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리뷰
과거가 아닌 지금, 다른 곳이 아닌 여기, '너'가 아닌 우리.
패션은 잘 모르겠지만, 영화계의 트렌드 세터는 분명하게 '마블'이라고 말할 수 있다. 멀티버스라는 만화적 설정을 영상화하고, 당당하게 흥행에 성공하기까지 하면서 이제 멀티버스는 단순한 설정이 아닌 하나의 독립적인 장르로 대중에게 인정받았다.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양자경의 멀티버스' 영화라고 알려졌지만, 그렇다고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단순히 멀티버스 영화라고 보기는 어렵다. <에에올>의 정체성을 물을 때, 빼놓을 수 없는 점은 '여성' 그리고 '아시안'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라는 점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PC 열풍이지만 그래도 긍정적으로 꼽을 수 있는 점은 바로 '변화'다. 서사의 주인공이 메이저에서 마이너로, 다수에서 소수로 변하고 있다는 점은 관객들에게도 신선한 시각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그동안 방치되었던 변두리 누군가의 우주에게 서사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특별하게 볼 만하다. 그중에서도 영화 <미나리>처럼, 이민자의 서사가 주인공이 된 것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멀티버스라는 장르와, 이민자라는 주인공의 조합. 언뜻 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이 난해한 조합을 '맛있게' 만들어 주는 것은 바로 B급이라는 정서다. 인생의 덧없음, 가족의 소중함,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야 할 이유 등. 영화를 관통하는 메시지는 차고 넘치지만, 다행스럽게도 <에에올>은 이렇게 무거운 철학적 메시지들을 관객들에게 설교할 생각이 없다.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영화 <소울>이 진중한 자세로 인생에 관한 담론을 펼친다면, <에에올>은 유머러스하지만 가볍지 않게, 대중적이지만 결코 얕지 않은 화법을 사용한다. 진지함 속에서도 유쾌함을 잃지 않는 것. 그 어려운 것을 해내는 주인공은 바로 이 서사의 주인공이기도 한 양자경이다.
양자경이 맡은 '에블린 왕'이라는 인물은 억척스럽고, 가족을 위해 자신의 꿈을 포기하며 자신이 이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그동안 많이 봐왔던 이민자 가족의 가장의 모습이다. 한 마디로 우선 설정부터 지극히 평면적인, 색다른 서사가 없어 보이는 인물이다. 이 평범한 인물의 서사는 '세무조사'라는 하나의 사건에서부터 시작된다.
에블린의 삶에는 누군가가 끼어들 틈이 없다. 딸 조이가 자신의 여자친구인 베키를 할아버지에게 소개하기 위해 찾아오지만, 에블린은 그조차도 허용하지 않는다. 남편인 웨이먼드가 그녀와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이혼 서류'라는 극단적인 해결책을 제시해도, 에블린은 자신을 둘러싼 일상의 일들이 하나둘씩 쳐내기에만 바쁘다. 세무조사도 그중 하나다. 영수증을 모으고, 국세청을 들락거려야 하는 귀찮고 번거로운 일. 영화는 이혼 서류와 세무조사라는 두 가지 장치를 통해, 에블린이 그동안 바쁘다고 핑계를 대며 외면해 왔던 일을 대면하게 만든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것이다.
'조부 투파키'라는 빌런을 막기 위해 다른 멀티버스에서 온 알파 웨이먼드의 갑작스러운 등장과 함께, 에블린은 또 다른 우주의 자신을 만나며 스스로의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한다. 같이 미국으로 떠나자는 웨이먼드의 손을 뿌리치고 톱스타가 된 자신의 모습을 보기도 하고, 쿵푸 마스터가 되거나 유명한 가수가 되어 사람들 앞에 서는 또 다른 '나'의 우주를 발견하기도 한다. 나의 선택이 낳은 또 다른 미래와 그 결과, 바로 1부의 제목이기도 한 내가 될 수 있는 '모든 것 (Everything)'을 발견한다.
에블린은 과거 자신의 선택을 돌아보며, 좀 더 나은 미래를 고르지 않았음을 후회하며 다른 우주에서의 삶을 갈구한다. 그러나 영화는 다른 우주에서의 삶은 이미 '자신의 것'이 아님을 강조하며 에블린의 욕망을 차단한다. 이미 <닥터 스트레인지2: 멀티버스 오브 매드니스>에서 우리가 봐 온 스칼렛 위치의 모습처럼, 멀티버스라는 장르를 말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메시지가 있다. 그것은 '선택과 후회'다.
우리는 과거의 선택을 다시 바꿀 수 없으며, 이 선택의 결과로 앞으로 닥쳐올 미래를 알 수 없다. 나의 모든 선택과 결과를 아는 순간, 불확실성이 주는 일종의 행복감이 깨지는 순간, 우리의 삶은 그 의미를 잃는다.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봐버린 빌런 조부 투파키가 '베이글'이라는 일종의 블랙홀을 통해 세상 모든 것들을 '무'로 돌려버리려는 것처럼, 영화는 모든 것을 알아버렸을 때 닥치는 '허무주의'를 경고하고 있다.
베이글이라는 지극히 일상적인 음식에 모든 것을 담아내는 순간, 베이글은 그 존재의 목적성을 잃어버린다. 그것은 더 이상 아침의 주린 배를 채워주는 평범한 음식이 아닌, 삶의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리는 재앙으로 변한다. 영화는 베이글이라는 하나의 상징성을 통해,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누군가의 우주더라도 그 안에는 나름대로의 숭고한 목적과 행복이 있다고 말한다. 손가락이 핫도그인 바보 같은 우주의 에블린이 손가락이 아닌 발가락으로 피아노를 치며, 그 안에서 또 다른 행복을 발견하듯이 말이다.
에블린이 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을 경험하자 영화는 또 다른 챕터인 '모든 곳 (Everywhere)'으로 향한다. 이 챕터에서 에블린은 또 다른 우주의 나에게 힘을 빌리는 것을 넘어, 또 다른 우주에서의 삶을 경험한다. '모든 것'이 에블린이 선택을 통한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만드는 챕터라면, '모든 곳'은 에블린이 그 선택으로 인한 자신의 '후회'를 돌아보게 만드는 챕터다.
세상 그 어디에도 완벽한 우주는 없다. 에블린은 화려하게만 보였던 톱스타로서의 삶에서도 웨이먼드와 함께하지 못했다는 '후회'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 후회는 웨이먼드와 함께 떠난 지금 현재의 우주와도 연결된다. 웨이먼드와 함께하는 대신, 자신의 꿈을 놓친 지금의 우주와, 웨이먼드와 함께 하지 못하는 대신,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꿈을 이룬 우주. 그 어디에도 옳은 선택과, 틀린 선택은 없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으며, 오로지 선택뿐만이 있다는 사실을 에블린은 그 때서야 깨닫는다. 그리고 과거 자신의 선택으로 마주하게 된 현재 자신의 위치를 되돌아보게 된다.
항상 사람 좋은 미소만 지으며 무능하게만 보였던 남편 웨이먼드는 '싸우지 않는다'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외롭게 삶을 헤쳐나가고 있었으며 늘 자신의 속을 썩인다고만 생각했던 딸 조이의 상처를 그제야 바라보게 된다. 우리의 선택은 단순히 우리에게만 영향을 주지 않는다. 우리의 선택은 주변에까지 영향을 끼친다. 대화를 하고 싶었던 남편 웨이먼드의 신호를 외면하고, 레즈비언인 딸 조이의 선택을 지지해 주지 못했던 자신의 선택들. 에블린은 그 선택들로 인한 지금의 결과를, 현실의 삶이 바쁘다는 이유로 외면했던 오랜 숙원인 '자신의 삶 되돌아보기'를 비로소 시작한다.
개인의 삶에서 시작된 하나의 챕터는 마침내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삶으로 확대되며, 영화는 사람으로서의 에블린과 어머니로서의 에블린의 삶을 자연스럽게 동시에 조명한다. 영화 속 등장하는 가장 큰 갈등인 에블린과 딸 조이의 관계는 단순히 가족애라는 뻔한 메시지로 귀결되지 않는다. '희생'이라는 가치를 논하며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헌신적 사랑이 아닌, 자신의 딸을 위해 싸우는 주체적인 어머니로서의 역할이라는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기도 하며, 멀티버스라는 하나의 장르를 통해 철학적인 답변을 내놓기도 한다. 그 많은 우주에서 하필 지금, 여기, 우리가 만났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 세상은 살아볼 만한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영화는 이 모든 메시지들을 따분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때로는 B급 유머를 활용한 과한 연출을, 때로는 눈이 아플 정도로 화려한 시각적인 연출을 통해 무거운 메시지를 유쾌하게 풀어낸다. 또한 한없이 천박한 화장실 유머부터, 숨을 죽이고 바라보게 만드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담긴 연출까지. 연출을 맡은 다니엘 형제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영화이자 인생에 관한 영화 중 가장 철학적이고, 가장 대중적이며, 가장 화려한 작품이다.
이 많은 우주 속에서도, 결코 희미해 지지 않는 어머니라는 존재에 관하여. 그리고 하필 지금, 여기, 우리여야 하는지 잊고 지냈던 그 이유와 목적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만드는 영화.
더운크리스마..
추천인 10
댓글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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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아시안,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로써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건 현실의 웨이먼드를 상징하는 눈알 스티커를 붙인 에블린의 모습과
조이와 에블린이 돌이 되었을 때, 비록 추락이더라도 기꺼이 함께 굴러 떨어지는 모습이었는데요.
두 장면 모두 사랑을 절절히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크리스마스님께서는 어떤 장면이 가장 인상 깊으셨는지 궁금하네요.
주인공인 에블린 뿐만 아니라, 주변인들의 이야기까지 조명한다는 점에서 조금은 스토리가 난잡하지는 않을까 우려했는데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정말 깔끔한 연출이 빛나던 장면이었습니다!
연출 정말 좋았죠. 또 한 번 보고 싶네요. 다시 한번 리뷰 잘 읽었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인생에 관한 가장 화려하고 철학적인 영화 동의합니다. 대중성은 서구쪽 취향인가 싶긴해요. 저는 재밌게 봤지만 과격한 개그들과 좌충우돌 장면들이 정신 사납단 불호 반응들도 있어서 놀랐거든요
아무튼 멋진 리뷰 잘 봤습니다.