地獄変 (1969) 새로운 걸작의 발견. 스포일러 있음.
이 영화는 상당한 걸작이다. 어찌해서 안 알려졌는지 이해가 안 간다.
주인공은 나카다이 타츠야가 맡았는데, 당시 37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초로의 화가 역이다.
내가 이 영화를 굳이 본 이유는, 주인공이 한국인 혈통을 가진 일본인인 때문이었다. 헤이안시대 이야기니, 우리나라로 치면 남북국시대 (통일 신라시대) 이야기다.
한국인들은 공동체를 이루어서 일본인들과 구분되어 산다. 한국인들은 예술가로서 천외천 취급을 받기는 하지만, 일본인 예술가들이 성장함에 따라 점차 밀려나는 상황이다.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이 예술 면에서 조잡하다고 무시하며 강한 자존감을 가지고 있다.
일본 귀족들은, 한국인의 예술적 우월성을 인정은 하지만, 타고 나기를 전쟁포로의 핏줄을 타고 난 천민으로 생각한다.
얼마나 당시 한국인들의 상황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이렇다. 나카다이 타츠야가 분한 화가 요시히데는
강한 자존감과 한국인으로서 가지는 이중적인 위치에 대한 강한 의식 그리고 권력에 대한 반골정신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예술지상주의자이기도 하다.
헤이안시대는 영주 호리카와가 국가를 자기 사유재산처럼 다루고 있다. 농민의 소 한마리까지 빼앗아가며 괴롭힌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요시히데는 이것을 바라보며 분개하지만, 가난한 화가 한명이서 무엇을 하겠는가?
호리카와는 치밀한 사람이다.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있어,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켜봤자 한시간만에 완전진압이다. 사람들이 죽어나가지만, 도시는 겉으로 보기에는 깨끗하고 정돈되어 있으며 부가 넘쳐흐른다. 오직 겉모양만 그렇지만.
호리카와도 마찬가지다. 너그럽고 우아하고 흠 하나 없을 것 같은 신사 그 자체다. 호리카와는 시를 쓴다.
"여기가 내가 다스리는 도시다.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도다."
호리카와는 요시히데에게 그림을 바치라고 한다. 화려하고 행복한 파라다이스를 그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요시히데는
가슴이 말발굽에 짓눌려 죽어가는 노인, 머리가 깨져 죽어가는 젊은이 등을 그려 바친다.
호리카와는 분노한다. 내 흠 하나 없는 순결한 패러다이스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들이다.
하지만 요시히데는 이들이야말로 당신이 다스리는 도시의 모습들이라고 한다.
호리카와는 요시히데를 그냥 죽여 없애고 자기만의 파라다이스 속에서 편안히 살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호리카와는 그런 껄쩍지근한 해결책은 원치 않는다. 요시히데를 굴복시키고 그로 하여금 자기 흠 하나 없는 파라다이스를
인정하고 그려내도록 만들려 한다.
호리카와라고 왜 모르겠는가? 자기가 다스리는 파라다이스의 진실을......
하지만 자기를 둘러싼 귀족들의 이념 세계 속에서는, 그가 다스리는 영토는 분명 파라다이스다. 이것은 이념의 대결이다.
하지만 자기 이상적인 세계관 속에, 요시히데는 자꾸 현실적인 악마를 들여온다. 호리카와의 이념에 자꾸 균열을 일으키려 한다.
호리카와는 자꾸 자기 곁에, 피 흘리는 거지나 노인들의 귀신이 어슬렁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본다.
호리카와와 요시히데의 대결은 점점 더 폭주하기 시작하고 파국으로 치닫는다.
호리카와는 권력으로 요시히데를 짓누르지 않는다. 그것은 완전한 해결이 되지 못한다. 요시히데로 하여금 자기 이념을 포기하고
호리카와의 이념을 받아들여 이를 선전하도록 만들어야 진짜 해결이다.
요시히데는 예술의 힘으로 호리카와와 투쟁하려 한다. 그는 예술지상주의자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그는 호리카와 못지 않게
주변사람들을 희생시킨다. 겉으로는 선량하고 우아하고 순백의 호리카와와는 달리, 그는 겉부터가 난폭하고 남의 파멸을 당연시하고
폐쇄적이고 삐뚤어져 있다.
호리카와가 병풍을 주며 요시히데 더러 파라다이스를 여기 그리라 한다. 요시히데는 거기 지옥도를 그리겠다고 우긴다.
내가 실제 보는 것이 지옥이니까, 지옥을 그리겠다는 것이다. 호리카와는 이것이 요시히데의 진검승부라는 것을 느낀다. 단순한 그림 그리기가 아니라, 호리카와와 요시히데가 서로 이념 승부를 벌이는 것이다. "진짜 지옥을 봤다고 했지? 내가 봐도 놀랄 정도로 실감 나는 지옥을 그려 봐라." 호리카와는 소리친다.
그리고 영화 내내 호리카와와 요시히데는 팽팽한 대결을 벌인다. 이런 이념과 예술세계 속 대결에는 권력도 별 소용 없다.
요시히데는 마지막에 이르러 절벽에 부딪친다. 지옥불에 활활 타는 클라이맥스 부분을 그려야 하는데, 이것을 본 적 없으니 말이다.
진짜 절망과 파멸의 지옥불이란 것은 어떻게 그려야 하나? 진짜 죄악이란?
요시히데는 자기 딸을 불태워 죽이며 이를 관찰하고 영감을 얻는다.
요시히데는 부정직한 권력에 대항하는 민중의 편일까? 그는 권력의 칼춤에도 의연한 선일까?
호리카와의 잔인과 폭력은 악이고, 부정한 권력에 대항하는 요시히데가 저지르는 폭력과 악은 선한 것일까?
그렇다고 호리카와나 요시히데나 마찬가지다......하는 결론을 내려도 좋은 것일까?
호리카와는 요시히데가 바친 지옥도를 보고 충격을 받는다. 그의 이념은 산산조각이 난다. 요시히데가 말한, 예술은 권력에 대항하는
무기이자 힘이다 하는 말이 증명되는 순간이다. 호리카와의 흠 하나 없는 순결하고 완벽한 세계는 이제 추악하고 썩어가는 시체들로 가득한 역겨운 세계가 된다. 하지만 요시히데는? 그는 승리자인가?
호리카와는 요시히데를 비웃는다. 나보고 잔인하고 위선적이라고 하더니, 너는 딸까지 불태워죽이는 놈이구나. 정말 역겨운 악마다. 너처럼 이기적인 놈이 어디 있느냐?
사실 요시히데도 패배자다.
딸을 잃은 그는, 그림을 끝내자 자기 스스로 목을 맨다. 권력자를 위압한 영웅이 아니라, 그림 하나를 위해 딸을 불태워죽인 역겨운 악마가 되어 버린 요시히데가 승자일 리 없다.
이 결과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영화가 제시하는 문제는 아주 복잡 심오하다. 사람들마다 이 영화 속에서 새로운 주제를 찾아낸다. 굉장히 실험적인 면도 있고, 주연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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