만나자는 말. 고통은 일상이 됐고 절망은 공기처럼 주변을 부유한다. 처음과 마지막이 유사했던 것처럼 르윈에게 찾아올 내일은 오늘, 그리고 어제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마냥 아름다운 예술이 아니라 실체적인 문제와 고뇌에 휩싸인 일상 아래 힘겹게 숨 쉬는 것이 예술이라는 점을 말하면서 말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살아가는 문제다. <인사이드 르윈>이 음악영화에서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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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기분 좋게 주맣 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